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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떠났던 미국의 유네스코 재가입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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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지난 6월 12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미국의 유네스코 복귀 요청을 발표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오드리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지난 6월 12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미국의 유네스코 복귀 요청을 발표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친애하는 사무총장님, 유네스코를 창설한 회원국으로서 미합중국은 유네스코의 권한과 임무를 정립하고 발전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유네스코 창설 이후 이러한 임무는 중요성이 증대됐으며 유네스코 본연의 관심사인 문화유산 보호와 과학, 교육에 더해 새롭게 등장하는 도전 과제에 유네스코가 대처하면서 유네스코는 계속 성장할 것이라 우리는 확신합니다.”

리처드 베르마(Richard Verma)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2023년 6월 초 오드리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에게 미국의 유네스코 복귀를 알리는 서한에서 이같이 말했다.

2023년 6월 현재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회의장에는 미국 대표의 좌석이 없다. 유네스코는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두고 유엔의 교육, 과학, 문화, 커뮤니케이션 이슈를 논의하고 여러 나라가 합의를 도출하는 국제기구다. 유네스코는 2년마다 홀수 해에 총회를 연다. 회원국들은 총회에서 주요 사안을 검토하고 결정한다. 우리가 유네스코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세계유산을 규정한 세계유산협약, 문화다양성 협약으로 불리는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에 관한 협약’ 등 문화 분야의 중요한 국제협약들이 유네스코총회에서 탄생했다. 협약을 비롯해 유네스코가 다루는 다양한 영역의 주요 사안은 투표로 결정한다. 투표권은 회원국만이 행사할 수 있다. 이러한 중요 결정을 하는 유네스코 회의장에 지난 5년간 미국 좌석은 보이지 않았다. 2018년 12월 31일자로 미국이 유네스코를 탈퇴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가입 승인되자 분담금 끊고 탈퇴 

미국이 유네스코에 돌아온다. 유네스코총회 회의장에서 나라 이름이 적힌 명패를 치우고 떠난 지 5년 만이다. 흥미로운 점은 유네스코총회장에서 미국 표기는 유나이티드 스테이츠(United States)가 아닌 에따쥐니(´Etats-Unis)다. 유네스코가 프랑스에 본부를 두고 있어 프랑스어로 표기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팔레스타인의 유네스코 가입에 반대 입장을 고수해 왔지만 2011년 유네스코 회원국들이 총회에서 팔레스타인의 가입안을 승인하면서 외교적 좌절을 경험했다. 미국 의회는 팔레스타인을 회원국으로 승인하는 국제기구에 분담금 납부를 금지한다는 법을 제정한 터라 미국 정부는 유네스코에 분담금 납부를 중단했다. 이어 2017년 10월 트럼프 대통령이 유네스코 탈퇴를 선언했다.

유네스코가 공식 발표한 미국의 유네스코 탈퇴일은 2018년 12월 31일인데 미국의 탈퇴 선언과 실제 탈퇴까지는 상당한 시간차가 있다. 회원국이 탈퇴를 선언한다고 회원국 명단에서 곧바로 삭제되지는 않는다. 유네스코의 가입과 탈퇴를 규정한 유네스코헌장에 따라 탈퇴 절차를 밟고, 다음 유네스코총회에 안건으로 상정해 보고 후 승인되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당시 195개 회원국 가운데 미국의 유네스코 분담금 비율은 20%가 넘었다. 유네스코에 미친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분담액만큼 예산이 줄어든 유네스코는 직원 감원과 사업 우선순위 조정 등 조직과 사업 등 가능한 모든 분야에서 개혁해야 했다.

미국이 유네스코를 탈퇴했다 복귀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냉전이 한창이던 1984년부터 2003년까지 미국은 무려 19년간 유네스코와 관계를 끊은 적이 있다. 1970년대 미국의 비디오, 영상 콘텐츠 등 수많은 정보가 국경을 넘어 일방적으로 유입되는 것에 위기감을 느낀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지역의 제3세계 회원국들이 미국을 겨냥해 국제 정보 유통의 불균형 해소를 주장하며 유네스코 무대에서 장기간 정치 논쟁을 이어가자 당시 미국 레이건 행정부가 회원국 탈퇴 결정을 내렸다.

중국 최대 분담금 내며 영향력 키워 

그렇다면 미국이 유네스코에 재가입(reentry)하고 다시 유네스코 회의장에 나오는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유네스코에서 미국의 국제정치적 입지를 회복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유네스코는 유엔의 교육, 과학, 문화를 망라한 영역에서 미래 방향을 설정하고 규범을 정하는 곳이다. 인공지능(AI) 윤리 이슈를 비롯한 글로벌 핵심 이슈들이 다뤄지는 동안 미국이 지난 5년간 유네스코 논의의 장에서 빠지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반영할 기회를 잃었다. 그사이 중국은 유네스코 분담금 비율을 꾸준히 늘려 현재 19.7%로 분담금을 가장 많이 납부하는 나라로 부상했다. 중국의 영향력 증대에 마냥 손 놓고 바라만 볼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셈이다. 국익 차원에서 이는 커다란 손실이다. 미국은 유네스코 복귀의 가장 큰 걸림돌이던 ‘분담금 납부 제한’ 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담금 납부 제한 조항의 적용을 대통령이 면제할 수 있는 권한을 포함하는 2023 회계연도 세출법안을 최근 통과시켰다. 미국 의회가 제정한 법에 따라 불가능하던 미국 정부의 유네스코 분담금 지급이 다시 가능해진 것이다.

베르마 부장관의 서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대목은 미국이 유네스코의 개혁 노력을 평가한 점이다. 미국은 유엔에서 가장 많은 재정을 부담하면서 국제기구의 방만한 운영, 저효율성, 정치적 편향성 등에 대해 꾸준히 문제 제기를 해왔다. 그런데 이번 서한에서 “우리는 유네스코가 핵심 운영 및 행정 개혁들을 이행하고자 노력한 점, 뿐만 아니라 정치적 논쟁, 특히 중동 문제에 관한 정쟁을 줄이는 데 집중한 점을 주목한다”며 그간 지적한 문제점들이 개선됐다고 평가했다. 중국 견제를 위해 복귀가 시급했던데다 보다 외교적으로 세련된 유네스코 복귀 명분을 고심하던 미국이 유네스코에 요구해온 과제가 이행됐기에 복귀한다는 쪽으로 내부 입장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서한에서 유네스코총회의 투표권 행사와 유네스코집행이사국 자격을 포함해 회원국이 가지는 모든 특권을 회복하면 첫째, 2023년 잔여기간에 산출된 유네스코 분담금 제공, 둘째, 유네스코 홀로코스트 교육 프로그램, 언론인 안전, 우크라이나의 문화유산 보호, 아프리카 지역의 과학기술, 공학, 수학 교육 등 지원을 위해 1000만달러(약 130억원)의 자발적 기여금 공여를 위한 미국 의회와의 작업 착수, 셋째 2024년 미국의 유네스코 분담금과 그간의 분담금 연체금 납부를 위해 미국 의회에 2024 회계연도 예산 1억5000만달러(약 1950억원) 배정 요청 등을 추진할 계획임을 밝혔다.

한국 분담금 8위…6월 29일 특별총회 촉각 

유네스코는 미국의 유네스코 복귀 승인을 다루기 위해 오는 6월 29일부터 이틀간 유네스코본부에서 유네스코 특별총회(extraordinary session)를 개최한다고 회원국들에 공식 발표했다. 1945년 창설 이래 유네스코 역사에서 미국이 차지한 비중과 역할을 고려할 때 이번 특별총회를 계기로 미국은 회원국의 모든 권리를 회복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폐쇄한 유네스코 주재 미국대표부도 다시 파리에 개설될 전망이다. 유네스코는 유엔기구 가운데 유일하게 국가위원회(National Commission for UNESCO)라는 국제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 유네스코헌장에 따라 모든 회원국은 국가위원회를 조직해 운영하고 있고, 남북한 포함 199개에 달한다(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1954년에 창립해 2024년에 70주년을 맞이한다). 미국의 유네스코 복귀로, 해산됐던 유네스코미국위원회도 다시 구성될 것으로 보인다.

재가입 승인 직후 미국 대표의 발언에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을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오는 29일 밤 10시(파리 현지시간 낮 2시)에 개막하는 유네스코 특별총회는 유튜브로 전 세계에 생중계될 전망이다. 대한민국은 유네스코 분담금 3.3%를 납부(분담금 순위 8위)한다. 유네스코집행이사국으로서, 유네스코 외교 무대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이 날로 커지고 있다.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이번 유네스코 제5차 특별총회에 우리 국민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까닭이다.

<김용범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선임전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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