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보에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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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이즈 어프레이드

외국에서 ‘초현실적인’이란 설명을 붙여놨던데, 딱이다. 생생한 일화처럼 보이지만 미묘하게 핀트가 어긋난다. 감독으로서는 오랫동안 머릿속에 담아뒀던 예술 영화를 찍은 셈인데, 호아킨 피닉스와 조연들의 연기가 불꽃 튄다.

제목 보 이즈 어프레이드(Beau Is Afraid)

제작연도 2023

제작국 미국

상영시간 179분

장르 모험

감독 아리 애스터

출연 호아킨 피닉스, 패티 루폰, 네이단 레인, 에이미 라이언, 카일리 로저스, 스티븐 헨더슨, 파커 포시, 아먼 나하페티언

개봉 2023년 7월 5일

등급 청소년 관람 불가

수입/공동배급 싸이더스

배급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싸이더스/(주)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싸이더스/(주)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 영화가 어렵다, 혼란스럽다는 말이 저로서는 이해가 안 됩니다.” 시사회가 끝난 기자간담회 자리에 나온 아리 애스터 감독의 말이다. 물론 그럴 것이다. 시나리오만 11년 동안 다듬어온 영화라고 하니까.

그런데 거리에서 만난 온몸 문신남이 그의 아파트에 난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집안 욕조에 물을 받아 목욕하고 있는데 천장에 매달린 낯선 남자가 땀방울을 삐질삐질 흘리며 버티고 있다가, 거미가 무서워 떨어져 우리의 주인공과 욕조 속에서 뒤엉킨다 등과 같은 난데없는 전개가 혼란스럽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할 따름이다. 한마디로 영화는 ‘불친절한 농담’에 가깝다.

불친절한 농담을 담은 영화

영화 주인공 ‘보(beau)’에게 일어난 일은 도대체 무엇인가. 디테일을 생략하고 최대한 이야기의 대강을 적어보자. 미국 뉴욕의 낡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보는 불안·강박장애를 앓고 있다. 자신은 아무것도 안 하고 쥐죽은 듯이 자고 있는데 이웃에 사는 누군가는 제발 음악 소리를 줄여달라는 손글씨를 써서 문틈에 집어넣는다. 음악을 튼 것은 자신이 아니므로 무시하고 자는데, 문틈으로 넣는 메모지에 적힌 내용은 점점 수위를 높여 강박적으로 바뀐다. “내가 소리 좀 줄여달라고 했더니 더 크게 틀다니!” 그 순간 고막을 찢는 음악 소리. 귀를 틀어막고 자려 했지만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눈을 떠보니 아침이 아니라 늦은 오후. 아뿔싸, 아버지 기일에 맞춰 엄마에게 가는 비행기를 예약해놨는데 늦었다. 간신히 짐을 챙겨 떠나려던 순간, 잊고 있던 물건이 생각나 가지고 나와보니 그사이에 자신이 싸놨던 짐을 누군가 훔쳐가 버렸다. 진정하기 위해 처방 약을 먹었는데 반드시 물과 함께 먹어야 한다는 정신과 의사의 경고가 뒤늦게 생각이 났다. 물과 안 먹었다면 부작용은 뭐지?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이 나와 있다. 마침 아파트는 수도가 고장 나 단수된 상태. 길 건너 편의점에 가려면 길을 좀비들처럼 점령하고 있는 히피들을 헤치고 가야 한다. 생수 한 병을 사들고 돈을 계산하려고 하니 카드는 안 되고, 현금으로 계산하려는데 주인은 계속 잔돈이 모자란다고 한다. 다시 아뿔싸, 그 틈에 역시 좀비들처럼 길거리의 모든 히피가 아파트 입구로 돌진해 자신의 집을 점령했다.

앞서 ‘디테일을 생략한 스토리’라고 했는데 디테일을 보면 보가 느끼는 불안이나 긴장은 확실히 과장됐다. 보가 물과 함께 약을 먹지 않았을 때 생기는 부작용의 구글 검색 결과는 “물을 안 먹고 약을 먹은 사람의 대부분은 입원하거나(hospitalization) 죽었고…”와 같은 AI 검색 요약 결과와 물을 안 먹어서 죽은 사람의 추도사 따위가 나오고 있다. 실제 저런 검색 결과일 가능성? 없다. 영화를 보면서 실제 저런 약이 있는지 약 이름(zypnotycril)을 받아적어 놨는데 찾아보니 그딴 약, 없다.

외국에서 이 영화를 소개할 때 ‘초현실적인’이라는 설명을 붙여놨던데, 딱이다. 생생한 일화들처럼 보이지만 앞뒤 선후 관계를 생각하면 미묘하게 핀트가 어긋난다. 따지고 보면 전혀 앞뒤가 맞지 않은 비논리로 일관하는데도, 한 발짝 물러나 원경(遠景)에서 보면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거의 매일 밤 그런 일을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바로 꿈속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이건 불안증 내지는 신경증적 정동장애를 앓고 있는 ‘보’의 눈에 비치는 백일몽 같은 것일까.

삶의 근원을 찾아가는 보의 여정

앞서 이야기한 부분은 영화의 3분의 1쯤까지의 이야기다. 전체 이야기는 도시에 홀로 나와 살고 있는 보가 자신 삶의 근원, 고향, 어머니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영화는 비논리적인 내러티브로 일관하는 듯하지만 뜯어놓고 보면 감독의 말마따나 이해하기 쉬운 메타포를 사용하고 있다. 예컨대 영화의 엔딩에서 보는 모터보트를 타고 집 앞의 호수(또는 바다)를 건너는데 난데없이 섬이 출현하고, 그 가운데 있는 동굴을 통과한다. 영화의 시작은 보의 시각에서 ‘터널’을 뚫고 태어나는 장면이다. 보가 통과하는 동굴은 어머니 질의 은유다. 감독으로서는 오랫동안 머릿속에 담아뒀던 예술 영화를 찍은 셈인데, <조커>(2019)에서 몰릴 대로 몰린 루저 아서 플랙 역으로 더는 없을 정상을 찍은 호아킨 피닉스뿐 아니라 조연들의 연기도 불꽃을 튀는 영화다.

아리 애스터 감독의 영화를 기대하는 이유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상자료원


리뷰 덕분에 그의 전작 <유전(Hereditary)>(2018)을 넷플릭스를 통해 다시 봤다. 다시 봐도 수작이다. 시사회를 보기 전에 가급적 사전정보를 보지 않고 들어간다. <보 이스 어프레이드>라는 제목만 놓고 볼 때 <유전>처럼 중산층 가족을 중심에 놓고 이를테면 보가 두려워하는 어떤 존재에 의해 망가지는, 그런 내용의 영화일 것으로 생각했다. 감독이 쌓아온 작품들의 경력이 <유전>도 그렇고, 이 코너에서 리뷰한 <미드소마>(2019·주간경향 1336호)도 그렇고 공포장르였으니까. 영화 정보를 모아놓은 사이트 IMDB 등에서는 이 영화의 여러 장르 중 하나로 공포(horror)도 들고 있던데 그쪽을 기대하고 극장에 간다면 확실히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이 영화는 기자간담회 때 감독의 말처럼 코미디 장르, 좀더 세분하면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하나 더하면 아트 영화 정도?

기자간담회에서 영향을 받은 한국영화가 있냐는 질문에 감독이 제일 먼저 꼽은 것은 고(故) 김기영 감독이었다. 김기영 감독 영화를 보면 항상 강조하는 것이 본인의 오리지널 스토리라는 점이다. 예컨대 <하녀>(1960)의 오프닝 타이틀 위에는 하얀 고딕체로 ‘김기영 오리지널 시나리오’라고 적어놓고 있다(사진). 굳이 그런 부가적인 설명을 붙여놓은 것은 이 이야기는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자신의 창작품이라는 자부심 같은 게 있어서일 터.

<보 이스 어프레이드>까지 지금까지 나온 아리 애스터 감독의 장편영화가 고작 3편임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영화팬들이 그의 영화 신작을 기대해온 이유도 비슷할 것이다. 이 천재성이 엿보이는 감독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이전부터 쭉 궁금했다. 내한한 자리 가까이서 지켜보니, 의외로 단어선택에 신중을 거듭하는, 말하자면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내한 간담회 자리에선 한국영화나 감독에 대한 질문이 한 번으로 족할 텐데, 여러 차례 나왔다. ‘두 유 노 갱냄스톼일?’의 2023년판 버전을 보는 것 같아 살짝 낯이 뜨거웠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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