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 대치’ 양곡관리법 누구 말이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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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여당 “쌀 강제매수법”…야당 “쌀값 정상화법”

윤석열 대통령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1호 민생법안’인 양곡관리법(양곡법) 개정안에 대해 법률안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했다. 후폭풍이 거세다. 정부·여당은 개정 양곡법이 시행되면 국가 재정이 부실해지고 식량안보와 농업의 미래가 암울해질 것이라고 한다. 야당은 윤 대통령이 국민과 농민의 뜻을 거슬렀다고 한다. 격한 공방 속에 농민은 보이지 않는다. 농민들은 농가 소득과 생산 안정을 위한 생산비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4월 3일 국회 본청 계단 앞에서 열린 쌀값 정상화법 공포 촉구 결의대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신정훈·이원택 의원과 농민단체 대표들이 삭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4월 3일 국회 본청 계단 앞에서 열린 쌀값 정상화법 공포 촉구 결의대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신정훈·이원택 의원과 농민단체 대표들이 삭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양곡법 개정 논의 배경은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의 영향으로 전 세계적으로 곡물가격이 치솟았다. 그 와중에 쌀값은 홀로 바닥을 찍었다. 산지 쌀값은 80㎏ 기준(9월 25일)으로 16만1572원에 그쳤다. 전년 수확기(10~12월) 21만4140원 대비 25%가량 떨어졌다. 농가 수입이 줄고 생산비가 늘면서 소득이 급감했다. 통계청의 ‘2022년산 논벼(쌀) 생산비 조사결과’를 보면 지난해 10a(1000㎡)에서 벼농사를 지었을 때 순수익은 31만7000원이었다. 전년 50만2000원과 비교해 18만5000원(-36.8%) 줄었다. 총수입이 12만3000원(-9.5%) 줄고, 생산비가 6만2000원(7.9%) 올랐다.

국내 쌀 시장의 수급 불균형은 가속화하고 있다. 쌀 재배면적은 1988년 126만㏊에서 2019년 73만ha로 40% 넘게 줄었고, 같은 기간 연간 쌀 생산량은 605만t에서 374만t으로 38% 감소했다. 재배면적과 생산량이 줄었지만, 소비량은 더 큰 폭으로 쪼그라들었다.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1992년 112.9㎏에서 지난해 평균 56.7㎏으로 절반가량 낮아졌다.

지난해 쌀값 폭락 사태는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2021년산 쌀 생산량이 작황 호조 등으로 전년과 비교해 10.7% 증가한 388만2000t에 달했다. 예년에 비해 쌀 생산량이 늘거나 늘 것으로 예상되면 정부는 시장격리(매입) 조치를 시행한다. 시장에 유통되는 초과 물량을 정부가 사들여 수급 불균형과 가격 하락을 막고 농가 소득을 보전해주기 위해서다. 매년 10월 15일까지 수급안정 대책을 수립해야 하지만, 정부는 일부지역 병충해 피해로 작황 불확실성이 있다는 이유로 연말에 가서야 20만t 매입 계획을 발표했다. 해를 넘긴 지난해 초 뒤늦게 초과 생산량 이상(3차례 걸쳐 총 37만t)으로 매입에 나섰으나, 기대만큼 가격안정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지난해 10월 ‘쌀 시장격리 의무화의 영향 분석’ 보고서에 “2021년산 단경기(7~9월) 쌀 가격은 생산량 증가 등의 영향으로 수확기 대비 20.5% 하락했다. 정부는 양곡관리법에 따라 쌀 가격안정을 위해 시장격리를 실시했으나 가격안정 효과는 제한적이었다”라고 분석했다. 야당을 중심으로 정부가 제때 쌀 매입에 나서지 않아 쌀값 폭락 사태가 벌어졌다며 정부 책임론을 제기했고, 양곡법 개정안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윤석열 대통령 거부권 행사 지난 3월 국회를 통과한 양곡법의 제16조 4항은 초과 생산량의 의무매입을 규정하고 있다. 쌀 수요량 대비 초과 생산량이 3~5%이거나 쌀값이 전년 대비 5~8% 하락할 때 정부가 초과 생산량을 전량 매입하는 내용이다. 기존엔 초과 생산량이 생산량의 3% 이상이거나, 쌀값이 전년보다 5% 이상 하락하면 매입할 수 있도록 했다. 개정안은 ‘할 수 있다’를 ‘해야 한다’로 강제하고, 정부 재량권을 늘렸다.

여당과 정부는 개정 양곡법을 ‘쌀 강제매수법’으로 규정한다. 법이 시행되면 국가 재정과 소비자의 부담이 커질 것이라고 본다. 단기적으로 쌀값이 오를 수 있겠으나, 정부 의무매입으로 초과 물량이 쌓이면 쌀값이 하락할 수밖에 없어 농가에도 좋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4월 4일 양곡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 농가 소득을 높이려는 농정 목표에도 반하고 농업인과 농촌 발전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전형적인 포퓰리즘 법안”이라고 했다. 같은날 국민의힘과 정부는 “목적과 절차에서 모두 실패한 악법”(강민국 국민의힘 수석대변인), “오히려 쌀값이 떨어져 농가의 소득은 감소할 것”(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라는 등 강도 높게 비판했다. 여당 일각에선 지난해 2월과 4월 문재인 정부 당시 기획재정부가 양곡법 개정에 일관되게 반대해 무산된 일을 거론하며 “문재인 정부 때 왜 통과시키지 않았는지”도 따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월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개회선언을 하고 있다. 이날 국무회의에서 윤 대통령은 국회를 통과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다. 지난해 5월 취임한 윤 대통령의 ‘1호 거부권’ 행사다. /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월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개회선언을 하고 있다. 이날 국무회의에서 윤 대통령은 국회를 통과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다. 지난해 5월 취임한 윤 대통령의 ‘1호 거부권’ 행사다. / 대통령실 제공

양곡법 개정에 부정적인 주장의 주요 논거는 지난해 10월 국책연구기관인 한국농촌경제연구원(농경연)이 내놓은 ‘쌀 시장격리 의무화의 영향 분석’ 보고서에 기반한다. 보고서는 양곡법이 시행돼 쌀 시장격리 조치가 의무화될 경우 올해(2023년)부터 2030년까지 연평균 1조443억원의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했다. 쌀 의무매입 영향으로 재배면적 감소폭이 둔화되면서 쌀 초과 생산량이 연평균 46만8000t으로 확대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보고서는 구체적으로 2026년부터 증가폭을 키워 2030년에 이르러서는 격리 규모가 최대 64만1000t까지 늘어나고 소요비용은 1조4000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봤다.

보고서는 개정안이 시행되더라도 산지 쌀값은 2030년에 80㎏ 기준 17만2709원으로, 지금의 18만7000만원보다 낮은 수준이 될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양곡법 개정안이 시행되지 않는다면 산지 쌀값은 (시행하는 것보다) 더 떨어질 것으로 예측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이 보고서를 토대로 진행한 지난 3월 29일 대국민 담화에서 “개정안이 시행되면 현재 23만t 수준의 초과 공급량이 2030년에는 63만t을 넘어서고 쌀값은 지금보다 더 떨어져 17만원 초반대에 머무를 것”이라고 했다.

“농촌 현실 직시해야” 더불어민주당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쌀값 정상화법’으로 규정한다. 쌀 과잉 생산을 구조적으로 막기 위한 (문재인 정부 때 시행된) ‘논 타작물 재배지원사업’(쌀 생산조정제)의 재개를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동시에 쌀값 폭락 시 농가 소득을 보장하기 위해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한 민생법안이라는 의미다. 쌀 생산조정제는 논에 벼 대신 밀이나 콩, 옥수수 등 다른 작물을 생산하게 해 쌀 과잉 생산을 줄이고, 주요 곡물의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과거 도입된 제도다. 민주당에 따르면 과거 쌀 생산조정제를 시행했던 이명박 정부 시기(2011~2013년)와 문재인 정부 시기(2018~2020년)에 쌀 재배면적이 각각 연 2.4%, 연 2.1%씩 감소했다. 또 재배면적을 조정하는 데 드는 예산도 650억원에 그친 반면 나머지(2014~2017년과 2021년) 5년간은 사후적으로 과잉생산된 쌀을 매입하면서 6500억원 안팎의 예산이 들어갔다. 국내 식량 자급률은 2011년 45.3%에서 2020년 45.8%로, 9년 동안 0.5% 포인트 상승하는 데 그쳤다. 2020년 기준 자급률은 밀 0.8%, 옥수수 3.6%, 콩 30.4%, 보리 38.2%에 불과하다. 쌀 자급률은 2005년 102%에서 2021년 84.6%로 떨어진 상태다.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와 조수진 최고위원(왼쪽)이 지난 3월 27일 최고위원회의를 마친 뒤 대화하고 있다. 국민의힘 민생특별위원회 ‘민생 119’ 위원장인 조수진 최고위원은 4월 5일 언론에 출연해 ‘밥 한 공기 다 비우기’ 캠페인을 제안했다가 거센 비판을 받았다. / 연합뉴스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와 조수진 최고위원(왼쪽)이 지난 3월 27일 최고위원회의를 마친 뒤 대화하고 있다. 국민의힘 민생특별위원회 ‘민생 119’ 위원장인 조수진 최고위원은 4월 5일 언론에 출연해 ‘밥 한 공기 다 비우기’ 캠페인을 제안했다가 거센 비판을 받았다. / 연합뉴스

민주당의 기본 구상은 ‘일시적 과잉은 매입 의무화로 대응하고 구조적 과잉은 쌀 생산조정제로 대응’하는 것이다. 개정안에는 또 의무매입 요건에 해당하더라도 벼 재배면적이 증가할 경우에는 정부의 시장격리 의무를 면제하는 내용을 추가했다. 농가의 소득 안정화 등을 위해 정부 수매 때 역공매(정부의 예정가격 아래로 써낸 물량에 대해 낮은 가격을 제시한 순으로 매입하는 것) 최저가 입찰 방식을 시장가로 바꾸는 방안을 포함시켰다. 민주당은 개정안에 따르면 이번 쌀값 폭락 사태로 2021년산 쌀 37만t 격리에 약 7900억원이 소요돼 비용 부담이 큰 것은 사실이나, 식량안보 강화는 유사시를 대비한 사회적 보험 성격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당은 우선 양곡법을 개정한 후 농가 경영위험을 완화하는 농안법(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을 개정하고, 중장기적으로 품목별 또는 농가별 적정 소득을 목표로 하는 제도 도입을 검토할 계획이다. 앞서 지난해 11월엔 (농가의 생산비 보장을 위한) 최저가격보장제도 도입을 골자로 한 농안법 개정안을 중점처리 법안으로 선정한 바 있다.

농민단체 “생산비 보장해야” 농민단체는 쌀이 남아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한다. 이근혁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은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주요 근거가 쌀이 남아돌기 때문이라는 설명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 쌀 자급률은 84.6%에 불과하다.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으로 의무 수입하는 쌀이 매년 40만9000t에 달한다. 막대한 양을 수입하면서 ‘쌀이 넘쳐나기 때문에 국가 재정이 나빠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 호도”라고 했다.

농촌 현실을 제대로 직시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정은정 농촌사회학자는 “의무매입 때문에 농가에서 쌀농사를 더 지을 것이란 정부의 주장은 굉장히 단순한 논리다. 현재 공동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농촌의 평균 연령은 70세(2021년 기준 농가 경영주 평균 연령 67.2세)에 육박한다. 쌀농사는 그나마 기계화 작업이 가능해 고령자도 비교적 수월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정부 주도로 타작물로 전환을 유도한다고 해서 의도대로 쌀농사를 버리고 타작물로 옮겨가기가 쉽지 않다. 국가 재정을 걱정하는 정부가 반도체 등 다른 산업은 어떻게 해서든 부양하려고 투자를 늘리면서 농업에 대한 투자는 늘릴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농경연 보고서의 신뢰도를 문제 삼는 의견도 있다. 윤 대통령이 양곡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며 국회에 제출한 재의요구서에 농경연 보고서 내용이 주요 근거로 쓰였으나, 정작 해당 보고서는 양곡법 개정안을 대상으로 분석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재의요구서에는 지난해 9월 15일 국회 농해수위 농림법안소위에서 의결된 양곡법 개정안에 대한 농경연 분석 보고서(10월) 내용과 2개월여 후인 지난해 12월 농경연이 기존 보고서를 업데이트해 국회에 제출한 ‘양곡관리법 개정안 효과 분석’ 보고서 내용이 반영됐다. 민주당은 애초 쌀 초과 생산량 3% 이상, 전년 대비 5% 이상 쌀값 하락 시 의무 매입안을 골자로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여당과 정부 반발 속에 김진표 국회의장이 2차례 중재안을 제시하자 결국 이를 반영한 수정안을 내놓았다. 지난 3월 국회를 통과한 개정안은 각각 3~5%, 5~8%로 의무매입 범위 등에서 내용이 바뀌었다.

더불어민주당의 쌀값 정상화법 공포 촉구 결의대회가 열린 지난 4월 3일 국회 본청 계단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박민규 선임기자

더불어민주당의 쌀값 정상화법 공포 촉구 결의대회가 열린 지난 4월 3일 국회 본청 계단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박민규 선임기자

주철현 민주당 의원은 지난 4월 5일 국회에서 열린 ‘쌀값 정상화법 공포 촉구 결의대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개정안은 농경연이 분석한 농해수위 소위 의결안이 아니라 올해 2월 27일에 김성환 민주당 정책위의장이 발의하고, 30인의 의원이 찬성해 제안된 수정안을 국회에서 의결해 정부에 이송한 안”이라며 “연구원은 이에 대해 어떠한 분석도 실시한 바가 없다”라고 했다. 국회를 통과한 개정안을 토대로 제대로 분석한다면 농경연이 분석한 것보다 초과 생산량 전망치가 큰 폭으로 감소하고, 이에 따른 쌀값 하락 예상치도 줄어들 것이란 뜻이다. 민주당이 이에 대해 사과와 시정을 요구했음에도 한덕수 총리와 정황근 농식품부 장관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허위사실을 거부권 행사의 주요 근거로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결국 재의요구서에도 담겨 국회에 다시 제출됐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관계자는 “쌀 재배면적이 밀, 콩 등 타작물 재배로 전환되면 쌀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쌀값이 안정화될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재의요구서에는 ‘2030년에 쌀 60여만t이 과잉 생산되고, 쌀값이 하락해 연간 최대 1조4000억원의 예산이 소요된다’는 보고서 분석이 주요 근거로 담겼다. 단순히 엉뚱한 자료를 잘못 인용한 수준을 넘어 (최종 수정안을) 농촌경제연구원이 분석(전망)한 것이라고까지 명시돼 있었다”라고 말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도 지난 3월 31일 성명에서 “이 연구는 2023년부터 2030년까지 생산량과 재배면적 감소율을 지나치게 과소하게 추정해 초과 공급량을 과장하고 있다”면서 “문제가 있는 추정결과를 근거로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거부하는 것은 정치적 이익을 위한 것으로 국민이나 농민을 설득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보고서를 집필한 김종인 농경연 연구위원은 “경제학적 관점에서 가정을 전제로 분석을 한 결과이다 보니 각자의 동의 여부는 판단의 영역에 해당한다. 다만 일각에서 주장하는 대로 보고서에서 논 타작물 전환 면적을 의도적으로 축소해서 개정안의 효과를 축소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억울한 측면이 있다. 보고서 분석결과에 대해서는 여야 가리지 않고 의원실을 찾아가 설명을 드리고, 이해를 구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농가 소득과 경영 안정을 위해서는 생산비를 반영한 양곡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근혁 위원장은 “국제 원자재 가격이 요동칠 때마다 비룟값과 기름값이 2배 넘게 뛰기도 한다. 농가 입장에서는 쌀 가격에 생산비가 반영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돼야 한다”라고 밝혔다.

<안광호 기자 ahn7874@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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