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수사 인권보호 규칙 언제 제정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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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월 넘게 법제처 심사…차별금지 조항 때문?

검찰에는 ‘인권보호수사규칙’이라는 규정이 있다.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사건관계인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유의해야 할 사항이 담겼다. 법무부 훈령이 아니라 대외적 구속력을 지닌 법무부령이다. 반면 경찰에는 이런 법령이 없다.

지난 7월 25일 서울 미근동 경찰청 정문 철제 바리케이드 사이로 경찰 상징 문양이 보인다. / 강윤중 기자

지난 7월 25일 서울 미근동 경찰청 정문 철제 바리케이드 사이로 경찰 상징 문양이 보인다. / 강윤중 기자

경찰은 지난 2월 ‘경찰수사에 관한 인권보호 규칙’ 제정안(행정안전부령)을 추진했다. 경찰이 수사절차에서 준수해야 할 인권보호 원칙을 규정했다. 검찰의 인권보호수사규칙과 유사하다. 다만 시민사회단체는 사회적 약자 보호를 위한 조치 등이 미흡하다며 비판했다. 일부 보수진영 쪽에선 규칙에 포함된 차별금지 조항이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이유 등으로 반대했다.

경찰은 양쪽 의견을 모두 수용하지 않았다. 입법예고를 거쳐 지난 4월 법제처에 심사를 의뢰했다. 9개월 가까이 지났지만 감감무소식이다. 법제처는 심사를 아직 마무리하지 않은 이유를 두고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는다.

해당 규칙은 경찰청이 최근 몇년 동안 표방해온 ‘인권 경찰’ 구현의 구체적인 실행방법 중 하나이다. 내용 면에서 인권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지만, 인권 중심의 수사경찰을 제도화하는 첫걸음이라는 상징성을 갖는다.

법제처는 “심사 중”

“국민은 수사절차에 있어 자신이 보장받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게 된다. 수사관은 국민의 권리를 확인함으로써 인권을 존중·보호하고 나아가 그 실현에 힘쓰게 된다.”

경찰청은 지난 2월 ‘경찰수사에 관한 인권보호 규칙’ 제정안을 입법예고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경찰청은 “경찰 책임수사에 맞게 국민의 인권보호 수준도 한층 더 강화될 것”이라고 했다. 대외적 구속력을 강화하기 위해 행정안전부령으로 규정했다. 경찰청은 지난해 6·10 민주항쟁 기념일에 ‘인권 경찰 구현을 위한 경찰개혁 로드맵’을 발표하면서 이 규칙의 제정도 주요 과제로 꼽았다.

규칙은 우선 수사 과정에서 인권보호를 위해 지켜야 할 일반적인 사항을 명시했다. 이어 수사 개시, 체포·구속, 압수수색, 피의자 및 피해자 조사 등 수사단계별로 유의해야 할 내용도 적시했다. 성별, 종교, 인종, 정치적 의견, 성적 지향 등 22개 이유로 차별을 해선 안 된다는 조항도 있다. 소년, 장애인, 외국인 등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할 때 살펴야 할 점도 포함됐다.

경찰청은 입법예고 후 지난 4월 8일 법제처에 법령 심사를 의뢰했다. 그러나 올해가 끝나가는 현재까지도 심사 단계에 머물러 있다. 법제처는 진행 경과를 묻는 말에 “심사 중이라 특별히 언급할 내용이 없다”고 밝혔다.

법제처는 지난 9월 천준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답변서에서 “다른 법령과의 관계 및 유사 법령과의 중복 문제 등 제정의 필요성 및 타당성 등에 관해 (경찰청과) 협의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같은 시기 경찰청은 “시행 예정 법률에 따른 후속 법령 검토 등 심사대상 법령이 많아 늦어지는 것으로 안다”고 천 의원실에 답했다. 법제처가 우선 처리해야 할 법령이 많아 해당 규칙의 심사가 지연되고 있는 것 같다는 취지다.

이후 경찰청 측은 지난 10월 법제처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장기간 법제처에 계류된 상황에 대한 답답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경찰청은 규칙 제정이 마무리되면 이에 맞춰 가칭 ‘인권수사 매뉴얼’도 제작해 일선에 배포한다는 계획까지 세워놓은 상태다.

“인권보호 관련 별도의 독자적 규정 필요”

법제처가 천준호 의원실에 답한 내용 중 ‘유사 법령과의 중복 문제’가 눈에 띈다. 경찰의 직무수행과 관련한 몇몇 법령에는 인권보호 관련 내용이 산재해 있다. 검경 수사권 조정에 따라 2021년 1월 마련된 ‘경찰수사규칙’(행안부령)이 대표적이다. 대통령령인 ‘검사와 사법경찰관의 상호협력과 일반적 수사준칙에 관한 규정’(수사준칙)의 하위 법령으로 수사준칙 시행에 필요한 구체적 사항을 담았다.

경찰수사규칙에 차별금지 조항을 비롯해 수사 과정에서 인권침해 방지를 위한 내용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인권보호 외에도 전반적인 수사절차를 규정한다. 또 경찰수사에 관한 인권보호 규칙에 포함된 인권보호 내용은 경찰수사규칙보다 구체적이고 두텁다. 차별금지 사유가 더 많다. 전화로 출석을 요구할 때는 조사 일정과 사건명 등을 문자메시지로도 전송토록 했다. 정보저장매체에서 별건 혐의를 발견하면 탐색을 중단해 별건 수사를 방지하는 내용도 있다. 자료를 임의제출 받을 땐 이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고지해야 한다. 자진출석 등 임의로 수사에 협조하면 되도록 긴급체포를 하지 않고, 변호인이 노트북 등의 전자기기를 이용해서도 메모할 수 있게 했다.

‘범죄수사규칙’에도 인권 관련 사항이 담겼지만, 경찰수사규칙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수사절차 등을 함께 포괄한다. 범죄수사규칙은 행안부령이 아니라 경찰청 내부 훈령이기도 하다. 경찰수사에 관한 인권보호 규칙은 무엇보다 사건관계인이 자신의 보호받을 수 있는 인권 등 권리를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차별점이다.

경찰청 인권위원회도 2020년 9월 25일 경찰수사규칙 및 범죄수사규칙과 별도로 독자적인 인권보호 규정을 마련할 것을 경찰청장에게 권고하기도 했다. 인권위는 당시 “경찰은 절차 규정의 속성이 강한 ‘경찰수사규칙’ 및 ‘범죄수사규칙’ 내 인권보호 방안을 산재해 규정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라며 “이는 인권보호 규정의 공백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고 수사 과정에서의 인권보호 방안을 독자적이고 체계적으로 구성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또 수사, 형사, 여성청소년, 외사, 보안, 교통 등 다양한 수사 및 수사지휘 체계를 갖춘 특징을 언급하며 “현장에서 수사를 진행하는 경찰관들로 하여금 위 규칙이 경찰권 행사의 ‘인권 행동기준’으로 작용하는 것 역시 어렵다고 할 수 있으며 국민 역시 본인에게 보장된 권리에 대해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다”고 했다.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 4월 14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경찰 수사에 관한 인권보호 규칙’ 제정안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 4월 14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경찰 수사에 관한 인권보호 규칙’ 제정안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인권위는 검찰의 사례도 들었다. 검찰은 수사절차를 규정한 ‘검찰사건사무규칙’ 외에도 ‘인권보호수사규칙’이라는 인권보호 규정을 별도로 두고 있다. 인권보호수사규칙은 본래 법무부 훈령(명칭은 인권보호수사준칙) 형식이었는데, 2019년 12월 법무부령으로 격상됐다. 인권위는 이에 따라 경찰의 새로운 인권보호 규칙 또한 행정안전부령으로 제정할 것을 권고했다.

경찰청은 지난 6월 최초로 ‘인권정책 기본계획’을 수립·시행한다고 밝혔다. ‘국민 중심 인권경찰’이라는 비전을 내걸었다. 5개 전략목표에는 ‘인권경찰 실현을 위한 제도화’, ‘준법 활동과 집회·시위의 자유 보장’, ‘사회적 약자 보호’, ‘차별시정 강화’, ‘인권교육 강화’ 등과 더불어 ‘경찰수사의 인권 중심 개혁’도 포함됐다.

이 기본계획 수립에 앞서 시행한 연구용역의 결과 보고서에는 경찰수사에 관한 인권보호 규칙을 제정해야 한다는 제언이 실렸다. 지난 2월 발간한 보고서는 “수사상 인권보호 원칙을 총망라한 규칙을 제정해 책임 수사기관에 맞는 인권·윤리 제도의 규범력을 강화하고, 인권주체성 확립을 통한 인권지향적 수사를 전개한다”라고 했다. 이어 “수사는 국민의 권리·의무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대외적 구속력 있는 행안부령 형식(법규명령)으로 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밖에 경찰에는 ‘경찰관 인권행동강령’이라는 훈령도 존재한다. 2020년 6·10 민주항쟁 기념일에 맞춰 제정됐다. 이는 수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경찰관이 치안 현장에서 인권보호를 위해 지켜야 할 일종의 ‘행동기준’이다. 10개 조항으로 구성됐고 내용도 선언적이라는 점에서 경찰수사에 관한 인권보호 규칙과는 결이 다르다.

2018년 5월에 나온 ‘경찰 인권보호 규칙’(훈령)도 마찬가지다. 경찰 내 인권정책 및 기본계획 수립 등 인권보호를 위한 행정업무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한다. 경찰청 인권위 설치·운영의 근거가 된다. 인권침해 사건의 조사·처리 방법 등 사후 대책과 관련한 내용도 포함한다. 2005년 제정된 ‘인권보호를 위한 경찰관 직무규칙’을 모태로 한다.

해양경찰 규칙도 심사 중

경찰청 외에 해양경찰청도 ‘해양경찰수사에 관한 인권보호 규칙’ 제정안(해양수산부령)을 지난 8~9월 입법예고했다. 경찰청의 규칙과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역시 법제처가 심사 중이다. 해양경찰청 관계자는 “법제처 담당자가 필요한 법령인지 면밀하게 보는 듯하다”고 했다. 해양경찰도 경찰청처럼 ‘해양경찰수사규칙’(해양수산부령)이 있다.

경찰청과 해양경찰청은 법제처에 심사를 의뢰할 때 입법예고 때 접수된 시민 의견도 양식에 맞게 기재해 전달했다. 두 기관이 규칙들을 입법예고했을 땐 ‘국민참여입법센터’를 통해 수많은 의견이 올라왔다.

이 가운데는 차별금지 조항에 반대하는 내용이 많았다. 차별금지 사유 가운데 ‘성적 지향’을 거론하며 “동성애 차별금지를 법적으로 강제하게 된다”는 의견도 다수 보였다. 또 ‘사상·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차별을 해선 안 된다는 내용을 두고도 “주적인 북한을 추종하는 공산주의자, 주사파를 자유와 인권이라는 명목으로 허용하면 내부에서 마음대로 적화를 시켜놓을 것이기에 존중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글이 올라왔다. 여러 사람이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같은 내용을 게재하기도 했다. 일부 보수진영에서 좌표를 지정해 단체로 의견을 달았다고 의심되는 대목이다.

이런 의견들이 법제처 문턱을 넘는 걸림돌로 작용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검찰의 인권보호수사규칙에 담긴 차별금지 조항에도 성적 지향과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차별해선 안 된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해양경찰 인권보호 직무규칙’(해양경찰청 훈령)에도 “성적 소수자란 동성애자, 양성애자, 성전환자 등 당사자의 성 정체성을 기준으로 소수인 자를 말한다”라는 조항이 들어 있다. 또 “경찰관은 성적 소수자가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공개하기를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이를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 “성적 소수자인 유치인에 대해서는 당사자가 원하는 경우 독거수용 등의 조치를 해야 한다” 등의 규정이 있다.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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