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노키즈존과 일상의 무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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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출입문에 ‘어린이 출입금지’를 뜻하는 ‘노키즈존’ 표지가 ‘외부음식 반입금지’ 표지와 나란히 붙어 있다. / 최미랑 기자

카페 출입문에 ‘어린이 출입금지’를 뜻하는 ‘노키즈존’ 표지가 ‘외부음식 반입금지’ 표지와 나란히 붙어 있다. / 최미랑 기자

이른바 ‘노키즈존’을 둘러싼 논란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노키즈존은 차별적 공간임이 확실하지만, 탄생 이유에 대한 별도의 분석은 필요하다.

노키즈존은 차별이다

2016년 제주시에서 노키즈존 식당 이용을 거부당한 어린이와 부모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한 적이 있다. 당시 인권위는 “특정 집단을 특정한 공간 또는 서비스의 이용에서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방식으로 구현되는 경우에는 그에 합당한 사유가 인정돼야만 한다”라고 밝히며, 해당 식당의 조치가 아동 차별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여기서 합당한 사유에 관해 좀더 생각해 보자.

서비스 상품을 판매하는 공간이 배타적 방식으로 운영되는 경우는 흔하다. 미성년자는 술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화관은 영상물 연령 등급에 따라 운영된다. 여성 전용 헬스장이나 외모를 기준으로 입장객을 받는 클럽도 있다. 공간마다 배제의 합당한 근거가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청소년의 유흥업소 출입금지는 충분히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클럽처럼 ‘스타일 좋은 사람들’만의 배타적 공간을 운영하는 것은 차별일까 아닐까? 농담처럼 보이는 질문이지만, 생각해 볼 가치는 있다.

확실한 건 노키즈존에는 합당한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다. 설사 어린이와 부모 대다수가 소란스럽고 무례하다고 해도, 특정 나이의 어린이 전체를 배제할 근거는 없다. 외국의 식당 주인이 무례한 한국 관광객을 몇 차례 경험한 후에 모든 한국인의 출입을 금지한다면 뭐라고 할 것인가? 특정 집단 일부의 행동을 이유로 그 집단 전체를 배제하는 것이 바로 차별이다. 노키즈존은 차별의 전형적 사례다.

안전을 위해 노키즈존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타당하지 않다. 이런 논리라면 어린이를 집 안에 가둬놓고 키우자는 주장도 가능하다. 어떤 공간이든 어린이의 안전사고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만일 특정 손님이 사고를 일으킬 위험이 더 크다면, 공간 관리자와 손님 모두 그 위험에 맞는 안전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그 손님의 출입 자체를 금지하자는 것은 완전히 엉뚱한 해법이다.

노키즈존이 영업의 자유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인권위가 밝혔듯이, 그 자유가 비합리적인 배제의 권리를 포함하지는 않는다. 내 침실은 개인적 공간이고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영업장은 그런 종류의 공간이 아니다. 모든 시민이 모든 시민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헌법의 원칙이며, 영업의 자유에 이 원칙을 위반할 권리는 포함되지 않는다.

무례함에 대한 경험

여론조사 대부분에서 노키즈존 찬성이 반대 의견을 압도한다. 노키즈존이 그러나 차별이 아니라는 체계적인 논증을 찾기는 힘들다. 논란의 핵심 쟁점은 차별인지 아닌지에 있지 않다. 찬성 의견 상당수는 ‘차별이든 아니든 간에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중요하다’라는 믿음에 기초한다. 물론 이는 타당한 믿음이 아니지만, 왜 다수가 그런 믿음을 갖게 됐는지는 생각해 봐야 한다.

앞서 언급한 인권위 결정문에는 노키즈존을 운영한 식당 주인의 주장도 담겨 있다. 식당 주위에서 놀던 어린이가 넘어지자 부모가 치료비를 요구한 적이 있고, 식탁 위에서 기저귀를 갈던 부모를 제지하자 화를 내며 기저귀를 집어 던지고 나간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 주장의 정확한 사실관계는 별도로 확인해 봐야겠지만, ‘몰지각한 부모’에 관한 자영업자의 경험담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 필요한 것이 공통의 규범이다. 예컨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출입을 제한한다’라는 일반 원칙, 그리고 서비스 판매자와 소비자, 소비자와 소비자 사이의 명확한 권리-의무 관계가 수립돼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이런 규범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자영업자는 상시적 무례함에 노출되고, 소비자와의 분쟁에 대응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 자영업자와 소비자의 불평등한 관계는 이런 상황을 악화시킨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노키즈존이라는 꼼수다. 이는 자영업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권리 주장을 할 대상 자체를 제거하는 조치다. 이런 식으로 회피할 수 있는 무례함과 분쟁은 제한적이다. 앞으로 문제가 생길 때마다 ‘OO 출입금지’를 계속 늘려갈 것인가?

지난해 5월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회원 등 시민과 어린이들이 모여 노키즈존을 반대하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찬성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한수빈 기자

지난해 5월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회원 등 시민과 어린이들이 모여 노키즈존을 반대하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찬성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한수빈 기자

어린이의 권리

방금 말한 공통의 규범을 수립하려면, 어린이의 권리에 관한 규범이 필요하다. 예컨대 어린이 특유의 소란함이 있다. 공동체는 어느 정도의 소란함까지 허용해야 하는가? 소란함에 대한 어린이의 권리는 어디까지 인정돼야 하는가?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자기 아이의 소란함이 전적으로 허용돼야 한다는 부모가 있다. 이런 사람이 많진 않겠지만, 자신의 이익을 절대화하면서 일상의 무례함을 생산해낸다. 반대쪽에는 주변에 불편을 주는 소란함은 결코 허용될 수 없다는 이들이 있다. 이는 어린이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다. 소란스럽지 않은 어린이는 어린이가 아니고, 어린이의 소란함은 필연적으로 주변의 불편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어린이에 대한 너그러운 태도를 가진 이들도 있다. 하지만 너그러움은 의무가 아니다. 다수의 국제협약이 어린이의 성장을 위한 적절하고 충분한 조건이 제공돼야 한다고 규정한다. 어린이가 소란스러운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은 너그러움이 아니라 시민의 의무다. 자기 아이가 주변에 불편을 끼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부모도 적지 않다. 안타깝게도 이런 부모는 어린이의 권리가 명확히 합의되지 않은 사회에선 끊임없는 미안함에 시달려야 한다. 방금 나열한 이들의 태도는 모두 다르지만, 권리가 아니라 이익과 불편의 논리에 갇혀 있다는 점은 같다.

자기 아이에 대한 업주의 통제를 거부하는 부모, 그리고 어린이와 한 공간 안에 있는 것 자체를 불편해하는 사람이 같은 카페에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그 아이가 소란스러운 행동을 할 때, 업주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어린이의 소란함이 권리로 인정되고, 그 소란함의 허용 정도가 관습적으로 합의돼 있다면, 업주는 적절한 대응을 위한 규칙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어린이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을 비교할 뿐 권리를 고려하지 않는 사회에서, 업주는 충돌하는 이익 사이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가장 손쉬운 대응책은 이익의 한쪽 당사자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어린이보다 어른의 이익에 공감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으니, 당연히 어린이를 배제하는 편이 낫다. 노키즈존은 권리, 의무, 규범, 정당성 따위가 사라지고 다수의 이익과 불편이 유일한 판단 척도가 된 한국사회의 상징적 장소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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