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통제로 민심 가리려는 에르도안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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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4일 튀르키예 강진 피해 지역 카라만마라슈에서 한 집단 매장지를 취재할 당시의 일이다. 이곳은 본래 카피참 국유림에 인접한 공원이었다. 강진 희생자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쏟아져 나오며 하루아침에 공동묘지가 됐다. 포클레인이 길게 도랑을 파면, 그 구덩이에 관도 아니고 가방에 담긴 시신이 줄줄이 놓였다. 포클레인이 다시 흙을 덮고 널빤지로 만든 묘비를 꾹 누르는 것으로 매장 절차가 끝났다.

지난 2월 26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이스탄불 보다폰파크에서 열린 FC베식타스와 FC안탈리아스포르의 축구 경기에서 관중들이 강진 희생자를 추모하는 차원에서 인형을 그라운드로 던졌다. / AP연합뉴스

지난 2월 26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이스탄불 보다폰파크에서 열린 FC베식타스와 FC안탈리아스포르의 축구 경기에서 관중들이 강진 희생자를 추모하는 차원에서 인형을 그라운드로 던졌다. / AP연합뉴스

이 참상을 취재하고 있는데, 한 경찰이 갑자기 다가와 끌어냈다. 그는 “트위터 같은 곳에서 왜곡이 될 수 있으니 우리가 제공한 사진만 쓰라. 여기는 취재를 하면 안 되는 곳”이라고 했다. 튀르키예 외교부가 발급해 준 임시 프레스카드를 보여줬지만 소용없었다. 이 경찰은 이러한 취재 제한이 튀르키예 대통령실까지 올라가는 사안으로, 정보 요원들이 장례식장이나 매장지 같은 민감한 현장에 깔려 기자들을 막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미 다른 외신기자가 잡혀간 바 있고, 너희도 적발될 경우 구금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로부터 약 한 달 가까이 지났다. 이 경찰의 경고는 허풍이 아니었다. 그 사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진 피해와 정부 대응 문제, 구조 실태 등을 보도한 기자들을 잡아들이고 있다.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명분이지만, 종신집권을 꿈꾸는 에르도안 정권이 권위주의 본색을 드러냈다는 평이 나온다. 강진 사후 대책이 절실한 현재, 에르도안 정권이 이토록 가리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에르도안의 적은 에르도안?

강진 이후 정부 부패로 인한 부실한 건축 관행이 피해를 키웠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토건 사업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속한 정의개발당(AKP)의 지지 기반이다. 에르도안 대통령 당선 이후 정부가 내준 주택 허가 건수가 3배 뛰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은 전했다. 또한 2019년 3월 에르도안 정부는 지방선거를 몇 달 앞두고 불법 건축에 대한 전국적인 사면을 단행했다. 이번 지진으로 크게 무너진 건물 중 당시 사면 조치를 받았던 사례가 연일 보도되고 있다.

아이러니한 점은 에르도안 대통령과 정의개발당이 1만명 넘는 사망자를 낳은 1999년 이즈미트 지진 당시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며 인기를 얻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기점으로 에르도안 대통령은 2002년 총선 승리와 2003년 총리 취임을 거머쥐었다. 지난해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 1999년 지진 기념일을 맞아 미래의 재난에서 국민을 보호할 ‘도시 변환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인간으로서, 재난을 막는 일은 우리 손에 달려 있지 않다. 그러나 재난의 파괴적 영향에 대한 조치를 취하는 일은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이렇듯 ‘지진으로 흥한’ 정치 이력은 20년을 지나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이번 강진 이후 “구조대가 제때 오지 않았다”, “며칠 동안이나 소방관과 군인, 경찰을 볼 수 없었다” 등의 생존자 증언이 보도되며 소위 ‘골든타임’을 놓친 현 정부의 초기 대응이 도마 위에 올랐다. 실제로 1999년 지진 당시 신속히 배치됐던 군이 이번에는 이틀이 지나고서야 투입됐다.

과거 에르도안이 현재 에르도안의 적이 된 모양새다. 에르도안 정권은 지진 발생 초기 트위터를 차단하고, “군인이나 경찰을 본 적이 없다”와 같은 거짓 진술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놨으나 불만이 퍼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건설업자 등 부실 공사와 부정부패 혐의가 있는 자들을 무더기 구속하고 수사를 확대하고는 있으나, 이것만으로 민심을 달래기엔 부족해 보인다.

케말 클르츠다로울루 튀르키예 공화인민당(CHP) 대표가 3월 6일(현지시간) 대선에서 에르도안 대통령과 맞설 대항마로 선출됐다. / AP연합뉴스

케말 클르츠다로울루 튀르키예 공화인민당(CHP) 대표가 3월 6일(현지시간) 대선에서 에르도안 대통령과 맞설 대항마로 선출됐다. / AP연합뉴스

21세기 술탄, 최대 위기 맞다

5월 14일 대선과 총선을 앞둔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번 강진으로 정치 인생의 최대 위기를 맞았다. 그는 조만간 대선 출마 의사를 공식화할 것으로 관측된다. 최근 여론조사에서의 지지율은 50% 정도로 안정적인 수준이지만 지진 대응을 비롯해 경제 문제, 권위주의적 여론 통제 등이 발목을 잡고 있다.

튀르키예는 지난해 말 24년 만에 85%가 넘는 초인플레이션을 기록했다. 달러 대비 리라화 가치가 지난 10년 동안 10분의 1 수준으로 폭락했다. 여기에 더해 세계은행은 이번 지진의 물리적 피해가 약 342억달러(약 45조1600억원)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최대 2%포인트 낮아지리란 분석도 있다. 무엇보다 300만명에 가까운 이재민이 발생했다는 점이 민심 악화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은행과 정부를 믿지 못해 집에 금이나 달러의 형태로 자산을 보관해 온 튀르키예 시민들이 지진으로 무너진 자신의 집을 뒤지며 이를 찾고 있다는 외신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진 초기 강경했던 태도를 정부 책임을 일부 인정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그는 지난 2월 말 아디야만을 방문해 이재민 아동들에게 직접 성금을 나눠주며 “불행히도 지진의 파괴적 영향, 불리한 기상조건 등의 어려움으로 인해 우리가 원하는 효율로 (구조 및 수색) 작업을 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여러분의 용서를 구한다”고 말했다.

이 틈을 파고들어 튀르키예의 야권이 결집했다. 지난 3월 6일 6개 야당 연합은 케말 클르츠다로울루 공화인민당(CHP) 대표(74)를 대선에서 에르도안 대통령과 맞설 대항마로 선출했다. 클르츠다로울루 대표는 경제학자 및 관료 출신이다. 온화하고 조용조용한 말투를 비롯해 안경을 쓴 모습이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를 닮아 ‘간디 케말’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반부패 운동을 벌이고 ‘깨끗하고 정직한 인물’이란 이미지를 얻으며 현 정권의 부패 혐의와도 거리를 뒀다. ‘21세기 술탄’, ‘스트롱맨’으로 불리는 에르도안 대통령과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물론 ‘스트롱맨’이 쉽게 물러나리라 전망하긴 이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 20년간 선거에서 12차례 이상 승리를 거둔 노련한 정치인이다. 강진이 터진 이후 이번 대선 및 총선을 6월로 미루자는 논의가 잠깐 나왔다. 지진 피해 지역에서 선거를 제대로 치르기 어렵고, 흉흉해진 민심이 현 정권에 불리하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그러나 5월을 고수했다. 일단은 그의 자신감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확실한 건 언론 통제와 탄압으로 민심을 숨길 순 없다는 사실이다. 이미 소셜미디어에서, 거리에서, 심지어는 축구 경기장에서 현 정권을 향한 분노가 분출됐다. 오는 5월 튀르키예 대선 및 총선은 분노한 민심이 향방을 가를 전망이다.

<김서영 국제부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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