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에너지 빠진 K반도체 패권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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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100 회원사 요구 못 따를 땐 경쟁력 저하

반도체 전력 조달방식 맞춰 산단 분산 필요성

지금처럼 ‘K’ 전성시대가 있었을까? K팝, K푸드, K뷰티, K무비 등 장르와 소재를 불문하고 한국은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이 수식을 붙이는 데는 조건이 있다. 많은 세계인이 열광해야 한다. 이를 통해 국제사회에 한국만의 자랑스러운 특색을 드러내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훈장처럼 K마크를 달 수 있다. 최근 ‘K’가 붙은 산업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다름 아닌 반도체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전경 /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전경 / 경향신문 자료사진

정부가 일명 ‘K반도체 벨트’ 계획을 추진 중이다. 전국 주요 지역에 있는 반도체 관련 산업시설의 위치를 K 모양으로 조성한다는 개념이다. 지난 3월 15일, 정부는 K벨트의 한가운데 자리한 용인에 300조원을 들여 반도체공장 5개를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정말 한국 반도체가 ‘K’ 수식에 부합하는 조건을 달성했는지, 정부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계획을 중심으로 따져보기로 한다.

재생에너지 사용 삼성 20.5%·SK 4.1% 그쳐 한국 기업의 메모리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57%로 세계 1위다. 하지만 그 위상은 RE100이란 변수로 인해 머지않아 위협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RE100(Renewable Electricity 100%)은 온실가스 배출 감축을 위해 기업 활동에 필요한 전력을 태양광과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를 이용해 생산된 전기로 사용하겠다는 자발적인 글로벌 캠페인이다. 이제 재생에너지로 생산하지 않은 반도체는 외면당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의 2021년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은 20.5%, SK하이닉스는 4.1%에 그쳤다.

RE100 회원사 일부는 자신에게 물건을 납품하는 업체에도 재생에너지 전기를 사용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대표적 회사인 애플은 부품을 공급하는 협력업체에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100% 사용을 요구했다. 애플의 주요 공급처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RE100 목표 연도는 2050년이다. 고객사의 재생에너지 전력 사용 요구에 대응하지 못하면 국내 반도체 기업의 경쟁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국내에서 전력을 가장 많이 쓰는 기업이다. 단 두 곳이 2021년 우리나라 전체 산업용 전력의 9.5%인 27TWh를 썼다. 국내 전체 전력 생산 중 태양광과 풍력 비중은 4.7%에 불과하다. 삼성전자 평택 3공장과 유사한 규모로 용인 반도체공장을 지을 경우, 연간 총 27TWh 전력 소비가 예상된다. 지금만큼의 전력 소비가 더 늘어난다는 뜻이다. 새롭게 추가될 공장의 전력 소비량은 인천시가 한 해 동안 쓰는 양보다 많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전력 소비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부 계획대로 제조공장 이외에 소재·부품·장비 생산 등 150개 유관 기업이 들어설 경우, 용인 산업단지의 전력 소비량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또 반도체 기업은 ‘전기 먹는 하마’로 불리는 미세공정을 위한 극자외선 장비(EUV·Extreme Ultraviolet) 사용을 늘려가는 추세다. EUV는 기존 장비보다 10배 넘는 전력을 소비한다고 알려져 있다.

2021년 경기도의 전기 자급률은 62%에 불과하다. 지금도 경기도에서 쓸 전력의 상당 부분을 다른 지역에 있는 발전소에서 끌어오고 있다. 경기도 지역에 계속해서 대규모 전력 소비 시설이 밀집하면서 기존의 수도권에 집중되는 전력망에 의존할 경우, 송전선로 연장이 불가피하다.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전력 수급불균형이 더욱 심화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주요 반도체 기업의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 / 경향 자료

주요 반도체 기업의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 / 경향 자료

경기도 전기 자급률 62% 불과…수급 불균형 정부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한다는 걸까.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높아지는 기후 무역 장벽이나 기업의 탄소중립 목표를 고려할 때 재생에너지를 통해 전력을 조달하도록 준비하는 것이 상식이다. 최근 보도되는 반도체 산업단지의 수도권 집중 전략은 오히려 기업의 RE100 달성을 요원하게 만드는 계획이다.

경기도 지역에 태양광·풍력발전 시설을 설치하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경기도 지역에 추가 대규모 전력을 공급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한전의 지역별 접속 가능 용량 조회 사이트에 따르면, 2022년뿐만 아니라 향후 2028년에도 경기도 용인 인근 지역은 송전 여유율이 거의 없을 것으로 예상됐다. 더군다나 윤석열 정부는 올해 초 발표한 제10차 전력수급 기본계획에서 2030년 재생에너지 목표 비율을 30.2%에서 21.6%로 낮춘 바 있다.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 공급 방식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됐다고 보기 힘든 지금 상황에서, 만약 재생에너지 전력 공급이 원활하지 않다면 결국 원전의 추가 건설이 대안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무엇보다 원전에서 생산된 전기를 사용하는 것은 RE100 원칙상 인정이 되질 않는다.

결국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가 대규모 전력을 소비하는 산업시설을 여러 지역으로 분산하고 최대한 재생에너지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마침 국회는 원거리에 있는 대규모 발전소 대신 수요지 인근에서 전력을 생산하고 소비하도록 하는 분산에너지 특별법 제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정부는 이러한 취지에 따라 이번 산업단지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

기후위기 대응 관점 로드맵 제시돼야 또한 정부는 이번과 같은 대규모 개발 계획을 수립할 때 앞으로는 기후위기 대응 관점의 대책과 로드맵을 선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어떻게 전력을 재생에너지로 조달할지, 그리고 대규모 산업단지 개발에서 어떻게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여나갈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밝혀야 한다. RE100 목표의 빠른 달성은 이제 기업 경쟁력을 위해 선택이 아닌 필수사항이 됐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하다가는 한국 반도체의 경쟁력 하락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노력도 중요하다. 재생에너지 없는 전력 다소비는 곧 온실가스 다배출로 이어진다. 정부의 근시안적인 에너지 정책에 끌려다니는 대신 정부와 한전에 재생에너지 친화적인 정책을 적극 요구해야 한다. 또 반도체공장 증설 시 재생에너지 확대에 기여할 수 있는 전력 조달 원칙을 세우고 재생에너지 전력 사용을 가시적으로 늘려야 한다.

반도체 산업의 부진으로 쌓이는 재고만큼 업계의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역사를 일군 권오현 상임고문은 저서 <초격차>에서 “생존을 원한다면 개선이 아니라 혁신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이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고자 한다면 에너지 조달방식의 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K’ 수식어를 달기 위해서도 지금 정말로 필요로 하는 건 전 세계 재생에너지 사용 요구에 부응하는 제대로 된 혁신이다.

<양연호 그린피스 기후에너지 캠페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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