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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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당시에 그런 사람이 되게 필요했으니까요.”

인터뷰에 응해준 A에게 ‘임신중지 경험을 말하게 된 계기’를 묻자 말미에 그가 답한 이 대목이 나의 마음을 붙들었다. A는 10대 때 임신중지를 하기 위해 열 곳이 넘는 병원을 찾아다녔다. 보호자와 파트너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며 번번이 거절당했다. 가까스로 임신을 종결했지만 적지 않은 비용을 홀로 부담했다. 필요한 돌봄을 제때 받지 못한 채 긴 터널을 지나왔다.

동성 커플에게도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야 한다는 법원 판단이 나온 지난 2월 21일 소송을 제기한 소성욱·김용민씨 등이 선고 직후 서울고법 앞에서 기뻐하고 있다. / 성소수자가족구성권네트워크 제공

동성 커플에게도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야 한다는 법원 판단이 나온 지난 2월 21일 소송을 제기한 소성욱·김용민씨 등이 선고 직후 서울고법 앞에서 기뻐하고 있다. / 성소수자가족구성권네트워크 제공

1년여 뒤 그는 친구의 걱정어린 물음에 자신의 임신중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때의 ‘말하기’를 시작으로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시위를 비롯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여러 현장에서 자신의 경험을 말했다. 성적 실천을 하기까지 성인보다 더 많은 장벽이 놓여 있는 여성 청소년들이 그를 찾아왔다.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판결로 임신중지가 더는 범죄가 아니게 됐지만, 중요한 정보는 여전히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들이 보다 덜 외롭게 자신의 성과 재생산 건강을 살필 수 있었으면 하고 그는 바란다.

누군가 필요로 ‘할 테니’ 하는 말이 아니라 누군가 필요로 ‘하기에’ 하는 말은 중요하다. ‘내가 하는 말은 너에게 필요한 이야기일 것’이라는 추정에 근거한 나 중심 발화에서 나아가 ‘너에게 필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나는 말한다’는 너 중심 발화는 묵직한 결심을 동반하는 행위이다. 자신의 내밀한 부분을 내보이는 데에서 오는 두려움보다 당신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앞세운다.

동성 부부 김용민·소성욱씨가 지난 2월 21일 “동성인 배우자도 건강보험 직장가입자의 피부양자로 인정하라”며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 2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받았다. 재판 결과는 법률상 부부로 인정받지 못하는 국내 성소수자 커플이 사회보장제도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지 여부를 알려주는 가늠자였다. 이들은 한국의 수많은 동성 커플을 위해 말하고 싶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폭력, 산업재해, 집단 따돌림, 성소수자 차별, 국가폭력 등 갖은 폭력의 경험이 누군가의 언어로 길어 올려져 또 다른 이의 입을 열게 한다.

매스컴에 등장한 몇몇 ‘용감한’ 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힘들어하는 당신을 위해 자신의 경험을 기꺼이 말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를지 모른다.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는 책 <중력과 은총>에서 비참함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했다. 비참함이야말로 실재하는 진실로서 그 안에 인간의 참된 능력이 있다고 봤다. 부자나 권력자는 스스로가 중요한 존재라고 믿기 때문에 인간의 비참함을 알기 어렵다고 했다. 해묵은 구조적 문제는 손 놓은 채 노동자, 장애인, 여성 등 말이 필요한 이들의 말을 앗아가려는 대통령의 모습에서도 이를 본다.

꺼내기 쉽지 않았을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며 어둠을 걷어준 친구에게서, 말이 절박한 사람들을 위해 지금도 어딘가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말’을 배운다. 비참함을 곱씹으며, 이어나가려 한다.

<박하얀 스포트라이트부 기자 whit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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