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신냉전 시대 산업정책의 방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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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에 세계 최대 규모의 시스템반도체 산업단지가 구축된다. 삼성이 이곳에 2042년까지 20년간 총 300조원을 투자하겠다는 내용이다. 우주, 미래자동차, 수소 등의 첨단산업을 키우기 위해서는 별도로 지방 14곳에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한다. 정부는 이들 산업단지에 용지조성, 기반시설 구축, 세액공제 등을 제공하겠다고 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해 11월 14일(현지시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만나고 있다. / 발리 로이터|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해 11월 14일(현지시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만나고 있다. / 발리 로이터|연합뉴스

재정을 포함한 국가의 권능을 국가첨단산업에 메가 규모로 투입하는 적극적 산업정책을 추구할 때는 급하더라도 정책의 올바른 설계를 위해 시간을 두고 짚어봐야 하는 사항이 있다. 500억원 단위의 재정을 투입하는 지방의 공공사업도 비용편익분석을 하지 않는가. 미래세계의 산업구조를 현실성 있게 예측해야 하고, 부가가치와 고용이 어디에서 창출될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 기업 활동과 국가들의 산업정책이 경쟁하게 되는 틀을 구성하는 국가 간의 미래 관계도 그려봐야 한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우리는

미국은 한국기업이 반도체 투자를 하고 1억5000만달러 이상의 보조금을 받는 경우 예상을 초과하는 이익 일부를 미 정부와 공유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보조금을 받는 경우 미국 정부기관에 반도체 생산시설을 열어주어야 한다. 회계자료도 제공해야 한다. 중국에서의 생산은 10년간 첨단의 경우 5%, 범용반도체의 경우 10% 이상의 확장이 금지된다.

대만이나 한국보다 제조단가가 높으므로 이를 감안해줘야 기업들이 미국에 투자할 것이기에 미국은 보조금을 제공한다. 반도체의 제조까지 자국 내에서 하겠다는 미국 정부 입장과 요구가 부담스럽지만, 설계나 주요장비를 미국에 의존하는 우리 기업들이 미국 정부의 투자요청을 마냥 거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 정부가 요구하는 조건을 우리가 그대로 수용할 이유는 없다.

국회는 반도체 등 국가전략기술 투자시설에 대한 세액공제를 대기업과 중견기업은 8%에서 15%로, 중소기업은 16%에서 25%로 대폭 상향하는 내용을 논의 중이다. 적절한 대응인가. 오랜 기간 수익을 남겨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이 충분한 삼성전자나 하이닉스에 한국 정부가 세액공제를 통해 수조원 혹은 그 이상의 세후소득을 더 남겨준다 한들 이들의 투자행태가 바뀌지는 않는다. 투자액의 15% 혹은 25% 세액공제는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가 없는 높은 수준이다.

한국 정부는 총력외교를 통해 미국과 협상하고 투자의 조건을 바꿔야 한다. 미국 내 투자와 관련한 요구는 보조금 제공에 대한 반대급부가 될 수도 있겠으나 중국 투자에 대해 미국 정부가 제약을 가하는 것은 적정 수준을 넘어선 요구다. 중국에 투자한 한국기업의 기술적 업그레이드는 문제 삼지 않고 생산의 확장에 대해서만 제약을 둔다지만, 한국기업의 중국 활동에 대해 간섭하겠다는 의도는 명확하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장비 수출통제가 가장 큰 관건이다.

미국과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해야 한다. 한국은 다른 나라를 침범하기에는 약한 나라지만 방어하는 입장에서 보면 약하거나 작은 나라가 아니다. 필요하면 스스로를 지정학적 지렛대로 활용해야 한다.

지난 3월 15일 대규모 시스템 반도체 국가산업단지로 지정된 경기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 일대 / 연합뉴스

지난 3월 15일 대규모 시스템 반도체 국가산업단지로 지정된 경기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 일대 / 연합뉴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와해된 냉전 시대의 대립구도가 30년이 지나 신냉전으로 재현되고 있다. 신냉전 시대는, 그러나 냉전 시대와 결이 다르다. 신냉전 시대의 양강, 즉 미국과 중국은 아직 미국이 경제력에서 우월하나 압도적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시간과 함께 우열이 바뀔 수도 있다.

첨단기술에서 압도적인 미국이 다양한 방식으로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려 한다.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되는 건 미국도 약한 구석이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오랜 무역적자를 수출국들이 보유하는 미국 국채에 의존하며 지탱해왔다. 저렴한 중국제품으로 인플레이션 없이 미국인들에게 높은 소비수준을 허용할 수 있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준 미국의 달러패권 체제에 대해 미국 이외의 나라 대부분이 차츰 등을 돌리고 있다. 중국과 일본은 미국 국채 보유를 빠르게 줄이고 있다. 중동의 산유국들과 러시아는 오일거래 대금을 달러 이외의 통화로 결제하려 한다. 유럽연합(EU) 또한 달러의 경쟁화폐인 유로화가 외환보유 및 결제통화로서 비중을 키울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다.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금 보유액을 늘리고 있고, 정부 주도 디지털화폐에 공을 들이고 있다. 모두 달러체제의 균열에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범용기술의 제품을 누구보다 낮은 가격으로 생산할 수 있는 나라다. 재생에너지 시설 분야에서 압도적인 가격우위 및 시장점유율을 보여주고 있다. 기술 잠재력과 발전 속도가 빠르고, 규모의 경제 측면에서도 큰 이점이 있다. 도시화하지 않은 농촌지역의 인구가 아직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내부의 시장확대를 통한 발전 여지도 소진되지 않았다.

신냉전 시대가 냉전 시대와 다른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양강인 미국과 중국의 경제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점이다. 냉전 시기 미국의 경제력 비중이 전 세계의 30%를 넘었으나 현재 20%대 초반에 있다. 곧 미국과 중국, 그리고 EU의 비중은 15%에서 20% 사이에 자리 잡을 것이다. 이에 비해 인도, 브라질, 인도네시아 등 인구 규모가 크고 성장률이 높은 나라들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다. 러시아와 같은 자원이 풍부한 국가들도 양강이 제어하기 어렵다.

바람직한 산업정책 방향

그러한 점에서 신냉전 시대는 냉전 시대보다 미국과 같은 나라들이 세계무역기구(WTO) 등의 국제규범에서 스스로 예외적 적용을 요구하는 행태를 연출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쪽 편에 서라는 요구를 거부할 수 있다. 규범에 충실한 국제관계에 입각해 양 진영과 모두 교류하면서 독자노선을 유지할 수 있다. 그게 우리가 지속적 경제발전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일 것이다.

산업정책 측면에서도 긴 호흡의 고려가 필요하다. 다른 나라들이 하지 않을 때, 기업들의 투자와 국가자원을 집중해 한국은 첨단반도체 제조국가로 도약했다. 이제 미·중과 EU가 반도체산업을 안보전략산업으로 인식하고 국가적 차원의 투자를 준비하는 이상 향후 우리가 첨단반도체 생산국가로 남아 있더라도 세계시장 점유율이나 창출되는 부가가치의 상대적 규모는 과거와 같을 수 없다. 실현하기 어려운 지나간 시기의 업적을 재현하기 위해 국가의 한정된 재원을 쓴다는 점에서 반도체 제조 분야에 집중하는 것은 산업정책의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김유찬 포용재정포럼 회장·전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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