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도안의 부활···튀르키예 앞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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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오른쪽) 튀르키예 대통령이 지난 6월 3일(현지시간) 수도 앙카라 대통령궁에서 열린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UPI연합뉴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오른쪽) 튀르키예 대통령이 지난 6월 3일(현지시간) 수도 앙카라 대통령궁에서 열린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UPI연합뉴스

‘세기의 대결’로 관심을 모았던 튀르키예 대통령선거의 승자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 5월 28일(현지시간) 튀르키예 대선 결선투표에서 52.14%의 지지를 얻어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공화인민당(CHP) 대표(47.86%)를 제압했다. 이로써 그는 2033년까지 장기 집권에 도전할 수 있는 문을 열었다. 2003년 총리 시절을 포함하면 최대 30년간 권좌를 유지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외신은 그가 1954년생임을 고려할 때 사실상 종신집권에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이번 대선은 ‘21세기 술탄’으로 불리는 에르도안 대통령 정치 인생의 최대 위기로 꼽혔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경제 상황이 최악이었고, 지난 2월 규모 7.8 대지진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부실한 행정력으로 비난을 받았다. 여기에 장기집권에 대한 염증까지 더해지며 각종 여론조사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에르도안 대통령은 예상 밖 선전을 넘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압도했다.

튀르키예는 ‘스트롱맨’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국가의 운명을 다시 맡겼지만, 이를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시선은 불안하기만 하다. 내부적으론 권위주의 색채 강화로 쿠르드족과 성소수자 등의 인권 탄압이 예상된다. 전 세계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불투명하다. 우크라이나 사태도 최대 변곡점을 맞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저력의 에르도안…민족주의 자극 전략 통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5월 16일 에르도안 대통령이 49.50%의 득표율로 승리한 1차 투표 결과에 대해 “민족주의 정서가 확인됐다”고 평가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선거 기간 내내 쿠르드족과 야권의 관계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클르츠다로을루 대표가 집권한다면 튀르키예 전역이 테러로 몸살을 앓을 것이라고 선전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에르도안 대통령은 민족주의 성향의 지지 기반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며 쿠르드족 이슈가 민심을 관통했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에르도안 대통령은 결선투표에서 승리를 확정한 뒤 연설에서도 “야권은 테러리스트편을 들었다”며 강력한 쿠르드족 탄압 정책을 예고했다. 그는 또 시리아 내전 난민과 관련해서도 “지금까지 60만명 가까이 시리아로 돌려보냈다”며 “향후 수년간 100만명을 더 돌려보내겠다”고 강조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20년 집권 과정에서 방송과 신문, 정부 부처가 모두 친여 성향을 띠게 됐다는 점도 그에겐 큰 힘이었다. 튀르키예 국영 TRT에 따르면 4월 한 달 에르도안 대통령의 방송 노출 시간은 32시간이었던 반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는 32분에 그쳤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선거 막판 가정용 천연가스 무료 제공, 조기 연금 수령, 석유 채굴 선언 등 선심성 공약을 잇달아 발표했고, 국영 매체는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결선투표 당일 투표장 앞에서 사람들에게 현금을 살포하는 장면이 포착됐지만,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튀르키예 헌법학자 오스만 잔 교수가 “캠페인 금지 기간에 학교 앞에서 돈을 나눠준 행위는 투표자들에게 선거법을 위반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위헌 요소가 있다”고 지적하는 등 학계와 시민단체 일부가 문제를 제기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야권의 무능 탓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NYT는 “현 야권은 너무 오랫동안 집권하지 못한 세력”이라며 “클르츠다로을루 대표가 권력을 잡았을 때 과연 어떤 통치가 이뤄질지에 대한 확신을 제공하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또 6개 야당이 연합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단일후보로 내세운 상황에서 각 정당 대표가 유세장마다 모습을 드러내 주위를 분산시켰다는 시각도 있다.

‘절친’ 푸틴은 웃는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생환하면서 전 세계 경제 상황과 지정학적 위기는 예측할 수 없는 ‘시계 제로’ 상태에 빠졌다. 우선 에르도안 대통령이 초고물가에도 비정상적인 저금리 정책을 고집해왔다는 점에서 리라화 가치 하락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실제로 에르도안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된 지난 5월 29일 오전 리라화 가치는 1달러당 20리라 안팎에서 움직였다. 사상 최저치 수준이었다.

투자정보업체 텔리머의 경제분석가 하스나인 말릭은 미 블룸버그통신에 “에르도안의 승리는 외국 투자자들에게 위안이 되지 않는다”며 “초인플레이션과 초저금리, 순 보유 외환 부족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위기가 닥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우려에도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 2년간 중앙은행이 금리를 19%에서 8.5%로 인하해왔다”며 “인플레이션 역시 떨어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어 “물가가 금리와 함께 내려가리라는 예측은 환상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만 그는 지난 6월 3일 재무장관으로 메흐메트 심셰크 전 부총리를 임명하며 정책 전환을 시사했다. 투자은행에서 오랜 기간 근무한 심셰크 전 부총리는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경제 전문가다. AFP통신은 “경제학자인 심셰크 전 부총리는 에르도안 대통령 금리 정책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AP통신은 더 나아가 “심셰크 전 부총리를 재무장관에 임명하면서 에르도안 대통령은 ‘비정통’으로 낙인찍힌 자신의 경제 정책을 드디어 폐기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고 환영했다.

우크라이나 사태도 미궁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튀르키예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이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은 집권 기간 내내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과 갈등을 겪었다. 스웨덴의 나토 가입을 쿠르드노동자당(PKK)을 옹호하고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고, 이를 지렛대 삼아 미국 정부엔 F-16 전투기 판매를 종용하고 있다. NYT는 에르도안 대통령 당선 직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골머리를 앓게 됐다”고 평가했다.

반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튀르키예는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오히려 러시아와 경제 협력을 강화하는 자세를 취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번 승리는 튀르키예 수반으로 지금까지 보여준 사심 없는 노력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며 “에르도안 대통령의 독립적 외교 정책을 국민이 지지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반색했다. 에르도안 대통령 또한 미 CNN과의 최근 인터뷰에서 “한 국가를 배척하면 결국 패하게 된다”며 “나는 서방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권위주의 통치체제는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17년 개헌으로 부통령 및 법관 임명권, 의회 해산권, 국가비상사태 선포권까지 막강한 권한을 확보했다. 이를 통해 행정부와 사법부, 입법부를 통제했고, 정적 숙청과 언론 탄압도 단행했다. 튀르키예 건국 이념인 세속주의 색채가 옅어지고, 이슬람 원리주의 시대가 도래하리란 전망도 나온다.

<손우성 국제부 기자 applepi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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