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선거제, 뜨겁게 논의한 만큼 바뀐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과연 이번 국회에서 선거제 개혁이 이뤄질 수 있을까. 최근 선거제 개편을 둘러싸고 여러 논의가 있지만, 공론장의 주요 화두로는 좀체 부상하지 못하고 있다. 말 그대로 정치인들과 전문가들만의 논의에 그치고 있다.

지난 2월 1일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열린 2024 정치개혁공동행동 선거제 개혁 촉구 기자회견에서 정의당 이은주 원내대표가 선거개혁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2월 1일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열린 2024 정치개혁공동행동 선거제 개혁 촉구 기자회견에서 정의당 이은주 원내대표가 선거개혁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좀 엉뚱한 얘기일 수 있지만,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더 퍼스트 슬램덩크>(슬램덩크)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12월에 개봉한 극장판 <슬램덩크>는 2월 22일 기준 누적관객수 330만명을 돌파했다. 국내에서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가운데 역대 2위의 흥행성적을 기록 중이다. 흥행 요인 중 하나는 한 사람이 여러 번 보는 ‘N차 관람’이었다. <슬램덩크>는 어떻게 이런 흥행 공식을 쓸 수 있었을까. 첫 번째 이유로 만화는 농구의 룰을 독자들에게 쉽게 안내했다. 극장판의 경우 러닝타임의 한계로 일일이 농구의 룰을 설명하진 못했지만, 만화에선 농구를 처음 시작하는 ‘풋내기’ 강백호를 통해 독자들이 농구의 룰을 하나씩 배워나갈 수 있었다. 또 한 가지의 비결은 감정 이입이 가능한 등장인물들의 서사다. 대부분의 인물(서태웅은 제외)이 농구를 절실히 해야 하는 나름의 사연이 있고, 경기마다 이를 투영해 극적인 승부를 벌였다.

선거제 개혁이 가능한 조건 역시 마찬가지다. 우선 새로 바꿀 선거의 룰을 국민에게 친절히 안내할 필요가 있다. 선거제란 절차적 민주주의의 핵심이기 때문에 국민이 제대로 이해한 상태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 한다. 일례로 최근 논의되는 안 중 하나인 ‘지역엔 대선거구제를 도입하고 비례대표를 조정의석으로 활용하는 개편안’이 정말로 도입되려면 이 제도를 명확히 이해하는 사람이 최소한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은 돼야 한다. 지금은 과연 몇%나 될까.

두 번째 조건은 감정 이입이다. 국민이 선거제 개혁에 공감하는 수준을 넘어 정치의 영역에서 어떻게든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선거제가 바뀌어야 한다’는 감정 이입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선거제 개혁을 통해 무엇을 달성할 것인지, 어떤 변화를 추동하려고 하는지를 잘 제시해야 한다. 정리하면 뜨겁게 논의한 만큼 충분히 공론화한 만큼 선거제 개혁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지금의 논쟁은 전혀 뜨겁지 않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가동되고 있고, 여야를 가로질러 국회의원 150명이나 참여하는 ‘초당적 정치개혁 의원모임’을 결성했으나, 실상은 국회 내 논의조차 답보 상태다. 최근 보도를 보면 국민의힘은 전당대회로 인해 당내 논의조차 해보지 않았고, 민주당 역시 법안으로 발의된 복수의 선거제 개편안에 대한 당내 이해 수준이 높지 않다고 한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폐지하는 법안들만 발의한 상태이고,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대선거구제나 권역별 비례대표제 등 다양한 안을 발의한 상황이다. 이렇게 동상이몽의 상황에서 국회 내 논의조차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태에서 복수의 개혁안을 확정해 3월 국회 전원위원회를 개최하고, 4월 10일 법정시한까지 선거제 개편을 완수할 수 있을까. 오히려 질문을 바꿀 필요가 있다. 이런 일정으로 민주주의의 핵심인 선거의 룰을 정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또한 어떻게 해야 선거제 개혁을 제대로 공론화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하나씩 답해보려 한다.

제도가 결과를 담보하지 않는다 우선 오래된 논쟁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과연 제도의 변화가 의도했던 결과를 담보할 수 있을까. ‘정책과 딜레마’라는 연재를 시작할 때부터 붙잡고 있던 의문이다. 의도가 선한 정책이 좋은 결과를 보장하지 않듯이 선거제 개혁도 마찬가지다. 선거제만 바꾸면 한국 정치의 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한국 정치의 여러 문제를 선거제와 어떻게든 결부시켜야 한다.

지금의 선거제도에서 제기되는 중요한 문제는 어려운 말로 ‘비례성의 훼손’, 쉬운 표현으론 ‘죽은 표가 너무 많이 나온다는 점’이다. 죽은 표란 선거에 반영되지 못하는 투표를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선거는 작은 선거구에서 1등으로 득표한 한명만 당선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그 외의 후보에게 투표한 사람들의 의사는 선거에 반영되지 않았다. 이 문제는 지역 일당체제의 지속과도 관련이 있다. 여전한 지역감정과 소선거구제의 영향으로 많은 지역에서 ‘공천’이 ‘당선 확정’과 사실상 동의어였다. 이렇게 되면 정치의 영역에서 건전한 경쟁이 사라진다. 현재의 소선거구제가 여러 정당이 존립할 기반을 막는다는 지적도 있다. 민주화 이후 소선거구제하에서 3개의 정당 이상이 국회 교섭단체(20개 의석 이상)를 구성한 적이 여러 번 있지만, 대부분 대선후보가 정당의 간판 얼굴이었다. 그나마 계급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제3세력으로 존재감을 키웠는데, 결정적인 이유는 2004년 총선부터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도입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선거의 룰을 바꿔 ‘비례성 강화’와 ‘다당제의 기반’을 마련하려는 게 지금까지의 선거제를 개혁하려는 주된 취지였다. 이는 지난번 20대 국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대 국회는 야 4당(더불어민주당·민주평화당·바른미래당·정의당)이 주도한 선거제 개편안을 통과시켰지만, 당시 선거제 개편에 반대했던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에 이어 더불어민주당마저 제도의 취지에 반하는 ‘위성정당’ 창당에 나서면서 선거제에 대한 회의감만 키운 꼴이 됐다. 그렇다면 이번 국회에선 위성정당을 방지하는 방식으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확대하는 것이 정답일까. 아니면 윤석열 대통령이 운을 띄운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하는 것이 비례성을 강화하는 방법일까.

문제는 제도 개편만으로 의도했던 결과를 담보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른 정책과 마찬가지로 선거제 역시 방안마다 장단점이 있고, 어떤 효과가 클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일본과 대만에선 중선거구제가 다당제의 기반이 되기보다는 파벌 정치와 양당제를 강화하는 기반이 된 사례가 있다.

20대 국회의 선거제 개편부터 복기해야 국내에선 지난 20대 국회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한 이후에 거대 양당이 위성정당을 만들며 제도 해킹에 나섰지만, 심판을 받기보다 오히려 위성정당을 통한 의석수 확보에 성공했다. 이는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고, 국민적 공감대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책 의제는 제대로 된 논의가 축적된 만큼 현실과 정합성을 가지고 사회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데, 선거제야말로 축적된 논의만큼 순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시점에 필요한 건 20대 국회의 선거제 개편 과정과 위성정당을 통한 선거에 대한 복기와 성찰이다. 당시 복수의 선거제 개혁안에서 어떻게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으로 의견이 모아졌는지, 또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왜 위성정당 사태로 귀결됐는지 치열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종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성찰이 눈에 띈다. 그는 시사주간지 ‘시사IN’과의 인터뷰(김종민 의원, ‘20대 정개특위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먼저다’, 2023. 2. 8)에서 기존의 연동형 비례대표제(지역구 225석·권역별 비례 75석)가 준연동형(지역구 253석·비례 47석 유지)으로 축소될 때도 이를 공론화하길 주저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걸 논쟁하는 순간, 당시 자유한국당이 트집을 잡거나 공격할 것을 우려했다. 그러면 선거법 개정안이 정쟁의 테이블에 오르게 되고, 국민이 피곤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합의된 거니까 ‘그냥 가자’고 한 거다. 숙제를 미뤄놓은 거다”라고 복기했다. 당시 대국민 공론화는 물론, 국회 내 공론화조차 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제도 해킹에 나섰던 주체들도 복기와 성찰이 필요하다. 첫 위성정당 시도였던 미래한국당을 만들었던 주체들, 그 수혜를 입어 현재 국민의힘 비례대표가 된 국회의원들, 더불어시민당을 만든 주체들과 수혜를 입은 현재 더불어민주당과 시대전환, 기본소득당의 국회의원들부터 복기와 성찰을 해야 한다. 새로운 제도가 순기능을 발휘하려면 과거 역기능이 발휘된 사례들부터 살펴봐야 한다. 위성정당을 통해 국회에 진출한 이가 상당수이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선거제 개혁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는 일도 중요하다.

제대로 공론화하기 위한 방안 결국 선거제 개혁은 제대로 공론화한 만큼 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제대로 공론화할 수 있을까. 첫째로 선거법 개편 일정을 바꿔 현실적인 일정을 짤 필요가 있다. 현재 법으로 정해진 선거법 개정 법정시한은 4월 10일이다. 한 달 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이 기간에 복수의 안을 정개특위가 도출하고, 국회 전원위원회를 개최한 다음에 안을 확정한다면 다시 한 번 위성정당과 같은 사례가 나올 수 있다. 국민이 바뀐 선거제를 제대로 이해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실무상 선거 1년 전에 선거법이 확정되는 게 적합하다는 주장도 타당하지만, 정말 선거제를 개편하려고 한다면 이런 벼락치기식의 일정으로 할 순 없다. 3월에 복수안을 도출한 후 4월부터 8월까지 충분히 공론화를 한 다음에 9월 정기국회에서 통과시키는 게 그나마 현실적인 안이다. 여기에 4월과 8월, 두 차례 대국민 여론조사를 실시해 각 선거제 개편안을 국민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또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해볼 것을 제안한다. 그렇게 해야 정치권이 공론화에 얼마만큼 성공했는지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선거제 개편을 제대로 공론화하려면 이번 선거를 통해 어떤 문제를 해결할지도 분명히 해야 한다. 여러 학자가 선거제 개편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목표(이를테면 기후위기 대응)를 결부시킨다고 우려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시대적 과제에 왜 정치권이 응답하지 않는지를 묻고 따져야 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확대든, 중대선거구제의 도입이든, 권역별 비례대표제나 도농복합형 중대선거구제 도입이든 새롭게 바뀐 선거제도에서는 기존의 비례성 훼손 지역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한다. 그곳에서 당선된 이들이 불평등과 기후위기, 저출생과 고령화, 지방소멸뿐 아니라 구체적 복지 의제들을 주도했으면 한다. 다시 말해 각 의제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다수 출현해 정치권의 의제 논쟁, 정책 담론을 주도해야 한다.

이런 사례가 축적돼야 선거제 개편에 대한 효능감을 얻을 수 있다. 결국 제도 자체가 변화를 만들어내기보다는 제도를 둘러싼 논의와 제도를 선용하려는 의지가 결과를 만들어낸다. 이번 선거제 개혁은 어떤 경우에 해당할까.

<윤형중 LAB2050 대표>

윤형중의 정책과 딜레마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