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전세 피해의 고통, 정치가 응답할까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5월 8일 국회 앞에서 열린 전세사기 깡통전세 특별법 제정 촉구 1만인 서명운동 돌입 선포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나는 세입자’ 문구가 적힌 머리띠를 착용하고 있다. / 연합뉴스

5월 8일 국회 앞에서 열린 전세사기 깡통전세 특별법 제정 촉구 1만인 서명운동 돌입 선포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나는 세입자’ 문구가 적힌 머리띠를 착용하고 있다. / 연합뉴스

오래된 궁금증이 하나 있다. 왜 정치인들은 사람이 죽고 나서야 일을 하기 시작할까. 문제적 상황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구조를 바꾸려는 정치권의 움직임이 그나마 사람이 죽고 나서부터 시작되는 사례가 많다. 아동학대, 노란봉투법, 특성화고 실습, 위험의 외주화와 산업재해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의제가 안타깝게도 죽음을 기반으로 공론화됐다. 죽기 전에는 많은 사람이 죽을 듯이 괴로워도 정치권은 웬만해선 움직이지 않는다. 가끔 하나의 죽음, 대다수는 잇따른 죽음이 공론화의 계기를 만들고, 그제야 정치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공론장의 주요 의제로 머무는 기간이 짧다는 점이다. 그 기간에 성과를 내지 못하면 정치는 문제를 풀지 않고 일을 매듭짓는다. 그리고 같은 문제로 사람이 죽으면 정치권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는 경우도 많다. 전세사기 특별법은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전세사기에서 깡통주택으로 피해 커질 예정 전세사기 문제를 다루기 전에 용어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전세사기와 깡통주택(전세), 역전세 등의 용어가 최근 혼재돼 사용되고 있지만, 서로 다른 개념이다. 전세사기란 전세로 주택에 거주하는 임차인(세입자)을 대상으로 하는 형사상 범죄인 사기를 저지르는 것을 의미한다. 사기의 수법은 다양하다. 신축 주택의 가격을 부풀려 전세보증금을 많이 받는다든지, 실제로 이행하지 않을 이행각서를 써주며 깡통주택을 알선하는 등 무수한 방법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혐의가 있더라도 사기죄가 확정되려면 대법원 판결을 받아야 한다. 사기죄가 성립되기 위한 요건도 까다롭다. 모두 6가지 요건이 있다. 핵심은 기망행위(남을 속이려는 행위)가 있어야 하고, 가해자가 재산상의 이득을 취해야 한다. 최근 전세사기로 지목된 사건들은 임대인이 빌라를 수백 채 이상 보유한 상태에서 임차인들이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다. 만일 예전처럼 집값이 올랐으면 수백 채의 집을 보유한 임대인들은 보증금도 돌려주면서 막대한 이익을 누렸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하는 악질적인 행태지만, 임대인이 재산상의 이득을 얻었는지를 따지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치가 않다. 정부가 제시한 전세사기 특별법에서도 지원 대상의 요건이 ‘임대인에게 사기 의도가 있는지 여부’다. 모호한 조항이라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정부가 특별법 제정 이후 논란이 없도록 포괄적으로 지원 대상을 정할 필요가 있다.

깡통주택(전세)은 집값보다 집을 담보로 한 대출과 임차보증금의 합이 더 큰 집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집을 팔아도 집에 걸린 빚(채권)도 못 갚는 ‘깡통’이란 의미다. 최근 화제가 된 전세사기 사건들은 집을 최소 100채 이상 보유한 임대인들이 문제가 된 경우지만, 그런 임대인이 아니더라도 전셋값이 치솟았던 2021년 하반기 계약된 집들이 올 하반기부터 깡통주택으로 쏟아져 나올 가능성이 있다. 위험이 전세사기에서 깡통주택으로 확대되는 시기이고, 다가올 위기엔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 역전세난이란 전세난의 반대말이다. 전세난이 전셋값이 오르고, 공급이 줄어 전세 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을 의미하듯, 역전세난은 전셋값이 떨어지고 공급이 늘어 오히려 임차인(세입자)을 구하기가 어려운 상황을 뜻한다.

세 번째 사망자 발생 이후 한 달간 국회는? 부동산시장에서 전세사기와 깡통전세에 대한 경고음은 2021년 하반기부터 울리기 시작했다. 집값이 눈에 띄게 떨어지던 2022년 중반부터 위기가 본격화됐다. 윤석열 정부의 국토교통부는 2022년 11월 ‘전세사기 등 방지를 위한 임대차 제도개선’ 방안 등을 내놓았지만, 대부분 임대인이 세금을 체납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청구권을 임차인에게 준다는 등의 미온적인 대책들뿐이었다. 그해 12월 일명 ‘빌라왕’이라 불리는 김대성 사건이 집중적으로 보도됐다. 김대성 사건의 피해자들은 대다수가 선순위 채권자지만, 임대인이 체납한 세금 때문에 경매 자체가 진행되지 않고 있었고(낙찰금 전액이 세금으로 납부될 경우 경매가 진행되지 않음), 올해 초부턴 임차인의 76%가 후순위 채권자인 인천 미추홀구 사건이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후순위 채권자들은 경매가 진행돼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살던 집에서 쫓겨나 주거 불안의 문제까지 겪게 된다. 이렇게 꽉 막힌 문제들이 좀체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정부가 2월에 낸 대책은 대출 일부 지원과 원스톱 법률서비스 등이 전부였다. 이는 2월 28일 사망한 피해자가 “정부 대책이 굉장히 실망스럽고 더는 버티기 힘들다”는 유서를 남긴 이유다. 지난 4월 14일과 17일에도 잇따라 피해자가 사망했다. 정부는 4월 27일에야 특별법 제정을 포함한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 방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정부가 제출한 특별법과 야당이 제안한 특별법이 5월 1일부터 국회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법안심사소위가 5월 3일과 10일에도 열렸으나 특별법을 통과시키지 못했다. 마지노선이라고 여겼던 5월 16일 4차 논의에서도 여야 간 이견이 지속됐다. 5월 22일 열리는 다섯 번째 소위에서도 특별법이 통과되지 못하면 5월 중에 국회 본회의에서 특별법 통과는 어렵게 된다. 그 와중에 지난 5월 8일 네 번째 사망자가 나왔다. 이렇게 피해자의 시간이 긴박하게 흐르는 동안 국회에서의 전세사기 의제는 주된 관심사도 아니었다. 여당에선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 야당에선 김남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각자의 이유로 화제를 모았고, 언론과 정당 지도부도 가장 뜨거운 의제에 집중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지난 4월 2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방안 합동브리핑’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지난 4월 2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방안 합동브리핑’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물론 국회 국토교통위원회는 나름 논의를 하고 있었다. 핵심 쟁점은 보증금 반환채권 매입이었다. 이 쟁점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조세채권 안분과 임차인 우선매수권 보장, 낙찰대금 대출 지원 등 다른 대책들의 입법도 늦어지고 있다. 민주당과 정의당은 정부가 자산관리공사(캠코)를 통해 보증금 반환채권을 특정한 가격에 매입해 임차인에게 일부 보증금이라도 먼저 돌려주자는 방안을 제시했고, 정부와 여당은 이 방안에 반대했다. 특히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모든 사기 피해는 평등하다”며 ‘전세사기 피해자에게만 정부가 돈을 쓸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자주 표출하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문제는 보증금 반환채권 매입이란 의제가 제대로 알려지지도, 충분히 논의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정부와 여당은 이 방안을 적용하면 재정이 공정하지 않게 사용된다고 보지만, 아이디어를 처음 낸 임재만 세종대 교수(부동산학과)는 정부 재정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채권을 얼마에 매입하고, 나중에 정부가 채권을 매각할 때 피해자에게 얼마를 보장할 것이냐에 따라 임차인이 받는 금액이 달라지지만, 어떤 방식을 채택하든 채권을 산 가격보다 비싸게 팔 수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정부의 부담은 없다는 설명이다. 다시 말해 양쪽이 다른 사실을 기반으로 주장을 하는 셈이고, 그렇다면 정부가 손해를 입지 않는 선에서 대책 마련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게 과연 어려운 논의일까.

전세제도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려면 실은 정부가 손해를 입지 않는 선을 지킬 필요도 없다. 원래 정부란 정책적 목표를 가지고 재정을 사용하기 위한 기관이다. 유능하게 돈을 쓰면 전체 경제에도 도움이 된다. 정부는 부동산시장 활성화를 위해 미분양 주택들을 대거 매입하기도 하고, 채권시장의 안정화를 위해 긴급자금을 투입하기도 한다. 이렇게 사용하는 재원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전세 세입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이미 상당한 돈을 쓰고 있다. 지난해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돌려받지 못한 전세보증금은 1조1726억원으로 전년(5799억원) 대비 2배 이상이었다. 이중 구상권을 청구해 회수한 금액은 2490억원이었다. 즉 1조원 가까운 손실이 이미 발생한 셈이다. 올해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그렇다면 전세 보증보험을 운영하는 것과 보증금 반환채권을 저가에 매수한 다음에 주거권을 보장하고 나중에 적당한 가격에 되파는 정책 가운데 어떤 것이 나을까. 쉽게 단정하기 어렵지만, 후자에서 손실이 날 가능성이 더 적어 보인다. 만일 보증금 반환채권 매입에 관한 여야 간 이견이 지속된다면 다른 대책들부터 통과시키는 것도 방법이다. 이 경우 정부와 여당이 쟁점이 있는 방안에 적극적이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만, 마침 야당이 다수당으로 여당을 협상장으로 끌어낼 여러 카드를 쥐고 있다. 부족한 것은 적극성과 의지 아닐까. 누군가 더 고통받기 전에, 비극적인 일들이 더 발생하기 전에 정부와 국회, 지자체는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도모해야 한다.

전세사기가 이번으로 끝날 문제도 아니다. 정부는 서민 주거 지원을 명분으로 그동안 전세금융을 확대하고 전세 보증보험을 도입했지만, 이렇게 정부가 늘린 전세 물량은 부동산 경기 상승기엔 갭 투자 확대로 인한 집값 폭등과 경기 하강기엔 깡통주택과 전세사기 사태를 양산했다. 한마디로 전세란 한국 부동산시장의 약한 고리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만드는 제도란 의미다. 전세는 사적인 계약으로 제도적으로 폐지할 순 없지만, 정책적으로 혜택을 주는 것은 다른 문제다. 전세는 임대인에게 대출 규제에도 적용되지 않는 사금융 수단이었다. 임차인에겐 저리의 전세금융 혜택을 통한 상대적으로 저렴한 주거 수단이었다. 상당수 임차인은 돈이 있더라도 청약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전세를 이용하곤 한다.

이렇듯 전세가 월세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주거 수단이란 인식이 있기 때문에 전세에 혜택을 주는 정책을 단번에 거두기는 쉽지 않다.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연재에서 줄곧 강조했다. 전세에 대한 혜택을 점진적으로 줄이면서 서민들의 주거를 안정화하는 다른 정책들과 연계하라고 말이다. 그게 고통에 응답하는 정치이자, 구조적인 문제를 직면하고 풀어나가는 정치다.

<윤형중 LAB2050 대표>

윤형중의 정책과 딜레마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