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방비와 ‘가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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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개포동의 판자촌 ‘구룡마을’ 너머로 부자 동네의 상징인 도곡동 타워팰리스가 보인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 개포동의 판자촌 ‘구룡마을’ 너머로 부자 동네의 상징인 도곡동 타워팰리스가 보인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학창 시절 친구 집에서 잔 날이 이따금 기억난다. 친구의 집은 학교 근방의 오래된 주택가였는데, 그는 등교 시각 두 시간 전부터 눈을 떠서는 수선을 떨었다. “지금 일어나야 해. 이따가는 화장실 못 가.” 한옥을 개조한 듯한 그의 집은 비슷한 모양새의 집 몇 채와 몸을 붙이고 있었다. 마당을 가운데 둔 채 한 바퀴 두른 모양이 흡사 알파벳 G자 같았다. 그중 가장 안쪽, 글씨로 치면 마지막 획 돌출부 앞에 여럿이 줄을 서 있었다. 대여섯 가구의 유일한 공동화장실이었다.

호들갑 떨고 싶진 않다. 열악해 보일지언정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희한하게도 방 안에 샤워실은 있었다. 다만 날이 추우면 수도관이 얼어 조금 고생스럽다고 했다. 그럴 때 친구는 목욕탕에 갔다. 아르바이트 시간이 코앞인데 화장실 줄이 길 때는 택시를 탔다. 누군가는 친구에게 돈이 많냐고 했다. 많은 사람이 안 써도 되는 돈을 쓰며 살았으니까.

얼마 전 한 언론이 보도한 ‘열화상 카메라로 아파트촌·쪽방촌 온도 쟀더니’ 기사를 보며 친구 생각이 났다. 서울 마포구 아파트단지와 용산구 쪽방촌을 촬영해보니, 두 지역 건물의 외부 온도가 20도 이상 달랐다고 한다. 전자는 단열재가 두껍고 이중창 등 창호가 잘된 반면 후자는 그렇지 못한 탓이었다. 그 결과 두 지역에 사는 이들이 똑같이 따뜻하려면 쪽방촌 쪽이 더 많은 난방비를 지불해야 한다고 기사는 전했다.

미국의 여성 노동자 린다 티라도는 책 <핸드 투 마우스>(번역하면 ‘입에 풀칠하다’이다)에 “빈곤은 X라 돈이 많이 든다”는 문장을 썼다. 이런 얘기다. 가난한 이는 10만원짜리 토스트기 말고 3만원짜리 저품질 기계를 산다. 비싼 게 튼튼하다는 건 알지만 당장 살 돈이 없다. 여러 번 고장난 물건을 다시 산 결과 10만원 이상을 쓴다. 작은 병을 키워서 '어리석다'는 말을 듣지만, 일터에서 잘릴 것이 두려워 휴가를 내지 못한 탓이 크다. “너는 왜 전세 안 살고 비싼 월세를 내냐.” 이런 말을 한 대학 친구는 전세 보증금이 없는 삶을 상상해본 적 있었을까.

가난한 자가 부담하는 ‘안 써도 될 돈’은 얼마나 될까. 데이터 강국을 자임하지만, 역대 정부가 이런 계산을 해봤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급격한 인상으로 논란인 난방비부터 오리무중이다. 여당은 전임 문재인 정부 탓하느라 바쁘고, 야당은 소득분위에 따라 전 국민 80%의 난방비를 차등지급하자고 단언한다. 어느 지역, 어떤 건물에서 어떤 온도를 설정했을 때 얼마나 돈이 드는지 실증 연구는 없다. 이런 것이 한둘이겠나. 지난해 8월 폭우에 따른 일가족 사망과 다수의 재산 피해는 ‘반지하’라는 거주 여건이 원인이었다.

정의니 평등이니 공정이니 추상적 단어의 참뜻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돈이 없다는 이유로 더 많은 돈을 써야 한다는 역설이 부당하다는 느낌은 분명하다. 학술 용어는 없지만 ‘가난 비용’이라고 편의상 부르겠다. 이들 비용의 목록을 정부와 정치권이 만들었으면 한다. 폭우 때 대통령은 “어떻게 미리 대피가 안 됐나 모르겠네”라고 말했다. ‘모른다’는 말이 본질이다. 그가 강조하는 ‘약자와의 동행’도, 약자가 누군지를 알아야 가능하지 않겠나.

<조문희 정치부 기자 moon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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