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위기? 시스템반도체 생태계를 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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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3일 찾은 경기도 용인시 남사읍과 이동읍 일대엔 길목마다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이곳 약 710만㎡(215만평)의 땅은 향후 20년간 세계 최대 규모의 시스템반도체 단지로 변신하게 된다. 삼성전자는 이곳에 2042년까지 300조원을 투입해 첨단 메모리·파운드리 핵심 기지를 구축할 계획이다. 화성·기흥, 평택과 용인을 연결하는 ‘반도체 삼각편대’로 메모리반도체 분야 초격차를 확대하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분야에서도 대만의 TSMC를 넘어서겠다는 목표다.

지난 3월 15일 시스템반도체 국가산업단지로 지정된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 일대 / 연합뉴스

지난 3월 15일 시스템반도체 국가산업단지로 지정된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 일대 / 연합뉴스

아직 언제 어디에 어떤 시설들을 지을지 구체적인 밑그림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발표만으로도 사업예정지에서 가장 가까운 아파트단지인 용인한숲시티를 비롯해 인근의 동탄, 평택 등지의 아파트단지는 호가가 1억원 이상 올랐다. 남사읍에서 만난 한 공인중개사는 “발표 후 3주 동안은 거래가 활발했는데 지금은 약간 소강상태”라면서 “하락장이 멈추고 급매물은 다 사라졌다”고 말했다.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계획이 발표된 지 나흘 뒤인 3월 19일 용인시는 남사읍과 이동읍 전역을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했다. 난개발과 부동산 투기를 막아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가 계획대로 조성되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이로 인해 최소 3년간 해당 지역 내 토지매매와 개발행위가 제한되면서 일부 주민은 반발하고 있다. 또 다른 한 공인중개사는 “아파트 거래를 하는 곳은 몰라도 우리처럼 농지를 많이 했던 곳은 거래가 막혀 사무실 문을 닫아야 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도로변에는 강제수용을 반대한다는 현수막도 여럿 보였다. 지역 여론과 비슷하게 용인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를 바라보는 관련 업계의 시선도 기대와 우려가 공존한다.

시스템반도체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반도체는 ‘메모리반도체’와 ‘시스템반도체’(비메모리반도체)로 크게 구분한다. 정보를 저장하는 용도로 쓰는 메모리반도체와 달리, 시스템반도체는 연산과 제어 등 정보를 처리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한국은 메모리 시장에서는 59%의 시장점유율(D램 71%·낸드 47%)로 압도적인 1위를 점하고 있다. 하지만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는 3% 수준에 머물고 있다. 9년 연속 수출 1위 산업, 메모리 1위라는 외형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위기론이 끊이지 않는 건 이런 불균형한 구조 때문이다.

정부가 지난 3월 16일 발표한 ‘시스템반도체 생태계 강화 이행전략’(이행전략) 보도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반도체 시장규모는 5957억달러(약 785조원)인데, 메모리반도체가 1440억달러(24%), 시스템반도체가 3605억달러(61%)를 차지했다. 메모리·시스템반도체의 덩치 차이는 앞으로 더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인공지능과 자율주행 등 4차 산업혁명의 핵심으로 꼽히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시스템반도체 수요가 급격히 늘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수출은 2021년 기준 우리 총수출의 19.9%를 차지했다. 주문을 받아 생산하는 시스템반도체와 달리 선 생산·후 판매 구조인 메모리반도체는 경기를 많이 탄다. 실제 수요감소와 재고누적으로 메모리반도체 가격이 크게 하락하면서 지난 1월 우리 반도체 수출은 1년 전보다 45% 감소했다. 14년 만의 최대 낙폭이다. 무역수지가 13개월째 적자를 보이는 것도 반도체 수출 감소, 특히 대중국 수출 감소가 크게 작용했다.

시장규모가 크고, 성장 속도가 빠른 시스템반도체에서 한국의 경쟁력을 높이지 않으면, 반도체 강국은 과거의 영광으로 남게 된다. 정부가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삼성전자가 300조원 이상을 투자하기로 한 것은 이런 위기 국면을 과감한 투자로 돌파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시스템반도체 업계와 전문가들도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이 도움이 되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다품종 소량 생산이 특징인 시스템반도체의 특성과 중소·중견기업의 비중이 높은 상황을 고려할 때 맞춤형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시스템반도체의 핵심은 칩을 설계하는 팹리스와 설계한 칩을 위탁생산하는 파운드리라고 할 수 있다. 애플, 퀄컴, 엔비디아, AMD가 전자에 속한다면 대만의 TSMC나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는 후자에 속한다. 그것만으로 완성되는 건 아니다. 팹리스가 설계한 칩 안에는 다양한 기능(CPU, 메모리, 디지털·아날로그 신호 처리, 입출력 회로 등)을 제공하는 IP(설계자산)가 퍼즐 조각처럼 들어간다. 팹리스는 칩 설계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자신들이 개발하는 핵심 기능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주변 기능에 성능이 검증된 IP를 사용한다. 보통 반도체 칩 안에 이런 IP들이 70개에서 100개 이상 들어간다. 대표적인 IP 회사가 영국의 ARM이다.

반도체 위기? 시스템반도체 생태계를 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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팹리스 앞단에 IP 회사가 있다면 팹리스와 파운드리 사이에는 디자인하우스가 있다. 반도체 설계 도면을 각 파운드리 공정에 맞게 제조용 도면으로 최적화하는 작업을 하는 곳이다. 삼성전자 디자인하우스 파트너인 코아시아의 설병찬 전무는 P&R 설계로 불리는 디자인하우스의 설계를 “아이디어 차원으로 있는 반도체에 물리적인 요소들, 예를 들어 전압과 온도 변화에 따른 반도체 동작 특성을 적용해 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데이터를 제공하는 기술”이라고 소개했다.

파운드리가 웨이퍼 위에 회로를 구성하고 반도체 칩을 생산하면, OSAT(외주 반도체 조립·테스트) 업체들은 이 반도체를 외부와 전기적으로 연결하고, 열이나 습도 등 외부 환경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후처리 공정을 한다. 칩이 잘 작동하는지 테스트도 한다. IP-팹리스-디자인하우스-파운드리-후공정으로 이어지는 시스템반도체의 밸류체인은 마치 바느질에서 서로의 공을 다투는 ‘규중칠우’와 같이 없어선 안 될 생태계 일부를 이룬다.

양산까지 이어지는 국책과제 필요

노예철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인력양성실장(수도권연구센터장)은 “메모리반도체가 대량으로 찍어내는 교과서와 비슷하다면, 통신·인공지능·가전·우주항공 등 각 산업 분야 시스템에 들어가는 시스템반도체는 성공률은 굉장히 낮지만, 성공하면 대박을 치는 개인 작가가 내는 책이라고 보면 된다”라고 설명했다. 지금은 한국이 고전하고 있지만 한때는 한국도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휴대전화 보급이 확대되면서 2000년대 초반 엠텍비전이나 코아로직 같은 회사들이 휴대전화 카메라 모듈로 급성장을 했다.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모든 기능이 모바일 AP(Application Processor)라는 칩 안에 통합되자 외부의 독립 칩을 만드는 업체들이 살아남기 어려워졌다. IP 업체인 오픈엣지테크놀로지의 이성현 대표는 “모바일로의 트렌드 전환을 놓쳤다는 점이 아쉽지만, 모바일 AP 자체가 워낙 자본집약적이라 국내 업체가 그런 트렌드를 타기는 쉽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 회사는 시스템반도체가 외부에서 데이터를 받아 처리하는 속도를 높이는 기술과 관련된 IP를 선행 개발해 팹리스, 디자인하우스 등에 제공하고, 라이선스나 로열티를 받는다. 이 대표는 삼성전자의 모바일 AP인 ‘엑시노스’를 설계하다 IP 업체를 창업했다. “엑시노스가 팔린 개수가 어마어마한데, 거기에 들어가는 IP가 가진 잠재력을 깨달은 거죠.”

최근 인공지능 반도체 등 시스템반도체에서 새로운 트렌드가 형성되고 있다. 이 대표는 지금 이 기회를 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시스템반도체 시장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그만큼 투자하고 도전해볼 가치가 있는 시장인 거죠. 국내 투자의 대부분이 팹리스 쪽에 치우친 상태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커가는 움직임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체 반도체 설계 비용 중 절반 정도가 IP 비용이라는 점에서 이 시장도 적지 않습니다. 정부 과제를 통해서 칩을 설계하는 회사들이 많은데 그 비용의 상당부분이 해외 IP 업체들로 간다는 점이 아쉽죠. 그렇게 받은 돈으로 해외 업체가 더 규모를 키우면 국내 업체가 경쟁하기 더 어려워지니까요.”

팹리스가 설계한 칩의 시제품을 제작하고, 양산용을 만들려면 파운드리를 이용해야 한다. 하지만 최근 파운드리 공정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이들을 위한 물량이 줄어든 상황이다. 삼성전자가 향후 평택과 용인에 파운드리 설비를 늘리면 여유가 생길 수 있지만 아직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성현 대표는 “칩을 설계하는 팹리스 입장에선 파운드리의 캐파(생산능력)가 부족해 제조를 못 하고 기다리는 일들이 있었다”면서 “MPW(Multi Project Wafer·파운드리 회사가 여러 팹리스의 칩 시제품을 웨이퍼 한 장에 올려 제작해주는) 프로그램을 자주 열어준다면 스타트업이 더 싼 비용으로 시제품을 만들고, 설계를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환경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시스템반도체 육성을 위해 국가적 역량을 결집해야 할 때다. 이 대표는 “시스템반도체는 철저히 분업화돼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업체가 잘한다고 되는 건 아니다”라면서 “IP 업체, 팹리스, 파운드리, 패키징 업체 등 생태계 전체의 협업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대학과 스타트업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반도체 칩을 설계해도, 이를 시제품으로 만들기까지의 과정은 아직 험난하다. 반도체 산업에서 일종의 ‘죽음의 계곡’인 셈이다. 차세대 반도체의 하나로 뇌의 구조와 기능을 모방해 연산과 저장을 한 번에 하는 ‘뉴로모픽 반도체’를 개발하는 김상범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는 지난 4월 3일 열린 한·미 나노포럼에서 “정부와 대학의 연구 지원은 주로 기초연구와 개념 실증에 집중되고 있고, 민간 기업에선 생산 능력 확장에 투자가 집중되고 있다”면서 “실험실 생산에서 시제품 생산 단계까지 가는 과정의 어려움이 연구자들로 하여금 현실의 문제 해결에 나서는 걸 막고 있다”라고 말했다.

3월 30일 공사가 진행 중인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일대 / 연합뉴스

3월 30일 공사가 진행 중인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일대 / 연합뉴스

기업이 맡는 정부 과제는 양산까지 염두엔 둔 형태여야 한다. 설 전무는 “잘 통제된 연구실 조건에서 작동하는 수준에서 그칠 게 아니라 예를 들면 인공위성에 들어가는 시스템반도체 과제가 있다면 실제 우주 현장에서 써도 될 수준까지 나아가야 한다”라면서 “실생활에서 쓸 수 있는 기술이어야 기업이 양산해 수익을 낼 수 있고, 다른 기술개발에 투자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서규 한국팹리스산업협회장(픽셀플러스 대표) 역시 정부 국책과제가 대부분 기술개발에 멈춰 있고 양산단계까지 가지 못하는 점을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연구개발 단계에서부터 가전·자동차 등 반도체 수요기업과 협업을 강화해 시장에서 요구하는 성능의 제품을 다른 경쟁자보다 빨리 만들어 판매해야 매출도 올리고, 다시 연구개발 투자를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 3월 발표한 ‘이행전략’에서 전력 반도체, 차량용 반도체, AI반도체 등 시장 확대가 예상되는 3대 유망 반도체 기술 분야에 3조2000억원 규모의 연구개발 투자를 추진하고, 연구·개발한 제품의 상용화까지 지원하는 설계·성능 검증 플랫폼 구축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수요 대기업과 팹리스가 계획 수립부터 구매 조건부로 반도체를 개발하는 대규모 수요연계 프로젝트를 건당 최대 80억원씩 지원하기로 했다. 이서규 협회장은 “변화의 움직임은 보이고 있지만 아직 와닿을 정도는 아니다”라면서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도 파운드리와 소(재)부(품)장(비) 등 제조업에 초점을 두고 있고, 1조원 이상 팹리스 업체 10곳을 키우겠다고 하는데 관련 정책은 구체성이 떨어진다”라고 지적했다.

공격적 인재 확보 나서야

노예철 실장은 산업단지 인프라 조성, 세제 지원 외에 정부가 중점을 둘 분야는 인재 육성이라고 강조했다. 국내 대학에서 반도체 설계 실무를 배울 수 있는 곳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 경기 판교에서 운영하는 ‘서울SW-SoC융합R&BD센터’(SoC센터)나 동탄에 있는 KAIST 반도체설계교육센터(IDEC), 코아시아와 같이 기업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교육부서에서 교육을 받는다.

설 전무는 “기업은 투자를 해서 빨리 돈을 벌어야 하는데 하드웨어 엔지니어링 인력이 없으니 공학 배경을 가진 신입직원을 뽑아 6개월 실습과 이론교육을 거쳐 현업에 투입하고 있다”면서 “어깨너머로 배울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보니 제대로 능력을 내려면 최소 2년은 투자해야 하는데 그런 부담을 질 만한 회사는 얼마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특히 어려운 문제는 EDA(반도체 설계 자동화 프로그램)와 같은 설계툴 사용에 큰 비용이 든다는 점이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나 KAIST 같은 경우 교육기관으로 인정받아 99% 이상 할인된 가격을 적용받지만, 기업의 경우 이를 적용받기 어렵다. 설병찬 전무는 “컴퓨터 한 대에 깔고 사용하는 데 10억원씩 내야 해서 업체들도 개발기간 동안만 빌려 쓰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반도체 시설투자 기업에 최대 25%(중소기업 기준)의 세액공제 혜택을 주지만, 기업의 인력양성에도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업계는 입을 모은다.

대학은 소프트웨어 사용법이 아니라 반도체 관련 기초학문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이성현 대표는 “기초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실무교육을 하는 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하드웨어를 한다면 컴퓨터의 구조와 같은 기초가 되는 학문을 제대로 배우는 게 두고두고 쓸 수 있는 내공이 된다”라고 말했다. 이병훈 포항공대 반도체공학과 교수는 대학은 기초학문을 강화하되, 그와 별개로 인재 확보에도 공을 들여야 한다고 봤다. 기술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한가하게 인력양성만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중국과 같은 공격적인 인력 영입이 필요하다고 했다.

“전 세계에 있는 한국인 기술자들을 다 동원해 핵폭탄을 개발하듯 밤새워 개발해도 부족한 상황이다. 중국은 현지 인력의 30배에 달하는 파격적인 연봉을 주고 해외 인재를 영입 중이다. 대만의 TSMC와 일본 정부는 쓰쿠바시에 4조원을 들여 공동연구소를 만들었다. TSMC가 칩렛 기반 이종집적 기술(여러 기능을 하는 반도체를 연결해 하나의 칩으로 만드는 기술로 초미세 공정의 한계를 돌파할 방안의 하나로 꼽힘)을 상용화하면, 그에 필요한 소부장을 일본 기업 걸 쓰는 식으로 협력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전체 기업과 학교가 힘을 합쳐도 대만·일본·미국 연합국을 이길까 말까다. 차세대 기술이 없으면 끝인데도 위기의식이 없다. 죽기 살기로 인력을 확보해야 한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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