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자격증’ 공인중개사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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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차인 울리는 ‘범죄 중개인’ 노릇 물의…제도 개선 시급

2022년 10월 30일 서울의 한 공인중개사 시험 고사장으로 수험생이 들어가고 있다. / 연합뉴스

2022년 10월 30일 서울의 한 공인중개사 시험 고사장으로 수험생이 들어가고 있다. / 연합뉴스

전국적으로 수천억원대의 피해금액을 양산하고, 세입자들의 삶을 파괴한 ‘전세사기’에 공인중개사가 대거 가담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파문이 커지는 중이다. 지난 6월 8일 경찰청의 ‘전세사기 전국 특별단속 중간결과’ 발표 내용을 보면 현재까지 파악된 전세사기 피해자만 2996명, 피해금액은 4599억원이다.

지난 5월 말까지 진행된 경찰 특별 수사에서 모두 986건의 전세사기가 적발됐고, 이에 가담한 2895명이 검거됐다. 이중 불법 중개행위로 검거된 공인중개사는 무려 486명(16.8%)이다. 국토교통부가 파악한 전세사기 의심거래 1322건만 놓고 보면 연루된 970명 중 절반에 가까운 431명(44.5%)이 공인중개사와 중개보조원이었다.

세입자 입장에서는 통상 일면식도 없는 집주인과 임대차계약을 체결하면서 유일하게 믿고 의존할 수 있는 대상이 공인중개사다. 법적으로 성실 중개 의무가 있는 공인중개사가 전세사기에 적극 가담했다는 사실은 개인의 일탈행위를 넘어 제도의 신뢰와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문제다. 이미 공인중개사 자격증 소지자가 50만명을 넘었다. 매년 2만명 이상이 새로 공인중개사로 배출되고 있다. 추가 전세사기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공인중개사 제도 개선에 시급히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바닥’으로 떨어진 공인중개사 신뢰도

1985년 도입된 공인중개사 자격제도는 공인중개사법으로 그 지위와 업무 범위가 명시돼 있다. 매년 한 차례 국가전문자격시험을 통해 합격자를 배출한다. 시험응시에 학력이나 나이 등의 제한이 없다. 법으로 금지된 자격증 대여로 적발되거나 금고 이상(집행유예 포함) 형을 선고받으면 자격이 취소된다. 자격증을 취득한다고 해서 곧장 중개업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관할 지자체에 신고 및 등록허가 절차를 거쳐 중개사무소를 개업하거나, 개업 중개사무소에 취업해 소속된 신분이 되면 중개업이 가능하다.

일자리 구하기가 어려워지면서 공인중개사 자격증은 ‘국민 자격증’으로 떠올랐다. 2021년엔 40만명이 넘는 응시생이 몰리며 ‘어른들의 수능’으로까지 불렸다. 응시생 10명 중 4명가량은 20~30대가 차지했다. 2020년대 들어 합격률은 매년 30% 내외(2차 시험 기준), 신규 배출되는 공인중개사는 연간 2만명이 훌쩍 넘는다. 국토부의 집계에서 공인중개사는 2021년에 49만명을 넘어섰기 때문에 최근 기준으로는 자격증 소지자가 50만명을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실제로 개업해 활동하는 공인중개사는 올해 1분기 기준 11만7745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공인중개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높지 않은 편이다. 국토부가 중개수수료 개편을 위해 2021년 국토연구원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국민 10명 중 4명 이상이 공인중개사의 업무처리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국토연구원의 2009년 보고서에서는 공인중개사에게 “윤리의식이나 신뢰가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전체의 30%에도 못 미쳤다.

6월 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윤승영 경찰청 수사국장이 ‘범정부 전세사기 전국 특별단속’ 중간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6월 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윤승영 경찰청 수사국장이 ‘범정부 전세사기 전국 특별단속’ 중간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국민 개인 자산의 70~80%는 부동산에 몰려 있다. 고질적인 시장 불안정과 가격폭등, 전·월세 수급난 등 기본적으로 부동산 시장에 대한 신뢰도 자체는 높지 않다. 그간 일부 공인중개사들이 깡통전세나 불법 중개, 시장 교란 행위 등 물의를 일으켜 신뢰 추락을 자처한 부분도 있다. 박상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20년 국감에서 공개한 자료를 보면 그 해 2~8월간 집계된 부동산 불법 행위(1374건) 중 ‘집값 담합’이 828건으로 가장 많았는데, 공인중개사가 주도한 집값 담합이 461건으로 절반을 넘게 차지했다.

자격증 소지자가 늘면서 과다경쟁을 하다 보니 전세사기와 같은 불법 행위에 중개사가 빠지기 쉬운 구조라는 분석도 나온다. 서진형 경인여대 MD상품기획비즈니스학과 교수는 “서울의 경우 개업 중개사가 6만명인데 지난해 월 아파트 거래가 1000건도 못 미쳤다”며 “과다경쟁 방지를 위해 자격증 시험제를 개편하고, 기존 중개사는 직업윤리와 전문지식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개선안 입법 시급, 정부 “전반적 개편 준비”

국토연구원은 2010년 발표한 공인중개사 제도 개편 연구에서 “다른 전문자격직종처럼 합격 후 실무연수 등을 통해 업무의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며 “영세한 형태의 단순 중개업무에서 벗어나 부동산 중개, 등기, 공증, 보험, 자산·임대관리 등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개선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밝혔다.

전세사기가 사회적 재난 수준으로 확대되면서 국회에는 공인중개사 제도 관련 개선 법안만 10여 개가 발의돼 있다. 시험을 현행 절대평가에서 상대평가로 바꿔 공인중개사 수를 적정 수준에서 조정하는 내용의 법안도 그중 하나다. 다만 이를 두고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 사이에서 “형평에 맞지 않다”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어 본회의 문턱을 넘긴 쉽지 않을 전망이다.

불법 중개 행위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하기 위해 현 임의단체인 공인중개사협회를 법정단체로 지정하고, 협회에 단속 및 신고 권한 등을 부여하는 내용의 공인중개사법 개정안도 지난해 10월 발의됐다. 법안 공동 발의에는 국민의힘, 민주당, 정의당 등 여야 의원들이 골고루 참여했다. 공인중개사협회 관계자는 “정부나 지자체가 수많은 중개 건수를 단속하기엔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다”며 “협회에서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관리감독에 나서는 게 국민의 재산권을 지키는 길”이라고 밝혔다.

5월 11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전세사기 피해 특별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에서 피해자들이 발언을 하고 있다. / 김창길기자

5월 11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전세사기 피해 특별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에서 피해자들이 발언을 하고 있다. / 김창길기자

반면 협회가 법정단체가 된다고 제대로 관리감독이 되겠냐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전세사기로 공인중개사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인 상황에서 협회 차원의 자율적 관리감독 체계를 국민이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부동산 관련 한 공공기관 관계자도 “협회가 회비를 내는 회원을 대상으로 제대로 관리감독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라며 “그것보다는 공인중개사의 불법 행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게 더 시급하다”고 말했다.

처벌이 너무 가볍다는 지적에 따라 전세사기 범죄 관련 최대 15년 이하의 징역형을 내리도록 하는 형법 개정안, 전세사기 등으로 5억 이상 피해를 줄 경우 가중처벌토록 하는 특정경제범죄처벌법도 국회에 계류 중이다. 올들어 연간 최대 2억원으로 상향된 공인중개사 공제한도(사고 시 보증보험)를 ‘1건당 2억원’으로 상향하는 내용, 공인중개사의 보증사고 이력을 공개하는 내용, 전세사기 가담 시 피해금액을 몰수하고 추징하는 내용 등이 담긴 개정안들도 각각 발의돼 있다.

전문 중개법인·프롭테크 등 대안 키워야

국토부 관계자는 “전세사기를 계기로 부동산 중개제도를 전반적으로 개편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돼 5월부터 전담 태스크포스를 운영 중”이라며 “전문가들과 함께 현장의 불법 중개행위 등 문제점을 진단하고 제도개혁 및 선진화 방안 등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관련 법률 정비나 제도 개선 외 부동산 시장 자체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견해도 나온다. 부동산 거래 대부분이 1인 사무소 내지는 소규모 중개업소를 통해 이뤄진다. 전세사기와 같은 범죄에 소비자가 노출되기 쉽고, 사고 후 수습도 어렵다. 이 때문에 정부는 중·대형 전문 부동산중개법인 설립을 장려하거나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 등 첨단 기술이 활용되는 부동산 서비스인 ‘프롭테크’ 활성화를 유도해 왔다. 한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미국의 경우 전문 법인이 부동산 컨설팅부터 중개, 등기, 세무, 주택관리 등 종합 서비스를 제공한다”며 “국내는 오랜 기간 영세한 규모로 중개사무소가 운영돼온 관행이 깊어 중개법인을 통한 거래 확대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프롭테크 업계 역시 이 같은 관행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직방, 다방 등 대형 업체들도 부동산 직거래나 자체 플랫폼을 통한 거래 중개서비스를 시도하고는 있지만, 기존 오프라인 매물의 광고나 관련 연계 사업에서 실질적인 수익을 얻고 있다. 일부 업체의 경우 일명 ‘반값 중개료’를 표방하며 전담 공인중개사 모집 등에 나서기도 했다가 번번이 기존 중개업계와 갈등을 빚거나 반발에 부딪혔다.

전세사기를 계기로 새로운 시도가 더 주목받고는 있다. 직방은 최근 빌라와 다가구주택을 대상으로 매물의 탐색부터 계약까지 전 과정을 책임지는 ‘지킴중개’를 선보였다. 안성우 직방 대표는 “‘지킴중개’ 매물은 사고 이력이 없는 공인중개사와 전문중개법인의 계약검수팀이 철저하게 이중검수한 뒤 계약을 맺는 구조”라며 “소비자 중심의 안전한 중개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잃어버린 중개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겠다”고 밝혔다.

공인중개사 제도 개선과 함께 임대사업자 규제를 병행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임재만 세종대학교 부동산학과 교수는 “보다 근본적으로는 자본도 없이 수천 가구의 집을 소유한 채 임대업이 가능하도록 방치돼 있는 임대시장 제도가 문제”라며 “전세사기로 악용될 수 있는 무분별한 갭투기를 방지하고, 임대업자에겐 일정금액의 ‘보증금 반환 준비금’을 마련하도록 하는 등의 대안 도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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