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빼어난 솜씨로 자연을 옮긴 시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나석중 시인의 시선집 <노루귀>

집 뒤에 북한산 자락 산책로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종종 같이 올라갔는데, 좀 크니 따라나서지 않더군요. 혼자 가려니 쓸쓸하고, 능선을 오르는 길인지라 점차 발길이 뜸해졌습니다. 둘레길이 생기고서야 아내와 가끔 걷고 있습니다. 지난 주말 모처럼 둘레길에서 벗어나 능선길을 걸었습니다. 조금 오르자 능선의 큰 바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요. 오랜만에 찾았는데도 한결같은 모습이라 좋았습니다.

나석중 시인(왼쪽)과 <노루귀> 표지 / 도서출판 b

나석중 시인(왼쪽)과 <노루귀> 표지 / 도서출판 b

시집 8권에서 88편 직접 선별

커다란 바위처럼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시인이 있습니다. 2005년 시집 <숨소리>로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나석중 시인(1938~ )은 18년 동안 8권의 시집을 발간했습니다. 2~3년마다 한 권을 낸 셈이지요. 한 문학모임에서 시인을 처음 만났습니다. 20여년이 흘렀지만, 시인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67세의 늦은 나이에 등단해서인지, 더 치열하게 시인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산중에서 발원한 물이 계곡을 지나 시내로, 다시 강으로 흘러가면서 깊고 넓어지듯 시인의 시도 깊이와 넓이를 모두 얻어 늦깎이 시인들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등단이 늦었을 뿐 사실은 “인중이 거뭇”(이하 ‘만경강’)하던 시절부터 “시(詩)라는 병”을 앓아왔습니다.

시선집 <노루귀>는 8권의 시집에서 골고루 88편을 선별했습니다. 보통은 출간 순서대로 배열하는데 소재에 따라 1부 ‘꽃’, 2부 ‘가족’, 3부 ‘사랑과 세월’, 4부 ‘돌’로 배치했습니다. 직접 시를 고른 시인은 “사랑하는 자식 중에 더 사랑하는 자식을 세우는 민망한 일”이었다면서 “일부 작품은 터럭 한 올만큼 손을 보기도 했지만, 매번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시에 대한 염결성(廉潔性)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요. 시인은 수시로 자연에 들어 꽃과 돌, 물을 만납니다. 시인은 스스로 “나의 시는 태반이 작자 미상의 자연을 베”낀 것이라 할 만큼 꽃과 돌에 심취한 시 세계를 일관되게 보여줍니다.

시선집 맨 앞자리를 차지한 시는 ‘작은 꽃’입니다. 시인은 “바늘귀만 한 작은 꽃”에 대해 “포기하지 않고/ 핀 꽃”이라며 “잊지 말라고 눈에 들어박혀” 아프다고 했습니다. 꽃을 바라보는 시인의 안타까움이 묻어납니다. 노루귀도 작디작습니다. 시인은 노루귀를 “귀 하나는 저승에다 대고/ 귀 하나는 이승에다 대고”(이하 ‘노루귀’) 있는 꽃이라 했습니다. 시인의 나이 올해 85세,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양쪽에 귀 기울일 나이겠지요. 시인은 노루귀의 서식지를 “너무 아득한 산속”이나 “너무 비탈진 장소” 말고, “실낱같이라도 물소리 넘어오”고, “간간이 인기척도 들려”와 “메마른 설움도 푹 적시기 좋은 곳”이라 했습니다. 아마 그곳은 시인이 사후에 눕고 싶은 곳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작(詩作)’이란 시에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고요의 백지장에 쓰는 바람의 유서”라며, “구구절절 명편으로 죽었던 영혼”을 흔든다고 했습니다. 시에서 죽음이 묻어나는 건 당연할 것입니다. 시 ‘돌이나 되었으면’에서는 “정선 깊은 골 구절리쯤”에서 돌이 되어 “게으르게 천하태평”으로 구르고 굴러 “천 년쯤 후에 해 지는 서해에/ 종착”했으면 하는 바람을 드러냅니다. 그냥 돌이 아니라 “외로워 실성한 사람이 먹으면/ 낫는 알약 같은/ 돌멩이”였으면 좋겠다네요.

외로움 극복하며 쓴 ‘울컥’한 시

환갑 무렵 황혼이혼을 선택한 시인은 27년째 혼자 살고 있습니다. 아들 둘에 딸 하나, 장성한 자식들은 각자 일가를 이뤄 살고 있습니다. “야생의 풀꽃 경(經)”(이하 ‘풀꽃 독경’)에 빠진 시인은 외로움은 “감정의 사치에 불과”하다며, “돌이든 풀꽃이든 시(詩)든/ 거기에 마음을 앗기다 보면” 외로울 새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사랑은 “믿을 만한 허구”(이하 ‘사랑의 수의’)이고, 정은 “믿지 못할 실상”이라 합니다.

그래도 외롭지 않을까요. 새해 첫날, 일찍 눈을 뜬 시인은 “세수를 하고”(이하 ‘첫 세수를 하고’)는 전국 돌밭에서 고이 모셔온 수석을 정성스레 닦습니다. 가재도구와 살림살이도 매만지던 시인은 “불현듯 그것들도 식구들”이란 생각을 합니다. “가슴 바닥에서 치솟다가 가라앉는 슬픔”까지 감추지는 못하지요. 출근할 일도 없는데 오전 7시면 아침을 먹고, 퇴근할 일도 없는데 오후 7시면 저녁을 먹는다는 시인은 밥을 먹다가 울컥 올라오는 설움을 “소처럼 무심으로 반추해서 씹”(‘혼자 먹는 밥’)어 삼킵니다. 하여 “독 중에도 맹독은 고독”(‘독(毒)’)으로 사랑도, 물건도 방치하면 안 된다고 마음을 다독입니다.

시인은 “다독이며 안아줄”(‘저녁이 슬그머니’) 사람은 곁에 없지만, 내 “몸 파먹고 살아온 세월”(‘폐광’)을 무던히 견디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까지 감추지는 못합니다. “어언 20여 년”(이하 ‘지갑’)을 사용해 너덜너덜해진 지갑을 “딸내미 얼굴이 어른거려” 버리지 못합니다. 딸이 사준 지갑이겠지요. 한때 잘나가던 피자 가게의 문을 닫고 집도 줄여 “변두리로 밀”(이하 ‘아프지 마라’)려난 장남에게 “제발 아프지만 마라”면서 “아들이 아프면 희망도/ 아버지도 아”프다는 애절한 자식사랑을 보여줍니다.

장남의 형편이 어려워져 아버지의 생활비를 줄 수 없게 되자 시인의 노후에도 위기가 찾아옵니다. “이젠 채우기보다/ 꺼내 베풀어야 할 때”(‘지갑’)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 막막할 뿐입니다. 그때 장남이 “주택연금을 드시라”(이하 ‘주택연금’)고 전화를 합니다. 전화 한 통으로 아버지는 다 알아챕니다. 아들이 “지금 많이 고달프다는”, “아비 돌볼 여력이 없다는” 것을요. 아들의 말대로 주택연금에 가입한 시인은 “곶감처럼/ 잔고”를 빼먹으며 “야금야금 늙어”가고 있습니다.

“유숙할 곳 있는 것”(‘서녘에 잠기는 저 한 송이 붉은 꽃이’)만으로도 고맙다는 시인은 말년에 시 또한 행복이자 축복이라 합니다. “일생의 최후에 비로소 (진)면목을 드러내”(‘시작(詩作)’)고 있는 노시인은 오늘도 “필생의 시(詩)”(‘수석론(壽石論)’)를 한 편 쓰기 위해 필력을 갈고닦습니다.

◆시인의 말

▲봄의 귀를 갖고 있다
최춘희 지음·천년의시작·1만1000원

[김정수의 시톡](21)빼어난 솜씨로 자연을 옮긴 시

시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고 미래의 나 또한 없으리라 생각한다. 세상의 잣대로는 환산할 수 없는 기쁨과 가치가 시의 나라에 나를 살게 한다.

▲조금 전의 심장
홍일표 지음·민음사·1만2000원

[김정수의 시톡](21)빼어난 솜씨로 자연을 옮긴 시

언어의 바깥에 닿지 못하고, 허공으로 이어진 적막한 길 끝에 잠시 서성이다 돌아가는 저녁 어스름이겠다.

▲당신의 기억은 산호색이다
이근일 지음·시인의일요일·1만2000원

[김정수의 시톡](21)빼어난 솜씨로 자연을 옮긴 시

내게 시 쓰기란 나무 오르기와도 같은 것, 몇 번을 미끄러져도 다시 오를 수 있는 것, 오르고 올라도 그 끝자락엔 영영 닿을 수 없는 것.

▲오늘의 눈사람이 반짝였다
이영종·걷는사람·1만2000원

[김정수의 시톡](21)빼어난 솜씨로 자연을 옮긴 시

나의 시도 오늘이 좋아 혼돈과 질서 사이를 폴짝폴짝 뛰다가 잃어버릴 것은 잃어버리고 코끝이 빨간 희망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신세기 타이밍
이송우 지음·애지·1만2000원

[김정수의 시톡](21)빼어난 솜씨로 자연을 옮긴 시

열정이라는 유토피아를 좇다 보니 오늘이다. 단거리 선수에게 단거리의 치열함을 감사하고, 장거리 주자에게 장거리의 성실함을 격려하고 싶다.

<김정수 시인 sujungihu@hanmail.net>

김정수의 시톡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