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현장에도 꽃은 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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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지난 5월 16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본청 계단에서 사연이 적힌 종이를 들고 발언하고 있다. / 박민규 선임기자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지난 5월 16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본청 계단에서 사연이 적힌 종이를 들고 발언하고 있다. / 박민규 선임기자

전세보증금반환보증 이행 신청을 위해 서울의 한 주택도시보증공사 관리센터를 찾았다. 평일 오전 번호표는 이미 50번대를 넘겨 있었다. “하루에 150명씩 와요. 여기 집주인 이름 있나 보세요.” 안내를 담당하는 A씨가 책상 위에 붙은 A4 용지를 가리켰다. 북센, 동센, 영센, TF(태스크포스)…. 서울지역 관리센터명을 줄여 표기한 단어 옆에 ‘악성 임대인’ 10여명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TF 글자 옆엔 ‘빌라왕’ 김모씨의 이름도 있었다.

집주인의 이름은 목록에 없었다. “다행이네. 여기 (집주인) 이름만 없어도 양반이에요.” A씨가 대기석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서류 준비도 완벽하게 했으니, 접수하고 후련하게 자리 떠야지.’ 기대감은 2시간을 기다려 접수창구에 앉자마자 무너졌다. 임대인에게 카카오톡으로 전한 전세 계약 해지 통보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집주인은 내가 보낸 메시지를 읽으면서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대화창의 ‘1’이 사라진 것만으로는 ‘의사표시 도달’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했다. 집 문제는 늘 그의 아내와 상의했는데, 이는 법적 효력이 없었다. 첫 해지 통보를 인정받지 못하면서 모든 게 어그러졌다. 내용증명도, 나 홀로 전자소송을 통해 받아낸 임차권등기명령도 ‘무쓸모’였다.

지침도 모르고 자만했던 나 자신에게, 연락을 피하며 답장 한 번 하지 않던 집주인에게 화가 났다. 불똥은 접수창구 직원에게도 튀었다. 서류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접수가 불가하다”고 말하는, 표정 없는 얼굴이 야속했다. 평소보다 날이 선 목소리로 인사말을 건네고 자리를 떴다. 보험만 믿었는데…. 하늘이 노래진다는 말뜻을 알게 됐다.

하늘이 무너져도 돈은 벌어야 하니까. 다음날 어김없이 기자실로 출근했다. 점심시간 ‘02’로 시작하는 낯선 번호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전날 접수를 담당한 직원이었다. 그는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전화했다”며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서류 목록을 점검하며 추가로 할 일도 차분히 설명했다. 잠깐이지만 그가 밉다고 생각한 것이 부끄럽고 민망했다.

내 일에만 몰두해 무심히 지나쳤던 장면도 떠올랐다. 직원의 오른 손목에 둘려 있던 보호대, 임대인이 사망한 임차인의 사례를 두고 대안을 찾기 위해 대화하던 심각한 얼굴들, 센터를 나서는 내게 “그래도 잘 해결될 것”이란 말을 덧붙이던 A씨까지. 하루 150명을 상대하는 직원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제도적 공백과 공사의 모호한 지침이 문제였을 뿐.

한 달 지나 다시 센터를 찾았다. 악성 임대인 목록은 20명을 넘겼다. ‘전세사기’라는 사회적 재난은 현재 진행형이다. 책임질 사람들은 빠진 그곳에 핏기도 웃음기도 사라진 얼굴의 임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갑은 아닐 ‘조력자’들이 있다. 다만 언제까지 ‘을끼리’ 선의에 기댄 채 살게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재난 현장에도 꽃은 피겠지만, 지금 필요한 건 재난을 멈추고 예방할 제대로 된 정책이다. “전세는 사인 간 계약”이란 말만 되풀이하는 국토교통부 장관보다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센터 직원들의 모습이 몇 배나 더 진중하게 다가오는 현실이 씁쓸하다.

<이유진 사회부 기자 yjle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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