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감정 중독 사회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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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2022년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이태원 참사의 슬픔일까, 월드컵축구 16강의 행복일까? 개인의 삶과 마찬가지로 사회도 무수한 감정을 거치며 살아간다. 새로운 감정이 과거를 대체하기도 하고, 집단적 감정 사이의 충돌이 일어나기도 한다. 감정의 변화는 그냥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지,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슬픔에 빠졌던 사회가 한 달 만에 축제 분위기로 바뀐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감정의 운동이 사회의 모든 것이 될 때다. 이런 사회는 겉으로만 역동적으로 보일 뿐, 실제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세월호 희생자 분향소가 차려졌던 전남 진도 팽목항에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쓰인 노란 리본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 서성일 기자

세월호 희생자 분향소가 차려졌던 전남 진도 팽목항에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쓰인 노란 리본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 서성일 기자

기억보다 중요한 것 반지하 주택이 폭우에 침수돼 일가족이 사망한 것이 불과 4개월 전이다. 충격적 사건이었고, 현장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의 태도는 공분을 일으켰다. 이 사건이 주거권 보장을 위한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울 것이다. 감정은 흘러가고 기억은 흐려진다. 슬픔과 분노는 강렬하지만 실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미미하다. 얼마 전 오세훈 서울시장이 주거취약계층을 위한 대책을 내놨지만, 실질적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권리에 기초한 주거제도가 수립될 가능성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박경석-이준석 토론이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이 올해 5월이다. 이 토론도 희미한 과거가 됐지만,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오늘도 격렬히 투쟁 중이다. 이준석에게 분노하는 사람은 많지만, 장애인의 권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적다. 그래서 이준석이 사라지자 전장연의 투쟁도 잊힌다. 이쯤 되면 이런 의문이 든다. 다수가 그 토론에 주목했던 진짜 이유는 자기편을 응원하고 상대편을 미워하기 위해서 아닌가? 그에 비해 토론에서 다루었던 문제 그 자체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일가족이 자살하거나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고 자살하는 사건이 종종 발생한다. 이런 종류의 사건이 처음 알려졌을 때는 모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비극은 어느새 일상이 됐고, 충격의 강도는 갈수록 약해진다. 대중의 무감각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기억, 관심, 공감이 아니라 문제 해결이다. 사람들이 슬퍼하든 말든 관심을 갖든 말든, 사회적 관계에서 배제된 이들을 위한 제도는 계속 돌아가야 한다. 제도란 그걸 위한 것이다.

성폭력이란 상대방의 동의 없는 성적 접촉이다. 미투 운동은 성폭력의 이러한 정의가 정상적 규범으로 자리 잡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미투 운동이 일어난 나라의 상당수가 ‘동의’ 개념에 대한 논의와 교육에 몰두하고 있다. 한국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대중의 거대한 분노는 ‘가해자 처벌’로 수렴할 뿐, 동의 개념과 성 윤리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언젠가 또다시 권력자의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면, 그때도 피해자는 제도와 국가 기구가 아니라 대중의 집단적 분노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분노와 과학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말로 세월호 참사를 표상하는 것은 뭔가 기이하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일인가? 비극적 사건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것이 드러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기억하기 위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바꾸기 위해 기억하는 것이다. 박근혜 탄핵은 일종의 ‘위로’가 됐을지 모르지만, 참사가 드러낸 국가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진 못했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봐야 한다. 나는 정말 세월호를 잊지 않았는가? 기억은 무엇을 실질적으로 바꾸었는가?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의 한국은 실제로 달라졌는가?

우연한 사고로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슬픔과 상실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은 애도를 위한 애도다. 우리는 살기 위해 애도하고 애도하기 위해 살아간다. 사회적 참사의 희생자를 사회적으로 애도하는 과정은 다르다. 그것의 유일한 방법은 참사의 원인을 제거하고 실질적 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이태원 참사가 제기한 일반적 문제는 ‘왜 한국의 국가 기구는 시민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가?’이고, 구체적 문제는 ‘왜 경찰 조직은 위험을 대비하지도, 긴급상황에 대응하지도 못했는가?’이다. 이제 곧 누군가는 참사를 망각할 것이고 누군가는 기억을 위한 투쟁을 시작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기억 그 자체가 아니라 기억을 통해 제대로 작동하는 국가 기구를 만드는 일이다.

집단적 감정은 사회적 관계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 중 하나다. 정치적 실천 역시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감정과 실제 문제는 다른 차원에 속한다. 집단적 감정이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제도를 움직이는 힘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지금 한국에는 이런 전환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집단적 슬픔과 분노는 적당한 대상을 향해 분출되거나, 서서히 잊히거나 축적돼 다음 폭발을 기다릴 뿐 제도의 공간을 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도 자체를 분노의 대상으로 삼는 반제도주의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한국사회는 감정 중독 상태다. 자기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실제 세계를 바라보지 못한다. 비극적 사건이 발생하면 그것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비롯한 고통스러운 감정을 어떻게 해소할지에 더 집중한다. 해소 방법은 천차만별이다. 그중 최악은 희생자를 탓하는 것이다. ‘이태원에 놀러간 그들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들은 자기 맘 편하자고 윤리적 인간이기를 포기한다. 공권력과 정치인의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에도 유의할 점이 있다. 책임이라는 말에 쏟아지는 울분은 사건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출발점이 돼야 한다. 집단적 감정이 감정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제도를 바꾸는 힘으로 전환될 때만, 사회적 애도를 시작할 수 있다.

정부와 여당은 이태원 참사 국정 조사에 훼방을 놓고 있다. 이들이 사회적 애도의 첫 번째 걸림돌이다. 사건 원인을 규명하려면 그들을 향한 집단적 분노를 조직해야만 하고, 이는 ‘정권과의 대결’이라는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싸움은 과학적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최종 목표는 참사가 드러낸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 즉 시민 안전을 보장하는 국가 제도를 수립하는 일이다. 책임과 처벌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 어떤 결과에 이르든, 집단적 감정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든, 그 무엇도 이 목표를 대체할 수는 없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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