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무섭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2022 카타르월드컵이 막을 내렸습니다. 대회 기간 동안 ‘본방사수’냐, ‘하이라이트 시청’이냐를 가르는 기준은 경기 시작 시간이었습니다. 새벽 4시 경기는 일찌감치 포기했고 2시는 몸 상태를 봐서 그때그때 달랐습니다. 자정에 시작하는 경기는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지요. 시계 덕분에 일정 계획과 선택이 가능했습니다.

[편집실에서]시간이 무섭다

물과 공기처럼 너무도 자연스러워 아무런 의심 없이 일상을 지배하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불과 140년 전, 인간의 발명품이라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신간 <인간이 만든 물질, 물질이 만든 인간>(아이니사 라미레즈·김영사)이 깨우쳐준 놀라운 진실입니다. 책 내용을 간략히 살펴볼까요. 1883년, 인류가 그리니치 천문시를 발명하면서 ‘표준시’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지구촌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사는 인류가 표준 시간을 매개로 같은 걸 보고 듣고 같은 일을 하는 세상이 열렸습니다. 지금이야 시계 없는 세상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당시만 해도 얼마나 파격이었을까요.

잃어버린 것도 많았습니다. 잠이 대표적입니다. 졸리면 자고 해가 지면 자던 시절이 있었답니다. 주위가 어둑어둑해지면 잠자리에 들었다가 깨어나서는 책을 봅니다. 청소를 하거나 이웃과 수다를 떨다가 다시 잠을 청하곤 했답니다. 그래 봤자, 몇시간을 잔 건지, 몇시에 일어난 건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시계가 없으니 당연했겠지요. 그저 몸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얼마나 자유로웠을까 싶습니다.

개개인의 특성을 깡그리 무시하고 전 인류를 시간이라는 획일화된 톱니바퀴 속으로 무지막지하게 밀어넣어버린 시계의 횡포는 이제 되돌리고 싶어도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몇시부터 몇시까지는 무조건 자야 성장호르몬이 왕성하게 분비된다, 적어도 몇시간은 숙면을 해야 건강에 좋다, 수면 시간이 몇시간을 넘기면 오히려 몸에 해롭다와 같은 신화가 무수히 탄생한 것도 시계 때문입니다. 시간은 철저히 자본의 편에 섰고 시간의 낭비는 곧 인생의 낭비라는 등식이 성립하기에 이릅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쉼 없는 노동을 반복하느라 인간은 지칠 대로 지쳐 버렸습니다. 내일을 위해 일정 시간이 되면 자기 싫어도 무조건 자야 합니다. 자고 싶어도 잘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다시 한 번 시계를 들이댑니다.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근무제를 개편하겠답니다. ‘주 최대 52시간 근무’제를 지금의 주 단위에서 월이나 분기 단위로 바꾸겠답니다. 말만 유연화지, 노동시간 확대로 이어질 게 뻔합니다. 정부가 앞장서고 기업이 거듭니다. 신성한 노동을 계량화할 수 있다는 인간의 오만이 물질만능주의와 만나 노동자들을 상대로 당근과 채찍을 가하는 모양새입니다. 새로운 플랫폼의 등장에 따른 산업구조의 변화, 다양한 직군의 탄생 등 노동여건의 변화를 반영한 ‘인간다운 해법 찾기’가 절실합니다. ‘차가운 시계’는 지금도 째깍째깍 흘러갑니다.

<권재현 편집장 jaynews@kyunghyang.com>

편집실에서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