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의료현장’ 특별기고

(4)‘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소비자 편익이란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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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는 병원이 보험사와 계약을 맺어 환자들을 진료하고, 비용을 민간보험사에 청구한다. 환자들은 보험사가 계약한 병원에서 보험사가 허용한 치료만 받을 수 있다. 나아가 보험사가 의료기관을 개설하거나 인수·합병해 소유하기도 한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미국에서는 병원이 보험사와 계약을 맺어 환자들을 진료하고, 비용을 민간보험사에 청구한다. 환자들은 보험사가 계약한 병원에서 보험사가 허용한 치료만 받을 수 있다. 나아가 보험사가 의료기관을 개설하거나 인수·합병해 소유하기도 한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실손보험 청구간소화’로 알려진 보험업법 개정안이 14년 만에 국회 상임위를 통과했다. 보험사들이 적극 나서 가입자들의 소액청구 불편을 해소해야 한다고 외쳐온 결과다. 가입자들이 한 해 수천억원을 더 돌려받을 수 있다는 달콤한 편익을 약속하면서. 이상하지 않은가? 틈날 때마다 손해율이 급증했고, 적자를 기록해 보험료를 올려야 한다고 볼멘소리하기 바쁜 보험사들이 굳이 돈을 더 돌려주겠다며 혈안인 속내가 말이다.

언론도 지난 수년간 이 보험업법 개정이 ‘소비자들을 위한 법’이라며 보험사들 입장을 받아쓰기 바빴다. 하지만 실손보험에 가입한 암과 중증 희귀난치성 질환 환자들은 이 문제의 본질을 누구보다 정확히 간파한 사람 중 하나다. 이들은 최근 긴급 국회토론회에서 정부와 국회에 분노를 토해냈다. 한 루게릭병 환자는 “실손보험이 국민을 위해 청구 간소화를 한다는 것은 코미디”라고 꼬집었다. 가입할 때는 뭐든지 다 해줄 친구, 가족, 동반자라던 보험사들이 가장 절박한 순간엔 차디찬 본모습을 드러내는 두 얼굴을 이들은 수없이 보고 직접 겪었다. 보험사들은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려 온갖 방법을 동원해왔다. 보험약관을 가입자 몰래 바꾸는 건 일도 아니다. 예컨대 암의 ‘직접치료’만 보장한다고 몰래 끼워 넣은 문구를 근거로 요양병원 치료 보장을 거절하는 수법은 잘 알려져 있다. 보험사들은 자신들이 설립한 ‘보험개발원’ 계산을 근거로 암 입원에 6주가 필요하다고 산정해 보험료를 걷어간다. 막상 암환자가 받은 대부분의 치료는 직접치료가 아니라며 보험금을 1주치도 주지 않는다.

환자를 본 적도 없는 보험사 ‘자문의’가 보험사 돈을 받고 소견서를 써 주치의 진단과 치료를 부정하는 것도 대표적 수법이다. 그 자문의는 실제 존재하는지 신원조차 알 길이 없다. 치료에 전념해도 부족할 환자들이 거리로 나와 보험사와 싸워야 하는 이유다. 약속대로 보험금을 달라며 몇 년 전 삼성생명을 점거했던 암환자들은 피를 토하며 응급실에 실려가야 했다. ‘암보다 보험이 무섭다’는 얘기가 나오는 까닭이다. 이런 갑질과 횡포가 주특기인 보험사들이 가입자한테 보험금을 더 주겠다는 명분으로 ‘청구 간소화’를 밀어붙이는데도, 국회의원들과 주류 언론 어느 하나도 ‘왜 그럴까’라는 상식적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가입자 편의를 높여야 한다고 앵무새처럼 떠들 뿐이다.

의료기관 환자 정보 보험사 활용 우려 보험사들의 목적은 간단하다. 보험사는 의료기관으로부터 직접 환자 정보를 전자형태로 가져가길 바란다. 종이기록과 달리 데이터베이스화한 전자 정보는 체계적으로 축적·갱신해 활용하기가 쉽다. 게다가 법이 통과되면 보험사로 넘어가는 정보에 더 민감한 세밀한 자료들이 포함될 수 있다. 이런 정보는 새로운 보험 가입거절이나 부담보 설정, 보험료 인상, 지급거절 등에 활용될 것이다. 소비자 편익이 늘기는커녕 줄어든다.

2005년 보건의료단체연합이 공개한 삼성생명 의료민영화 내부보고서 일부 발췌. 삼성생명의 궁극적 목표가 “정부 보험을 대체하는 포괄적 보험”임을 알 수 있는 문구가 나온다. / 보건의료단체연합 제공

2005년 보건의료단체연합이 공개한 삼성생명 의료민영화 내부보고서 일부 발췌. 삼성생명의 궁극적 목표가 “정부 보험을 대체하는 포괄적 보험”임을 알 수 있는 문구가 나온다. / 보건의료단체연합 제공

보험사들과 이들을 대변하기 바쁜 정부와 국회의원들은 “청구자료를 보험사가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완전히 눈 가리고 아웅인 주장이다. 청구기록은 보험사에 남아 활용된다. 심지어 보험신용정보통합조회시스템(ICIS)을 통해 우리나라 모든 보험사가 이를 공유한다. 보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일수록 ‘소액보험금을 자주 청구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이유다. 5년도 더 넘어 고지의무가 없어진 사소한 치료나 남겨진 진단명도 다른 회사 보험에 가입할 때조차 거절 이유가 되거나 부담보 사유가 된다. 보험사들은 잘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명백히 벌어지는 일들이다.

보험업법이 개정되면 보험사들이 전자 정보를 모으는 곳은 보험개발원이 될 공산이 크다. 공신력 있는 양 보험료율을 계산하지만 실제로는 보험사 폭리를 위한 가격담합 역할을 하는 기관이다. 태생부터 보험사들이 출자해 설립한 보험사들의 연합체다. 지금도 삼성화재, 교보생명, DGB생명, 하나손보 사장이 임원으로 있고, 역대 원장들 다수는 퇴직 후 보험사 부사장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런 기관이 ‘공공적 기관’이라며 “개인정보를 잘 보호할 수 있다”는 국회의원들과 윤석열 정부의 주장은 이들이 누구를 대변하려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간혹 신용정보원도 언급되는데, 신용정보원은 바로 ICIS를 운용하는 기관이다. 모두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다.

다음 스텝은 ‘미국식 의료민영화’ 더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 보험사들이 14년간이나 이를 추진해온 이유는 뭘까. 이들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청구 전산화는 보험사-의료기관 연계의 시작이다. 의료기관이 청구자료를 직접 전송하게 한 이후 다음 스텝은 ‘의료기관-보험사 직불제도’다. 보험사들은 연이어 달콤한 제안을 꺼내들 것이다. “이미 의료기관이 청구자료를 직접 보내는데, 아예 청구도 의료기관이 직접 하면 낫지 않은가?” 언론과 정부 그리고 일부 ‘소비자단체’는 지금처럼 ‘편의’를 높이자고 여론몰이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미국식 의료민영화로의 유혹이다. 2005년 보건의료단체연합이 공개한 삼성생명 의료민영화 내부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생명의 궁극적 목표는 ‘정부 보험을 대체하는 포괄적 보험’이다. 삼성은 이를 달성하기 위한 단계별 플랜도 제시했다. 첫 번째 단계는 실손보험 도입이다. 이는 2007년 달성됐다. 보험급여 부분은 공보험이, 비급여는 민간보험이 맡게 됐다. 두 번째 단계는 경증질환부터 서서히 보험급여도 민영보험이 공보험과 경쟁하는 모델이다. 이는 윤석열 정부의 ‘건강관리서비스’ 시범사업과 관련 있다. 마지막 단계는 모든 진료에 대해 공보험과 사보험 중 선택을 소비자에 맡기는 방식이다. 삼성생명은 이를 위해서는 민영보험도 공보험처럼 의료기관과 직접 계약을 맺는 게 필수라고 강조한다. “의료비 지급방식을 개선”하라면서 의료기관이 환자를 거치지 않고 직접 청구하고 보험금을 받는 모델을 제시한다.

삼성이 꿈꾸는 미국모델에서 보험사와 의료기관은 당연히 연계돼 있다. 병원들은 보험사와 계약을 맺어 환자들을 진료하고, 비용을 민간보험사에 청구한다. 돈을 주는 보험사가 갑, 병원이 을이다. 환자들은 보험사가 계약한 병원에서 보험사가 허용한 치료만 받을 수 있다. 나아가 미국의 보험사는 아예 의료기관을 개설하거나 인수·합병해 소유한다. 이런 보험사-병원 복합체가 미국식 민영화를 이끈 핵심주체다. 삼성화재가 “나중에는 자신들이 지정하는 병원에서만 환자를 받게 될 것”이라며 의료기관들과 MOU를 맺었던 사실도 이미 10년 전 보도된 바 있다. 이들이 ‘청구 간소화’에 혈안인 진짜 이유다.

배진교 정의당 원내대표(오른쪽 두 번째)가 2021년 6월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방안으로 제기된 보험입법 개정안 문제점과 대안’ 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국회사진기자단

배진교 정의당 원내대표(오른쪽 두 번째)가 2021년 6월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방안으로 제기된 보험입법 개정안 문제점과 대안’ 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국회사진기자단

삼성생명 의료민영화 보고서는 공보험 데이터 수집도 강조한다. 지금 윤석열 정부가 건강보험공단과 심사평가원에 있는 환자 정보를 동시에 보험사에 넘겨주려는 건 이런 맥락 속에서 봐야 한다. 최초로 대통령이 직접 나서 국민건강보험 보장률을 낮추겠다고 발표한 게 별개의 사건이 아니다. 서민 삶에 대한 노골적 공격이기도 하지만, 건강보험을 대체하려는 민간보험사의 손을 들어주는 정책이기도 하다. 공보험의 보장성이 낮아질수록 의무가입에 대한 불만은 커지고 민간보험에 갈수록 더 의지할 수밖에 없어서다. 설마 건강보험제도가 무너지겠느냐는 생각은 갈수록 퇴행적 정책을 내놓는 이 정부하에서 매우 안일한 것일 수 있다.

실손보험은 애초 탄생부터 잘못됐다. 지금도 결코 서민들의 의료비 부담을 해소해주지 못한다. 2017년 민간보험에 가입한 사람은 전 국민의 80%에 달한다. 가입자는 1인당 월평균 13만2000원을 내지만 정액보험은 발생한 전체 의료비의 단 6% 정도를, 실손보험은 9%만을 보장한다. 반면 국민건강보험은 훨씬 적은 보험료로 국민 의료비의 약 60%를 보장해준다. 보험사는 공보험 부실로 불안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해 천문학적 보험료를 걷어가지만 실제로는 이중 약 8.3%만을 돌려준다. 보험산업은 ‘손해율’이 높다고 하지만 지난해 수조원의 순이익을 거두며 성과급 잔치를 벌였다. 정부는 이런 민간보험을 무규제로 방치해 피해자를 양산하고 마음껏 돈벌이하도록 허용해왔다. 심지어 로또나 카지노도 최저 지급률 기준이 정해져 있는데 실손보험은 얼마를 걷어 얼마를 지급하는지 정부가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실손보험의 존재는 이미 한국 의료를 붕괴시키고 국민건강보험을 위협하는 주된 요소다. 실손보험은 비급여를 팽창시켜 한국의 건강보험 보장성을 OECD 최저로 만든다. ‘응급실 뺑뺑이’로 상징되는 필수의료 붕괴도 실손보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들은 온갖 상업적 비보험 시장을 창출해 생명을 살려야 할 의사들을 돈벌이 개원 시장으로 유인해낸다. 정상적인 정부라면 무얼 해야 하는가. 건강보험 보장성을 강화하고 비급여를 통제해 실손보험이 없어도 의료비를 걱정할 필요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반면 정부는 완전히 역행한다. ‘청구 간소화’라는 허상을 세워 보험사들을 위한 민영화 추진에 나서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 위험한 본질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제 그들의 계획이 9부 능선을 넘었다. 한국 의료와 건강보험이 진짜 위기인 이유다.

<전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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