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발언 논란에 가린 진짜 외교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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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대위변제’ 결정이 부를 한·미·일 동맹 하부구조화 위기

잘한 것도 ‘외교’고, 못한 것도 ‘외교’다. 여론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내린 평가는 양분화된 한국사회의 현실을 상징한다. 한국갤럽이 지난 1월 17~19일 전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벌인 여론조사에서 윤 대통령이 ‘직무 수행을 잘하고 있다’는 응답은 직전 주보다 1%포인트 상승한 36%로 나타났다. 부정평가는 2%포인트 하락한 55%였다(신뢰수준 95%·표본오차 ±3.1%포인트). 독특한 점은 긍·부정 평가 이유다. 윤 대통령을 긍정평가한 359명 중 17%가 외교를 이유로 꼽았다. 반대로 부정평가한 548명 중 15%도 외교를 이유로 꼽았다. 긍·부정 평가 모두에서 외교는 ‘평가 사유’ 1위를 차지했다. 동일한 사안을 두고 정반대의 평가가 나온 셈이다.

아랍에미리트(UAE)를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월 15일(현지시간) 현지에 파병 중인 아크부대를 방문,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다. 아부다비=연합뉴스

아랍에미리트(UAE)를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월 15일(현지시간) 현지에 파병 중인 아크부대를 방문,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다. 아부다비=연합뉴스

외교는 대통령지지 여부를 판가름하는 결정적 지표가 아니었다. 경제처럼 결과를 수치화해 파악할 수 있거나 국내정치처럼 변화를 관전하며 평가할 만한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 간 관계라는 특수성을 이유로 세부정보가 공개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공은 부각할 수 있지만, 과는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가릴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외교가 대통령에 대한 부정평가의 사유로 두드러진다면 이는 주로 외생변수가 발생한 경우였다. 쉽게 말해, 무엇인가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벌어졌다는 의미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외교는 대통령 평가의 주요 기준으로 부상했다. 대부분 윤 대통령의 입에서 시작됐다. 실제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가 진행된 기간은 윤 대통령의 6박8일간 UAE(아랍에미리트)·스위스 순방 시기와 겹친다. 해당 기간 가장 화제가 된 것은 “UAE의 적은, 가장 위협적인 국가는 이란이고 우리 적은 북한이다”는 윤 대통령의 언급이었다. ‘UAE로부터 300억달러 투자 유치’ 등의 성과를 홍보하려던 시도는 ‘파병 장병 격려 차원’이라는 말 한마디에 빛이 바랬다.

‘UAE 300억달러 투자 유치’ 빛바래

윤 대통령이 만든 돌발상황이 단순히 지지율에만 악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다.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서서히 다가오는 구조적 위기에 둔감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대통령의 발언이 정쟁화되면서 외교적 사안을 숙고할 기회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한일관계 개선을 둘러싼 논의가 그렇다. 과거사 문제 해결보다 처리에 가깝다는 국민적 비판을 받으면서도 ‘대위변제’(한국 기업 등 제3자를 중심으로 피해를 배상하고 이후 구상권 등을 취득하는 것)를 중심으로 한 해결법이 한국 정부의 공식입장이 됐다. 역대 어느 정부도 쉽게 답을 내놓지 못한 문제였다.

‘대위변제’는 윤석열 정부가 새롭게 만들어낸 획기적인 해법이 아니다. 기존 선택지 중 하나를 단순히 선택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출범한 지 1년도 안 된 정부가 100여년이 넘도록 쌓여온 문제를 국민적 합의도 없이 해결하겠다는 태도에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이와 별개로 역대 정부가 과거사 문제 해결에 신중했던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고 대비하고 있느냐도 중요하다.

윤석열 발언 논란에 가린 진짜 외교문제

한일관계 개선을 단순히 피해자의 권리 구제 문제로만 보는 것은 일차원적 시각이다. 과거사 문제 해결은 그 자체로 동북아시아의 구조적 변화를 의미한다.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의 전환을 꿈꾸는 일본을 막았던 것은 과거사 문제로 얽힌 역내 주변국의 반발이었다. 미국 역시 80여년 전 이들 주변국과 함께 일본에 맞섰다. 원론적으로나마 미국이 일본에 ‘과거사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것은 그들의 문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일 신밀월 관계에서도 끝내 실질적 재무장에 도달하지 못한 데는 이러한 이유도 깔려 있다.

일본을 견제해온 역내 세력 간 암묵적 연대는 현재 사실상 와해된 상태다. 중국은 적대세력으로까지 분류되고 있다. 한국 정도가 남은 상황에서 정부는 과거사 문제 처리를 추진하며 사실상 일본의 조력자 역할을 맡았다. 실제로 지난 1월 12일 한국은 일본 정부가 요구한 강제동원 문제에 관한 처리법을 찾아 제시했다. 1월 13일(미국 현지시간)에는 미·일 정상회담이 열렸고, 일본의 ‘적 기지 공격능력(반격능력)’ 확보에 대한 미국의 공식 지지가 발표됐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특히 국가 간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일본의 보통국가화를 위한 절차는 순차적으로 풀려나가는 중이다. 동북아시아의 구조변경은 이미 본궤도에 올랐다. 일각의 기대처럼 한국이 변화를 주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자의식 과잉이다. 당장 윤 대통령의 핵보유 발언에 비핵화를 강조하는 미국의 태도가 이를 방증한다. 한국은 동북아시아 구조 변화의 종속변수가 될 공산이 크다. 결국 광복 후 80여년 동안 역대 어느 정부도 걷지 않으려 했던 길에 윤석열 정부는 자발적으로 나선 모양새가 됐다.

2015년과 닮은 2023년

아시아로의 회귀를 꿈꾸는 미국 민주당 정부, 헌법 개정을 꿈꾸는 일본 자민당 내각, 북한과의 대결의지를 불태우는 한국 정부, 도발 수위를 높여가는 북한, 관망하는 중국까지. 또 2015년 그 상황이다. 당시 체결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는 과거사 문제 처리의 신호탄이었다. 이를 위해 박근혜 정부는 복잡하게 얽힌 역사 문제를 국내정치 문제로 전환시켰다. 위안부 합의에 대한 정권 차원의 추진 의사가 공개됐고, 역사 문제는 한순간에 보수 대 진보의 이념 대결로 변했다. 당시 미국 오바마 행정부 역시 한국 정부의 과거사 문제 해결 의지를 지지했다. 이른바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추진하는 데 필요했기 때문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은 ‘한·미·일 삼각 안보체제’를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이는 한·미·일 공조가 중요해질수록 한·일 간의 과거사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온다는 구조적 모순이 있었다. 미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일 양국 정부를 중재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발간한 <한·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2015. 12. 28.) 검토 결과 보고서>에는 “한일관계 악화는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략에 부담으로 작용함으로 미국이 양국 사이의 역사 문제에 관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분석했다.

시민사회 단체 회원들이 지난 1월 18일 외교부 앞에서 굴욕적 강제동원 해법 폐기 등을 촉구하는 항의서한을 박진 외교부 장관에게 전달하기 위해 외교부로 향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시민사회 단체 회원들이 지난 1월 18일 외교부 앞에서 굴욕적 강제동원 해법 폐기 등을 촉구하는 항의서한을 박진 외교부 장관에게 전달하기 위해 외교부로 향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결과적으로 한국 정부는 ‘위안부’ 합의에 “문제가 있다”는 뜻을 밝히면서도 한 번도 이를 부정하거나 파기하지 못했다. 일단 합의에 이르면 설사 그후에 부당하다고 느껴도 돌이키기 어렵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졸속 합의라는 비판을 감내하면서 얻은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시계를 좀더 앞으로 돌려 2012년 6월, 당시 이명박 정부에서 논의됐던 사안 하나를 살펴봐야 한다.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 간의 비밀정보 공유를 내용으로 하는 ‘한·일 정보보호협정’, 속칭 ‘지소미아(GSOMIA)’다.

애초에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정보보호협정은 두 가지 방향성을 갖고 있었다. 첫째는 익히 알고 있는 북한과 관련된 군사정보 공유를 목표로 한 지소미아다.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한 가지는 한·일 양국군 간 상호 군수품 및 서비스 제공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상호군수지원협정(ACSA)이다. 교환하는 군수품과 서비스의 범위를 확장해 지소미아와 합치면 사실상 군사동맹이다. 이명박 정부는 이를 밀실에서 추진하다 역풍을 맞았다. 박근혜 정부가 이를 계승해 체결했다. 위안부 합의 후, 2016년 1월 6일 북한의 4차 핵실험이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은 1월 13일 신년사에서 “한·미 양국은 미국의 전략 자산 추가 전개와 확장억제력을 포함한 연합 방위력 강화를 통해 북한의 도발 의지 자체를 무력화시켜 나가도록 할 것”이라며 ‘협력’을 강조했다. 같은해 11월 23일 지소미아가 체결됐다.

목적이 과거사 문제 해결인가, 군사협력인가

윤석열 정부의 강제동원 문제 해결 추진은 2015년 상황과 닮았다. KBS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지난 1월 18일부터 사흘간 전국에 거주하는 만 18세 이상 성인남녀 1000명을 상대로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 해법’에 동의하는지를 물었다. 그 결과, ‘동의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전체의 59.6%, ‘동의한다’는 응답이 33.3%를 기록했다. 특히 ‘동의한다’는 응답은 같은 조사에서 윤 대통령이 ‘일을 잘하고 있다’고 답한 비율 36.3%에도 미치지 못했다(신뢰수준 95%·표본오차 ±3.1%포인트).

피해자 측 역시 대위변제에 부정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대표는 ‘일본 기업의 책임을 뒤집어쓰는 것이 외교적 해법인가’라는 성명서를 내고 “정부가 법원이 명령한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할 생각은 않고, 구걸 외교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져 물었다. 여론, 피해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정부는 과거사 문제의 빠른 처리에만 집착하고 있다. 목적이 따로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정부 스스로 키우고 있는 꼴이다.

일본과 과거사 문제를 합의한다면 다음 수순은 북한 견제를 위한 ‘협력’을 실질화할 차례다. 지소미아 복원, 상호군수지원협정(ACSA) 카드도 꺼내볼 수 있다. 일본의 반격능력 확보(사실상 ‘재무장’)가 완성단계에 이르면 사실상 군사동맹으로 전환되는 수순이다. 이로써 동북아시아의 구조변경이 완성된다. 다만 해당 단계에서 한·미·일이 대등한 삼각체제일지는 미지수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전 국립외교원장)는 “한·미·일 간 유사동맹이 실질화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보인다”며 “오는 5월,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 전 한·일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워싱턴에서 다시 한 번 한·미·일 정상이 만나면 한·미·일 삼각체제는 완성 수순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한·미·일 삼각동맹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은 동맹의 하부구조에 머물 것이다”라며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북·중·러와 국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미·일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한국이 대립의 최전선에 서는 구조”라고 덧붙였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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