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한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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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이 또 한 번 일을 냈습니다. 이번에는 ‘혼합현실(MR)’입니다. MR 헤드셋을 끼면 가상인지, 현실인지 헷갈리는 ‘메타버스’의 세계가 펼쳐진답니다. 눈앞의 화면을 손으로 터치하거나 말을 하면 앱이 작동해 지금 스마트폰을 통해 하는 작업이 대부분 가능할 전망입니다. 심지어 눈동자의 움직임을 감지해 명령을 수행할 정도라고 하니 공상과학(SF) 영화 속 장면이 따로 없습니다. 아직까지는 비싼 가격(3499달러·약 457만원)과 배터리 용량(최대 2시간 정도)이 걸림돌이지만 별도의 컨트롤러 없이 가상·증강현실과 접속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매력적입니다. 가격 인하설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고, 선발주자인 메타는 물론이고, 삼성전자 등도 뛰어들었다고 하니 시간의 문제일 뿐 대중화는 예고된 수순 아닐까요.

[편집실에서]끔찍한 상상

팀 쿡 애플 CEO가 최근 세계 개발자 대회에 들고나온 신제품 ‘비전 프로’를 유심히 들여다봤습니다. 애플 특유의 디자인을 반영해 기존 가상현실(VR) 헤드셋의 투박하고도 육중한 이미지를 나름 벗어던졌지만, 저걸 끼고 다닌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싶은 생각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더군요. 가뜩이나 스마트폰만으로도 대화의 단절, 은둔형 외톨이 등의 사회문제가 심각한데, 너도나도 MR 헤드셋을 장착한 채 확장현실만 추구한다면 사람 간의 소통은 또 얼마나 가로막힐 건가 걱정스럽기도 했습니다.

애플도 이를 의식한 모양입니다. 사람이 다가오면 ‘스키고글’ 같은 헤드셋 렌즈가 투명으로 바뀌어 서로의 눈을 인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네요. 그렇다 해도 맨눈으로 인사를 나누는 것과 헤드셋 너머 비치는 눈동자를 보고 나누는 대화의 밀도란 글쎄요, 어디 감히 견줄 일이겠습니까. 일론 머스크가 인간의 뇌에 컴퓨터 칩을 심는 실험까지 추진하는 마당에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일까요.

최근 서울 무계원 별채에서 열리고 있는 개관 기획전시 <윤동주와 모-던 종로의 시인들>을 다녀왔습니다. 193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 전반까지 경성에 유학했던 윤동주와 종로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정지용, 이상, 백석 등 모던 시인들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는데요. 이들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당시 경성의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뭐가 그리 바쁜지, 표정엔 웃음기 하나 없고 뭐가 그리 고달픈지, 얼굴은 모두 창백함 그 자체인 통학길 전차 안 풍경을 윤동주는 산문 ‘종시’에서 자세히 묘사합니다.

지금의 지하철도 그때처럼 함께 앉아 있어도 다들 바삐 스쳐 지나갈 뿐, 무표정한 승객들은 서로 말이 없습니다. 한 세기 전과 비교해 달라진 건, 당시는 사람들이 일상에 지친 모습으로 허공을 응시했다면 이제는 모두 스마트폰 화면에 코를 박고 있느라 여념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들이 언젠가 얼굴에 모두 MR 헤드셋을 쓰고 로봇처럼 일렬로 나란히 앉아 있는 상상을 해봅니다. 훗날의 한 시인이 있다면 그는 이 광경을 어떻게 묘사하게 될까요.

<권재현 편집장 jaynew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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