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부채감으로 유지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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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정의의 첫 번째 의미는 ‘가해자의 죗값을 받아내는 것’이다. 이 과정은 가해자-피해자 도식과 복수극의 형식을 따라 실현된다(‘박이대승의 소수관점’ 16회와 24회 참고). 여기에는 ‘피해자를 위한 정의’를 주장하는 제3자가 개입하는데, 이들을 움직이는 힘은 부채감이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

부채감은 말 그대로 ‘내가 타인에게 빚지고 있다’는 감정이고, 이는 타인에게 무엇인가를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이어진다. 부채감은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일반적인 감정 중 하나지만, 문화권마다 형태가 다르다. 예컨대 한국의 부모 자식 관계는 늘 눈물을 동반할 정도로 절절한데, 이들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미안해한다. 미안함은 부채감의 일종이다. 이들의 사랑은 부채감으로 유지되고, 서로에 대한 의무도 부채감에서 나온다. 이러한 의무는 책임감이 부과하는 의무와 미묘하게 다르다. 책임은 상호 간의 약속에 기초한 제한된 의무를 부과하는 반면, 부채감에서 나오는 의무에는 제한이 없다. 한국의 가족은 서로에게 한없이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고, 이는 한없이 받아야 한다는 감정과 쌍을 이룬다. 이런 식의 사랑은 종종 불행과 고통으로 이어진다.

죽은 자와 피해자에 대한 강력한 부채감은 한국사회의 독특성 중 하나다.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회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대략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선배 투사들의 피와 땀 덕분이니 우리 역시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당시 선배들은 새내기답지 않은 진지한 발언이라고 칭찬해주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이런 논리라면,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풍요는 앞선 물리학자들의 노고 덕분이니 우리 모두 열심히 물리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앞선 세대의 희생이 현세대에게 의무를 부과한다는 믿음은 많은 사람이 공유하지만, 결코 합리적이지는 않다. 죽은 자의 의지를 어떻게 해석할지, 산 자에게 어떤 의무를 부과할지는 갖다 붙이기 나름이다.

어쨌든 이런 부채감이 한국 현대사를 이끌어온 가장 강력한 동력임은 분명하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기본적으로 ‘열사 투쟁’의 형식으로 전진해왔다. 1980년대 한국의 반독재 투사들은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갈망보다는 5·18에 대한 부채감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혁명은 삼색기를 든 마리안이 이끌고, 한국의 민주화 투쟁은 먼저 간 열사의 유언이 이끈다. 세상 어디에서나 민주주의의 발전은 시민의 저항과 희생을 요구하고, 희생은 살아 있는 자에게 부채감을 남긴다. 하지만 희생자의 한(恨)을 풀어주는 것이 사회운동의 목표가 되는 곳은 드물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은 근대 정치 일반에 적용할 수 있지만,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는 명령이 정치적 이념과 가치를 압도하는 건 분명 한국적 현상이다.

죽은 자의 정신을 좇는 정치, 부채감에 의존하는 정치는 이념과 가치에 기초한 정치와 전혀 다른 역사를 만든다. 최근 10년간의 한국 정치를 돌아보자. 노인 세대의 상당수가 ‘흉탄에 스러져간 박정희·육영수’에 대한 부채감으로 박근혜를 지지했다. 이른바 ‘검찰개혁’이라는 집단적 요구가 태어난 배경에는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대중의 부채감이 있다. 정의당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노회찬의 이름을 소환하는 것은 정의당 지지자의 부채감을 악용하기 위해서다. 조국 가족을 방어하려는 대중의 집단적 의지도 이른바 ‘지못미’에서 비롯한다.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의 기원과 원인은 다양하지만, 그 감정이 발생하는 순간, 부채 관계와 부채감도 곧바로 탄생한다. 한국사회와 정치를 움직이는 거대한 감정의 덩어리 중 가장 강력한 것들은 대부분 부채감과 결합돼 있다.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

한국에서 대규모 참사나 사회적 폭력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뉘고, 가해자에게 죗값을 받기 위한 복수극이 시작된다. 이 복수극의 주인공은 가해자와 피해자만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를 목격한 제3자들은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을 공유한다. 이는 피해자에 대한 부채감의 일종이다. 기억하겠다는 약속의 반복은 그러한 미안함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 자신과 피해자의 부채 관계를 청산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이러한 부채 관계는 가해자를 통해 매개된다. 제3자가 피해자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은 가해자의 죗값을 받아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안함을 공유하는 제3자들은 가해자를 지목하고, 그를 처벌하기 위해 거대한 집단 의지를 형성한다. 이런 식으로 정의에 대한 대중의 요구는 거의 예외 없이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로 수렴한다.

피해자와 제3자의 부채 관계는 시민과 시민 사이의 관계가 아니다. 시민적 연대는 ‘당신이 자유롭지 못하면 나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자유와 평등의 원리에 기초한다. 시민의 공동체에서 제3자는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이 아니라 시민적 의무에 따라 피해자와 연대한다. 시민의 안전과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공동체의 존재 이유이고, 이러한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은 모든 시민의 의무다.

한국사회는 공동체-시민 관계가 아니라 가해자-피해자-제3자의 연쇄적 부채 관계를 통해 피해자를 보호하려 한다. 이런 식의 보호는 그러나 전적으로 제3자의 부채감에 의존한다. 부채감은 때때로 상상을 초월한 힘을 발휘하지만, 때로는 허망한 흔적만 남기도 한다. 지금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일반적 감정은 ‘박근혜 탄핵으로 우리는 할 일을 다했다’는 정도 아닌가?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아무리 강력한 처벌을 받아도 피해자가 잃은 것을 온전히 되찾을 수는 없다. 죗값을 완전히 치르기란 불가능하다. 그에 비해 제3자의 부채감은 상대적으로 가볍다. 피해자가 어떤 상태에 있든, 가해자가 이미 강력한 처벌을 받았거나 더 이상의 처벌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면,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도 흐릿해진다. 결국 피해자가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은 가해자 처벌을 위한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기간뿐이다.

부채감에서 삶의 동력을 찾는 개인이 행복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부채감에서 변화의 동력을 찾는 사회와 정치가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기도 힘들다. 한국의 민주화와 정의를 실현해온 힘은 부채감에서 나왔지만, 이제 그 결과물이 과연 온전한 민주주의와 정의인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고통스럽고 혼란한 9년이 흘렀다. 한국은 지금 무기력한 평온함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 지금이야말로 정치와 사회의 급진적 변화를 기획해야 할 때가 아닐까.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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