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전환기의 재정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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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세종청사 중앙동 / 연합뉴스

정부세종청사 중앙동 / 연합뉴스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운영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가 서민 대중을 위해 작동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부의 편중이 심하고 기회의 균등은 구호에 그칠 뿐 어디에서도 요원하다. 산업생산은 지속적으로 늘고 소비도 확대됐으나 그 과정에서 자원 소비는 지구를 황폐화하고 있다. 여러 사건과 현상이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 세계는 진영화되고, 인플레이션(물가 오름세)은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으며, 정치는 문제의 해결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복잡한 현상과 다층적인 위기 속에서 사람들의 근본적인 우려는 두 가지 사안에 귀착된다. 불평등과 환경파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과거 수십년간 모든 문제는 시장이 해결한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가속화되는 기후위기 시대에 이제 아무도 이를 믿지 않는다. 특히 젊은 사람들, 이들의 자본주의에 대한 분노는 쉽게 체감이 될 정도로 증가하고 있다. 이념적 태도로 치부할 내용이 아니다. 월세는 폭발하고 자기 집을 원하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있다. 왜 자원을 낭비하고 지구를 황폐화하는 경제구조를 두고 봐야 하는가. 성장의 혜택이 모든 이에게 돌아가는 것도 아닌데.

국가의 혁신적 역할과 재정지출

경제체제를 공정하면서 생태적인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공공경제학자인 마리아나 마추카토(Mariana Mazzucato)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교수는 경제와 산업의 기후친화적 재구조화를 주장한다. 시장이 독자적으로는 21세기의 기후환경문제에 대처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모든 것이 불안정한 시기에 기업이 투자에 대한 결정을 미루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지구의 온난화는 가속화되고 양극화도 심각성을 더해간다. 대전환을 위해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국가는 경제의 구조를 개조할 혁신적 과제를 부여받는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정책목표를 정하고 가용자원을 집중하고 전환과정을 설계하고 일정표를 마련해 기업과 민간영역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

정부는 과업지향의 재정 정책(Mission oriented Fiscal Policy)을 국정 운영의 중심축으로 삼아야 한다. 재정수지 균형을 그 자체의 목적으로 보는 재정준칙적 관점을 폐기해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확산)에서 미국과 유럽의 국가들은 천문학적인 지출금액을 어디에선가 마련했다. 그렇다면 왜 보건이나 교육, 주거나 환경과 같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안에서는 이것이 안 된다는 말인가.

다중적 위기는 사회에서 경제체제의 전환을 가능케 하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단기적 위기관리로 그쳐서는 곤란하다. 위기를 장기적으로 잘 마스터할 플랜이 필요하다. 거대한 전환과 이에 따른 재정지출을 새로운 세대협약으로 생각해야 한다. 판단 기준은 공정성과 환경의 지속가능성이다. 지나간 무분별한 경제발전기에 대한 자성적 판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위기를 건전재정적 사고로 극복하려는 시도는 유럽 재정위기를 거치면서 실패로 끝났다. 지난 40년간 국가와 경제는 분리된 부문이며 국가는 경제에 대해 가능한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팬데믹 이후 국가의 개입 없이 경제가 굴러갈 수 있다는 생각이 착각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의 바이든 정부는 대규모 국가투자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다.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Inflation Reduction Act)은 재생에너지를 위한 큰 규모의 조세유인 제공을 포함하고 있다. 마리아나 마추카토는 “국가는 고장난 시스템을 수리하는 기업이 아니”라고 했다. 국가의 역할이 시장이 실패하는 사례에서만 뛰어드는 보조적 기능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국가는 공공이익을 위해 지향점을 제시하고 민간이 이에 상응하는 행태를 택하도록 유인체계를 설계하고 굴러가도록 만들어야 한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전환과정에서는 특히 국가가 해야 하고, 국가만이 할 수 있는 혁신적 역할이 있다. 이는 큰 규모의 재정지출을 수반한다. 에너지전환을 위한 프레임을 결정하고 국가가 먼저 인프라에 투자해야 한다. 민간이 감당할 수 없는 전환기 비용을 지원하고 동시에 공정한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교육, 주거, 일자리, 디지털화 등의 영역에서 사회적 투자가 필요하다. 윤석열 정부는 세수입을 선행적 조처로 줄여놓고 재정건전성을 주장하며 지출을 줄이려고 한다. 매우 시대착오적이며 경제사회적 상황에 부적합하다. 필요하고 피할 수 없는 사회적 투자의 내용과 규모를 확인한 후 단기적인 재정건전성이 아니라 장기적인 재정건전성을 고려해 세금과 국가부채 사이에서 결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단기적인 재정건전성은 재정수지와 정부 부채의 비율과 수치만을 중시한다. 장기적인 재정건전성은 경제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한다. 경제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경우 정부 부채의 증가를 수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정부 부채를 통한 지출 확대는 단기적인 경제의 활성화뿐 아니라 지출 분야와 시기가 잘 선택되는 경우 장기적인 성장률의 회복도 가능하게 해준다. 정부의 재정 지출 증가로 늘어난 부채는 성장률의 회복을 통해 재원 문제를 상당 부분 스스로 해결한다.

성장과 지속가능성의 개념

공공영역의 대규모 투자가 재정 지출의 확대를 의미할지언정 반드시 공공부문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국민의 삶의 질 향상과 민간경제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서도 유능하고 동적인 개념의 국가는 필요하다. 정부가 효율적이고 슬림하면 좋다. 재해보상금 등 시민들의 부담을 줄여주는 국가의 지출이 필요할 때 이를 수행하는 기구가 거대할 필요는 없다. 가능하면 간편하고 효율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 정부는 국세청이나 건강보험공단 등 데이터 시스템이 구비된 다양한 보완적 기구의 도움을 통해 효율적으로 이러한 일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 국가의 기구가 큰 것과 관여하는 예산(시민들에게 지급되는)이 큰 것은 구별돼야 한다.

환경을 고려하기 위해 성장을 포기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성장을 전체로서 추상적으로 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 경제의 대전환 시기에 재생에너지 분야에서는 엄청난 성장이 필요하다. 전통적 에너지 분야는 물론 축소돼야 한다. 국가 간의 생산력 확대 및 제조원가 절감 경쟁이 환경친화적인 새로운 산업 분야를 기술적으로 선점하려는 경쟁으로 대체돼야 한다. 성장과 지속가능성은 서로 충돌하는 개념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분야에서 성장할 것인가’이다.

<김유찬 포용재정포럼 회장·전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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