주한 미 평화봉사단 이야기

(2)고교서 한 학기 만에 “평화봉사단 철수”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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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 ‘여보세요’ 1966년 11월 창간호(왼쪽). 소식지 ‘여보세요’ 1967년 12월호 / USC 한국학도서관 제공

소식지 ‘여보세요’ 1966년 11월 창간호(왼쪽). 소식지 ‘여보세요’ 1967년 12월호 / USC 한국학도서관 제공

“만일 내가 한국을 변화시키려고 여기 왔다면, 나는 2년 전에 집에 돌아갔어야 했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 단원이 2년간의 활동을 마친 후 활동보고 설문지에 기록한 글(1968년)이다.

전국의 평화봉사단원을 이어주는 SNS, ‘여보세요’

1966년 9월 전국 각지에 파견된 평화봉사단원들의 일상은 당혹스러움 그 자체였다. Korea-I 단원들은 배치된 학교 인근의 한국인 가정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일주일에 1회 대중목욕탕을 가고(목욕탕에서 이웃들의 시선은 덤), 삼시 세끼 한국 음식을 먹는 일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인터넷, 아니 전화도 거의 보급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서로 연락을 하고 하소연을 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사전 훈련 때는 하와이에서 석 달간 합숙하며 ‘찐 우정’을 다졌는데, 막상 한국에 파견되고 나니 서로 안부를 묻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해 11월 Korea-I 단원들은 ‘여보세요(Yobosayo)’라는 소식지를 창간했다. 전국에 파견된 봉사단원들이 소식지 편집부로 소식을 보내오면, 편집부에서 투고된 원고들을 모아 소식지를 발간했다. 그런 다음, 단원들의 근무지로 소식지를 우편 발송했다. 오늘날 페이스북 그룹 페이지 같은 역할을 한 셈이다. 소식지는 근무기관에서 느끼는 불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 정치적 견해, 단원들 간의 연애 소식, 맛집 등의 정보를 망라했다. 단원들이 이 소식지를 만들 당시만 하더라도 훗날 어떤 연구자가 그 내용을 샅샅이 들여다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학교 과방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날적이를 50년이 지난 후에 어떤 외국인이 한국의 대학 문화사 연구를 하겠다며 들여다보는 것과 비슷할 테니 말이다. 소식지는 20대 초반 치기어린 열정으로 한국에 와서 고군분투한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들의 활동뿐만 아니라 흑역사 역시 그대로 ‘박제’하고 있었다.

영어가 고픈 나라, 한국

주한 미 평화봉사단이 한국에서 활동하던 시기의 한국교육은 격동 그 자체였다. 도시의 중등학교는 과밀학급을 겪고 있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교육의 목표를 대학입시에 두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영어는 수학과 함께 대학입시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이었다. 기대만큼은 아니었지만, 평화봉사단 영어교사들은 그래도 한국의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과학 수업이나 체육 수업은 그렇지 않았다. 강원도 영월공업고등학교에 과학 교사로 배치된 노린 피츠패트릭(Noreen Fitzpatrick)은 소식지 ‘여보세요’ 1966년 11월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 수업 사진 / USC 한국학도서관 제공

주한 미 평화봉사단 수업 사진 / USC 한국학도서관 제공

“저는 오늘부터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아무 TESOL 교재든 필요합니다. 가능한 한 빨리 저에게 보내주세요. (중략) 지금까지도 교장 선생님은 교육위원회의 임원에게 인사를 하며 내가 언어를 충분히 익힐 때까지 영어만 가르치라고 합니다. 나는 차라리 생물학을 가르치고 싶어요. (중략) 실험을 할 만한 도구가 한 개도 없어요.” 원어민이라는 이유만으로 학교의 관리자들은 과학 교사와 체육 교사에게 영어를 가르치라고 강요했다. ‘여보세요’ 편집장 조이스 치카렐리(Joyce Ciccarelli)는 이 상황에 대해 “화는 넣어두고, 이 상황을 직면합시다. 한국은 ‘영어가 고픈(English-hungry)’ 나라니까요”라고 답했다.

평화봉사단이 파견된 학교의 학부모들은 자신의 자녀가 ‘백인’, ‘미국인’에게 영어를 배운다는 사실만으로 매우 흡족해했다. 반면 평화봉사단이 파견되지 않은 학교의 학부모들은 서운해했다. 평화봉사단은 파견된 고등학교에서 한 학년을 1년씩 집중적으로 가르치려고 했으나, 학부모들의 반발로 주 1회씩 모든 학년, 모든 학급에 공평하게 수업을 해야 했다. 70여명의 학생이 빽빽이 앉아 있는 교실에서 주 1회의 영어회화 수업은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한 봉사단원은 자신이 그저 “인간 카세트테이프” 같았다고 회고했다. 영어 교과서를 원어민 발음으로 읽으면 학생들이 일제히 복창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평화봉사단원들은 1주당 25~30시간씩 수업을 했다. 목을 많이 쓰는 일이어서 피로감이 매우 심했다. 비슷한 강도의 수업을 하느라 과로에 허덕이던 한국인 동료 교사들을 보며 그나마 겨우 버텨낼 수 있었다.

입시가 더 급한 나라

어쩔 수 없이 일선 학교에서 ‘인간 카세트테이프’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평화봉사단 영어 교사들은 끊임없이 한국 영어교육의 근본을 고민했다. 시험과 암기 위주의 수업 방식은 어학 실력 향상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 단원은 소식지에 “한국 학생이 사고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현재의 교육 시스템에서 논리와 추론 같은 사고 과정을 충분히 배울 수는 없다”고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평화봉사단은 처음 배치될 때 전국적인 기대와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한 학기 만에 상황이 역전됐다. 평화봉사단이 배치된 지 한 학기가 지나지 않아 일선 학교와 문교부는 엄청난 비판에 직면했다. 급기야 평화봉사단 무용론이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고등학교에서 평화봉사단 수업을 모두 폐지해달라는 학부모와 학생들의 요청이 쇄도할 정도였다. 영어회화 수업이 정작 대학입시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발에 직면한 평화봉사단원들은 소식지에 하소연을 털어놨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이 촬영한 농촌 풍경 / USC 한국학도서관 제공

주한 미 평화봉사단이 촬영한 농촌 풍경 / USC 한국학도서관 제공

주한 미 평화봉사단이 촬영한 농촌 풍경 / USC 한국학도서관 제공(1967년 K-1, Glen Odell, Dian Odell 촬영)

주한 미 평화봉사단이 촬영한 농촌 풍경 / USC 한국학도서관 제공(1967년 K-1, Glen Odell, Dian Odell 촬영)

빌 웨이시(Bill Waycie)는 ‘평화봉사단이 고등학교 중퇴자를 만들었나’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원고를 투고했다. 그의 말마따나, 주한 미 평화봉사단의 영어교육이 대학 입학시험에 별 도움은 안 됐을지언정, 실질적인 영어 실력을 떨어뜨리거나 학교 중퇴율을 높이는 등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지는 않았다. 웨이시는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고등학교에 주한 미 평화봉사단의 영어교사를 배치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따라서 성급하게 고등학교에서 철수시키지 말고 좀더 추진해보라고 주장했다. 단원들의 의견은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Korea-I 단원들은 고려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등 사범대학 영어교육과로 재배치돼 사범대 학생들을 가르치게 됐다. 그 이후로 입시 부담이 덜한 중학교로 평화봉사단원들을 배치한다는 규정이 생겨났다.

시험공화국, 서울공화국

평화봉사단원들은 근무 지역이 서울이냐, 지방이냐 그리고 근무학교가 일류학교냐 일반학교냐 여부로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됐다. 서울에서 근무하게 된 단원들은 경기고, 경기여고, 서울고, 경복고, 서울사대부고 등 소위 일류학교에 배치됐다. 과학 교사는 실험이 필요한 특성화고등학교, 당시로는 실업계고등학교로 갔다. 이를테면 농업고등학교, 공업고등학교, 수산고등학교 등이었다. 이들은 주로 지방에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과학 교사들은 대개 영어를 가르치도록 강요받았다. 1967년 1월 평화봉사단 과학 교사 워크숍에 참여한 경제기획원의 한 관료는 봉사단원들이 실업계고등학교가 아닌 인문계고등학교로 전환 배치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봉사단원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실업계고등학교에서 제대로 된 실습 교육을 하는 것이 한국교육에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상과 현실의 격차는 컸다. 당시 실업계고등학교의 교육은 저평가됐으며, 과학 과목은 영어 과목이 가진 위상에 가려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일부 단원들은 영어를 배울 생각이 전혀 없고, 장래에도 영어를 쓸 가능성이 희박한 학생들에게 억지로 영어를 가르쳐야 할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강제로 영어 단어와 문법을 암기할 시간에 다른 실용적인 기술을 배우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는 주장이었다. 서울의 소위 일류고등학교, 대학입시 위주의 교육환경 속에서 쥐어짜듯이 일을 해야 했던 단원들의 경험과 지방의 실업계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의 학습 의욕 부진, 어려운 가정환경, 흥미 부족 등을 목도한 단원들의 경험은 이처럼 전혀 달랐다. 마치 동시대의 전혀 다른 나라 같았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이 촬영한 서울 숭례문 / 1967년 K-1, Glen Odell, Dian Odell 촬영

주한 미 평화봉사단이 촬영한 서울 숭례문 / 1967년 K-1, Glen Odell, Dian Odell 촬영

교육에 대한 무력감

주한 미 평화봉사단이 처음 왔을 때 한국은 박정희 정권이 집권하고 있었다. 1968년은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된 해로 당시의 학교는 군부독재 하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의 미니어처나 마찬가지였다. 교실 내에서 교육을 빙자한 체벌과 폭력이 난무했다. 평화봉사단원들은 무방비의 상태에서 폭력에 노출됐다. 소식지 곳곳에 그 충격과 공포, 트라우마를 게재했다. 한 단원은 “우리 학교에 매 없이 학생들이 공부하도록 하는 교사는 아무도 없다”는 내용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이 한국에 파견된 초기, 많은 단원이 소식지에 신체적 체벌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체벌에 관한 내용이 뜸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전혀 게재되지 않았다.

교실 내 체벌은 주한 미 평화봉사단이 파견된 1966년부터 종료된 1981년까지 사라지지 않고 이어졌다. 일개 미국인 봉사단원이 문제를 제기한다고 해서 한국교육 내에 팽배한 권위주의 문화가 사라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한국교육 시스템의 고질병이나 병폐에 대한 문제 제기는 민간교류를 목적으로 하는 봉사단의 목적을 흐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제1세계’ 시민의 월권으로 보일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평화봉사단원은 파견국의 정치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권위주의적인 한국 공교육 비판은 곧 한국의 군부독재와 권위주의 정부를 비판하는 행위와 맞닿아 있었던 셈이다. 많은 단원이 한국교육에 무력감을 느끼고, 좀처럼 바뀌지 않으리라 예상했던 것도 사실이다.

한국교육, 바뀐 것과 바뀌지 않은 것

1967년 4월 한 단원은 소식지에 이렇게 썼다. “교육은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하는 가장 전통적인 분야 중 하나죠. 미국에서 시행된 연구들에 의하면, 사상의 기원으로부터 그것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대략 50년이 걸립니다. 하루아침에 한국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Geron J. Spray, ‘Dear Group’, <Yobosayo>, Vol.1 No.6)

민주주의의 개념이 한국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고 해서 내용까지 따라온 건 아니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아직 제대로 민주주의를 실행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지 못한 상태였다. 학원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교육 철학자 존 듀이(1859~1952)의 명저 <민주주의와 교육>이 한국에 이미 소개돼 있었지만, 실제로 교육 현장 내에서 민주주의는 요원하기만 했다. Korea-I 단원들이 한국의 학교를 경험하고 문제 제기를 시작한 지 반세기가 지났다. 한국교육에선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바뀌지 않았을까.

정치와 사회의 민주화와 더불어 학원 민주주의도 형식적으로는 이미 달성된 지 오래다. 더 이상 교사에 의한 교실 내 구타나 체벌은 찾아볼 수 없다. 젊은 세대에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처럼 취급된다. 오히려 약해진 교권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콩나물시루 같던 교실은 사라졌지만, 반대로 이젠 인구소멸을 걱정해야 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대학입시에 대한 부담, 서울 중심 구도는 아예 반세기 전보다 훨씬 심화됐다. 반세기가 흐른 뒤 한국의 교육현장은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

<서나래 안동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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