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우외환의 반도체 위기 해법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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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 내리고 재고 쌓이고…미 반도체지원법 악재까지

지난 2월 무역적자는 53억달러로 집계됐다. 지난해 3월 이후 12개월 연속 무역적자다. 무역적자의 주요 원인으로는 반도체 수출 부진이 꼽힌다. 반도체는 수출액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지난해 반도체 수출액은 1292억달러(약 169조원)로 전체 수출액의 약 18%를 차지했다.

지난해 5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해 생산 시설을 둘러본 후 연설을 하고 있다. /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지난해 5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해 생산 시설을 둘러본 후 연설을 하고 있다. /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지난 2월 반도체 수출은 59억6000만달러를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2.5% 감소한 수치로 글로벌 경기 둔화로 7개월 연속 감소세를 기록 중이다. 가격은 하락하고 재고는 쌓이고 있다. 지난 3월 5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반도체 재고율은 265.7%로 26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D램 고정가는 지난해 1분기 3.41달러였지만, 올해 1월에는 1.81달러를 기록해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반도체 불황으로 무역수지 적자도 계속될 전망이다. 지난 3월 2일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반도체 경기 반등 없이 당분간 수출 회복에 제약이 불가피한 어려움이 큰 상황”이라고 말했다.

불황이 지속되고 있는 한국 반도체 업계에 또 다른 악재가 덮쳤다. 지난 2월 28일 미국 상무부가 발표한 반도체지원법 가이드라인이다. 지난해 7월 미 의회는 ‘반도체와 과학법’을 통과시켰다. ‘반도체와 과학법’은 미·중 기술패권경쟁에서 미국이 기술 경쟁력·군사력·경제력에서 중국보다 우위를 확보하려는 전략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미국 내에 반도체 생산시설을 지을 경우 보조금 390억달러를 지원하는 내용의 ‘반도체지원법’이 포함돼 있다.

이번 발표는 390억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세부 지원기준에 관한 것이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1억5000만달러 이상의 보조금을 받는 기업은 초과 수익을 미국 정부와 공유해야 하며, 지원금의 배당·자사주 매입 사용이 금지된다. 또 미국 정부에 재무계획서 등을 제출해야 하고, 미 안보기관의 요청이 있을 경우 반도체 생산시설에 대한 접근권을 제공해야 한다. 또 향후 10년간 중국 또는 관련 국가에서 반도체 설비를 증설하는 등의 신규투자도 제한된다.

동맹국 희생 강요하는 독소조항

반도체 업계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이 같은 가이드라인이 독소조항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가장 논란이 되는 조항은 ‘초과이익 공유’다. ‘초과이익 공유’ 자체보다 이를 확인하는 과정이 독소조항이 된다는 평가다. 기업이 초과이익을 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기업은 재무제표, 현금흐름 전망치 등 기업 내부 정보를 미국에 제출해야 한다. 기업의 핵심 기술이 담긴 첨단 반도체 제조 설비에 대한 접근권도 제공해야 한다. 기업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다. 미국 정부는 2021년에도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을 대상으로 반도체 재고 및 공급망 정보를 담은 설문지를 제출하라고 요구해 비판을 받은 바 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1억5000만달러 이상의 보조금을 받은 경우, 상당한 정도의 초과이익을 얻으면 지원받은 금액을 일부 반환하라는 조항 자체는 큰 무리가 없다. 보조금을 받고 돈을 많이 벌었다는 가정하에서 일부 지원금을 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재무제표, 투자계획, 현금 흐름, 수익구조 등 우리 기업들의 경영상황 등을 다 제공해야 하고 심지어 공장 접근권까지 허용해야 한다는 점이다”라며 “기업 기밀을 미국 정부에 제공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기업에 가장 불리한 조항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3월 8일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왼쪽)이 미국 반도체지원법 협의를 위해 미국 워싱턴으로 출국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3월 8일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왼쪽)이 미국 반도체지원법 협의를 위해 미국 워싱턴으로 출국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정부 또한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지난 3월 6일 이창양 산업자원부 장관은 반도체지원법 가이드라인에 대해 “통상 외국인 투자에 지급하는 보조금과 다르게 일반적이지 않은 조건이 많아 기업들에 상당한 불확실성을 안겨주고 있다”고 말했다. ‘초과이익 공유’ 조항과 관련해서는 “경영 본질적인 내용에 대한 정보제출 의무가 들어 있다”며 “핵심 공급자들의 정보를 다 내라든지 기업 경영 상황 정보를 제출하라든지 하는 경영 본질적인 내용에 대한 정보제출 의무와 기술에 대한 정보도 상당 부분 노출될 수 있는 조항들이 여럿 있어 상당히 우려스러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반도체지원법에는 미·중 기술패권경쟁에서 중국을 견제해 우위를 점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담겨 있다. 주재우 경희대 국제정치학 교수는 “미국은 반도체를 순수하게 민간용으로 보지 않는다. 민·군 병용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라며 “반도체는 중국이 군사적으로 부상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기술이다. 미국은 첨단 수준의 반도체 생산 기술부터 소재·부품·장비 등이 중국으로 유입되는 것을 컨트롤 하겠다고 나섰다. 현재 반도체 기술 이전 권한이나 통제 권한을 미 상무부와 의회가 갖고 있는데, 최근 미국에서는 이를 국방부로 이관시키자는 이야기도 나온다”고 말했다.

국가안보를 내세운 미국의 산업정책이 중국견제를 넘어 동맹국의 희생을 강요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반도체지원법의 보조금을 받는 기업은 앞으로 10년 동안 일정 수준 이상의 첨단 반도체를 현지에서 생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서 낸드플래시 총출하량의 40%를 생산하고 있으며 SK하이닉스는 중국 우시 공장에서 D램 메모리의 40~50%를 생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에 대규모 생산시설을 두고, 반도체 수출의 40%를 중국시장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 반도체 기업의 피해가 우려되는 대목이다.

지난해 10월 미국 상무부는 D램은 18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 낸드플래시는 128단 이상, 로직칩은 14㎚ 이하 제조 장비를 중국 기업에 팔려면 허가를 받도록 하는 정책을 발표한 바 있다. 삼성과 SK하이닉스는 1년 동안 유예하기로 했다. 반도체지원법의 중국 투자 제한 세부 기준은 이달(3월) 안에 마련될 예정이다. 도원빈 국제무역통상연구원 연구원은 “미국이 신경을 쓰고 있는 분야는 시스템 반도체 쪽인데 아무래도 우리는 메모리반도체 위주니까 우리 입장을 반영해 달라고 어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얼마나 반영이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라고 말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3월 5일 반도체지원법을 크리스마스트리에 비유하며 국가안보를 이유로 산업정책에 너무 많은 목표를 내세웠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반도체칩 생산시설이 해외로 이전하게 된 것은 미국에서 생산하는 데 너무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미국은 비용을 줄이고 규제 부담을 덜어주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반도체 생산비용이 중국, 한국, 대만 등보다 높아 보조금을 통해 투자를 유인했는데, 여기에 까다로운 조건을 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 국내정치용으로 무리하게 법안을 만들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잘 뜯어보면 한국 기업이나 외국 기업을 옥죄기 위한 목적으로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고 보긴 어렵다. 그보다는 반도체지원법을 반대했던 공화당 등 미국 내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미국 국내 정치용에 가깝다”라며 “미국의 정치적인 목적, 민주당의 집권, 바이든의 재선 등의 목적 등이 다분하기 때문에 당장 가치판단을 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반도체지원법의 ‘초과이익 공유’ ‘자사주 매입 금지’ 등의 조항들은 ‘횡재세’, ‘자사주 매입 세율 인상’ 등 미국 민주당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분석한다. 미국의 ‘국내 정치용’ 정책인 만큼 추가 협상의 여지도 충분히 있다는 분석이다.

보조금 안 받을 수 있나

국내 기업들은 예상치 못한 독소조항에 고민이 깊어졌다. 미 상무부는 지난 2월 28일부터 지원금 신청 의향이 있는 기업의 의향서를 받고 있다. 첨단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의 경우 이달 말부터 신청을 받는다. 일각에서는 내밀한 기업정보를 노출하느니 보조금을 받지 않는 게 차라리 이득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신청 여부와 관련해 “면밀히 검토 중”이라고 말을 아꼈다. 업계 관계자는 “여러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앞으로 협상이 진행될 텐데 말 하나하나가 미국에는 메시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러운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삼성전자는 이미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170억달러(약 22조원)를 투자해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방한 당시 경기 평택의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원금을 받지 않겠다고 하기는 쉽지 않으리라는 전망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원론적으로 보조금을 받고 안 받고는 기업의 판단 문제다. 하지 않는 게 낫다고 판단되면 보조금 신청을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할 문제가 아니다”라며 “미국은 반도체 관련 모든 제재 정책을 중국을 겨냥해 만들고 있다.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데 신청을 안 하면 미국은 해당 기업이 미국의 정책에 동조하지 않고 중국에 대한 투자를 이어간다고 해석할 수 있다. 국제 정세 때문에 기업들이 신청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3월 8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국회에서 열린 미국 반도체지원법 대응 긴급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3월 8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국회에서 열린 미국 반도체지원법 대응 긴급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보조금을 받지 않는 기업은 그만큼의 부담이 경감되는 대신, 미국이 앞으로 주도할 차세대 반도체 로드맵과 표준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기가 어려워진다. 미국 반도체법에서는 미 국립반도체기술센터(NSTC)의 미션을 차세대 반도체 로드맵 주도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이는 다시 말해 미국판 유럽 반도체연구소 아이멕(IMEC) 같은 기관을 만들고 그 기관에 차세대 반도체 기술 로드맵을 주도하는 허브로서 힘을 실어주겠다는 것을 의미한다”라며 “미 반도체법의 지원을 받는 기관은 NSTC의 협력 기관으로 멤버십이 부여되며, 각 섹터에서 표준 협의체에 참여함으로써 자사의 기술에 유리한 방향을 선점할 수 있다. 만약 이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못할 경우 분담금을 더 많이 내면서도 권한은 외려 축소된 옵서버가 될 뿐이다. 보조금을 거부할 경우, 그 업체는 잘해봐야 옵서버가 될 뿐이고, 그마저도 사실 보장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도체지원법이 미 국가안보 정책과 맞물린 이슈인 만큼 개별 기업들의 대응보다 정부의 대응이 필요하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물밑에서 얼마만큼 협상하느냐에 달려 있다. 정부가 나서서 한국과 한국 기업들의 입장을 계속 전달해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지난 3월 8일 미국을 방문한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반도체지원법과 관련 “우리 산업계의 특수한 상황도 많아서 그런 것이 충분히 반영되도록 협의하겠다”며 “과도한 정보를 요청한다거나 중국 비즈니스와 관련해 제한을 많이 걸면 워낙 변동성이 큰 산업이다 보니 시행 방식에 따라 상당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K칩스법’ 급물살

정부는 대미 협상과 함께 국내 반도체 산업 지원에도 힘을 쏟겠다는 방침이다. 이창양 장관은 지난 3월 6일 미 반도체지원법 대응과 관련해 “국내에 있는 반도체 기반 시설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한 중장기 전략이다. 이 부분에 앞으로 정책의 상당 부분을 집중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국회에 계류 중인 ‘K칩스법’의 조속한 통과도 강력하게 요청하겠다고 입장이다.

‘K칩스법’으로 불리는 조세특례제한법은 반도체를 포함해 배터리, 백신, 디스플레이 등의 연간 시설투자 세액공제율을 대기업 기준 8%에서 15%로, 중소기업은 16%에서 25%로 올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반도체지원법에 대한 대응으로 ‘K칩스법’ 통과를 서두르고 있다. 법안 통과에 반대 입장이었던 민주당의 기류는 찬성으로 옮겨가고 있다. 지난 3월 8일 민주당은 국회에서 ‘미국의 반도체지원법에 대응하는 긴급 간담회’를 열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미국이 발표한 반도체 보조금 심사 기준”이라고 말하며 반도체 산업에 과감하게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할 것임을 시사했다.

업계에서는 ‘K칩스법’의 통과를 기대하면서도 미 반도체지원법의 해법은 아니라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K칩스법’ 논의는 미국을 비롯한 유럽, 일본 등이 반도체지원법을 제정했으니 우리도 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에서 출발했다.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미 반도체지원법에는 기업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조항이 있었다”라며 “미 반도체지원법은 해외 투자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K칩스법’이 해법이 될 수 없다. 국내 기업들이 해외 투자한다고 국내 투자를 안 하겠다고 밝힌 것은 아니지 않나. 다만 기업들이 국내로 유턴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시기적으로 안 맞긴 하지만 조속히 통과되길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K칩스법’을 반대해온 정의당은 ‘K칩스법’의 효과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정의당 관계자는 “지난해 기재부가 8%로 세액공제 비율을 높였다가 대통령의 한마디에 15%로 세액공제율을 높인 법안을 다시 제출했다”라며 “8%에서 15%까지 늘리는 데 근거가 없다. 반도체 산업을 지원해야 할 필요성은 있지만,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상황에서 더 늘리자고 하니 설득력이 없다. 세액공제를 만병통치약처럼 이야기하는데 과연 그런가에 대한 고민은 느껴지지 않는다”라고 비판했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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