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1운동 이후 독립운동 주축 사회주의 인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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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주의운동사 권위자’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

임경석 교수가 지난 12월 7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학교 연구실에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30년간 한국 사회주의운동사 연구에 천착해온 그의 연구실은 역사책과 각종 문헌 자료로  가득 차 있었다. / 강윤중 기자 사진 크게보기

임경석 교수가 지난 12월 7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학교 연구실에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30년간 한국 사회주의운동사 연구에 천착해온 그의 연구실은 역사책과 각종 문헌 자료로 가득 차 있었다. / 강윤중 기자

[주간경향] “독립운동사에서 사회주의를 배제하거나 축소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러기는커녕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은 마땅히 독립운동사에 포함되어야 할 뿐 아니라 역사적 기여만큼 온당한 지위와 비중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임경석. <독립운동열전> 서문 발췌)

사회주의운동가들은 해방 후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철저히 외면받아왔다. 정부기관의 독립유공자 선정에서도 배제됐다. 반공이데올로기는 그만큼 공고했다. 문민정부 수립 후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독립운동가는 이름이 지워진 채 양지로 올라오지 못하고 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64)는 한국 사회주의운동사의 권위자다. 1993년 박사논문 <고려공산당 연구>를 발표한 이래 한국 사회주의운동사에 천착해왔다. 2003년 단행본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을 시작으로 <이정 박헌영 일대기>,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이상 역사비평사), <모스크바 밀사>(푸른역사)를 잇따라 펴냈다. 최근에는 독립운동사에서 잊힌 사건과 인물에 대한 기록인 전2권의 <독립운동 열전>(푸른역사)을 출간했다.

각 단행본에는 페이지마다 각주가 수두룩하게 달렸음에도 임 교수의 글은 중학생도 술술 읽을 만큼 쉽고 흡입력이 있다. 좀 과장하자면 짧은 단편소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느낌이다. 그만큼 설명하고자 하는 인물뿐 아니라 주변인물과 상황 묘사까지 잘돼 있다는 방증이다. 임 교수는 왜 한국 사회주의운동가들에게 꽂혔을까. 지난 12월 7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인문대학장실에서 임 교수를 만났다.

임경석 교수는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 재학 중일 때 독서회와 농촌문제연구소에 가입했다. 아울러 야학 활동도 병행했다.  1986년에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정책실 산하 <민주화의 길> 편집부 일원으로 활약했다. 그는  “학자가 되겠다는 열망과 엄혹한 시대 상황으로 인해 주어진 도덕적 책무 사이에서 갈등했다”고 말했다. / 강윤중 기자

임경석 교수는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 재학 중일 때 독서회와 농촌문제연구소에 가입했다. 아울러 야학 활동도 병행했다. 1986년에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정책실 산하 <민주화의 길> 편집부 일원으로 활약했다. 그는 “학자가 되겠다는 열망과 엄혹한 시대 상황으로 인해 주어진 도덕적 책무 사이에서 갈등했다”고 말했다. / 강윤중 기자

꿈과 현실 사이 고민하다 대학원 진학
소련 붕괴가 되레 사회주의 연구 길 터줘
항일운동 당사자들 러시아 기록 쏟아져

임경석 교수는 1958년 전남 여수 출생이다. 옷장사를 하는 부모의 4남2녀 중 넷째다. 중학교까지 여수에서 다닌 후 1974년 광주제일고에 입학했다. 이듬해 고교평준화가 이뤄졌으니 이른바 ‘수재’들이 모였다. 재수를 거쳐 1978년 성균관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배경이 있습니까.

“중·고교 시절에 장래 학자가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역사공부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우리집에 <다정불심>, <홍경래>, <여인천하> 같은 월탄 박종화 선생의 작품을 비롯해 역사소설이 꽤 있었어요. 그 책들을 읽으며 역사에 대한 관심이 커졌죠. 독서를 좋아했어요. 학교 도서관 출입을 자주 했습니다. 우리집 다락방에 올라가 그곳에 쌓아둔 묵은 신문철을 뒤적이는 데도 재미를 붙였고요. ‘독서신문’이라는 타블로이드판형 주간지가 특히 흥미로웠죠. 일곱 살 위 누나의 지도로 책명과 주인공, 사건을 기록하는 독서노트도 습관적으로 썼어요.”

-대학생활은 어땠나요.

“후기 대학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좌절감에 좀 적응을 못 했어요. 그런데 대학 도서관에 꽂힌 책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더라고요. 책이 가지런히 꽂혀 있는 서가를 보면 가슴이 뛰었어요. 모조리 읽어버리겠다고 결심했죠. 도서관에서 틀어박혀 주로 문학서를 탐독했어요. 어느 날 과 선배가 같이 책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해보자고 제안해 수락했어요. 그때부터 조용범의 <후진국경제론>과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최종식의 <서양경제사론> 등을 읽었고 일본어를 익혀 우노 고조의 <경제원론>, 무타이 리사쿠의 <현대 휴머니즘>도 읽었습니다. 학교 서클로는 농촌문제연구회에 가입했고요.”

-이념서클인가요.

“처음에는 합법적인 공개 단체였는데,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 사회적 문제를 발언하거나 연구하는 학생서클은 모두 해체시켰어요. 그때 5개 서클이 해체 지시에 불응해 비공식적으로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그 때문에 성균관대에 5대 이념서클이 있다는 세평이 생겨났죠. 졸업 때까지 학과 독서회와 서클 활동을 계속했어요. 4학년 때에는 후배들과 팀을 짜서 한 달간 공장 활동을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제 자취방에 경찰들이 들이닥쳤어요. 동대문경찰서에 끌려가 며칠 동안 구타당하면서 자술서를 썼죠. 요행히 기소유예로 풀려났지만 이 일을 계기로 농촌문제연구회는 해산됐어요. 대학 재학 중에는 야학 활동도 했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둔 1981년 그는 고뇌에 빠졌다. 소년기에 가진 학자가 되겠다는 열망과 엄혹한 시대 상황으로 인해 주어진 도덕적 책무 사이에서 갈등했다. 같은해 5월 27일 서울대 중앙도서관 6층에서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세 번 외친 후 투신한 김태훈이 고등학교 친구였다. 독서회와 서클, 야학생활을 같이하던 대학 동기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시위 주동에 나섰다. 오랜 불면의 밤을 보낸 끝에 그는 운동가의 삶이 아닌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다. 그는 “소년기부터 가졌던 꿈이 컸고, 혁명가의 길에 나서는 일이 두려웠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1983년 9월 결성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정책실 산하 <민주화의 길> 편집부 일원이었더군요.

“14개월간의 방위 복무를 마치고 박사과정을 밟던 1986년에 <민주화의 길> 편집부에 참여했어요. 1987년 12월 대통령선거 국면 때까지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연구활동에 전념했고요.”

-1993년 박사학위 논문 <고려공산당 연구>를 발표했어요. 한국 사회주의 연구를 선택한 특별한 사유가 있습니까.

“사회주의운동사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한국 근대사에서 혁명운동을 이끌어왔던 주요 정치사상은 동학, 기독교, 사회주의 세 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1919년 3·1운동 이후 한국 독립운동은 사회주의가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니 사회주의를 중시할 수밖에 없죠.”

1994~1995년 모스크바 1년반 머물며
구 코민테른 문서보관소 자료 접하고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 등 잇단 출간

1991년 12월 소련의 붕괴는 한국 사회주의 연구에 전환점이 됐다. 소련에 보관 중이던 한국 관련 자료들이 대거 공개됐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였다. 사회주의가 무너진 뒤에야 사회주의 연구의 가능성이 열렸다. 임 교수는 “어느 날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세미나가 있어서 갔는데, 한쪽 구석에 러시아어 자료가 무더기로 쌓여 있는 것을 봤다”며 이렇게 말했다.

“1917년부터 1970년까지 소련 정기간행물에 수록된 한국 관련 기사를 출력해서 모아뒀더라고요. 대우문화재단 프로젝트 성과였어요. 그동안 접할 수 없었던 놀라운 정보들이었어요.”

-깜짝 놀랐겠군요.

“역사 연구에서 제일 중요한 게 사료(史料)예요. 역사연구자들이 의존하는 일제시대 사료는 두 종류죠. 하나는 통치문서예요. 일본 외무성의 영사관기록이나, 조선총독부 고등경찰 기록 같은 거예요. 그러나 통치자의 시각으로 작성된 것이라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항일운동 당사자들이 만든 자료가 굉장히 중요해요. 양측의 내용을 비교해야 하죠.”

-억압당하는 쪽이니까 당사자 기록은 남아 있기 어렵겠죠.

“맞아요. 그래도 강덕상, 박경식, 김정명 등 재일조선인 연구자들이 일본에서 펴낸 간행물 덕분에 어느 정도 접할 수 있었죠. 그런데 소련에서 보관 중인 생생한 당사자 기록들을 접하게 됐으니 신천지였죠(웃음).”

-1994년과 1995년 구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문서보관소에 직접 다녀왔다지요.

“사학과 후배인 전현수 교수(경북대 사학과)가 당시 모스크바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어요. 그가 구 코민테른 문서보관소가 외국인 학자에게 개방됐다는 소식을 알려왔어요. 한국은 최근에서야 국가기록원 시스템이 만들어졌잖아요.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오래전부터 아카이브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었어요. 코민테른 문서는 구 소련 시절에는 1급 비밀이었어요.”

-그런 1급 비밀들을 왜 공개한 건가요.

“소련 붕괴 후 정부 지원이 끊기면서 문서보관소가 재정난에 시달렸기 때문이에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외국인 학자에게 자료의 열람과 복사를 허용한 거죠. 복사비가 상당히 비싸 아직도 기억해요. 당시 한 장당 1달러20센트를 받았으니까요. 당시 한국 돈으로 장당 1000원이었어요.”

-속히 달려가 직접 확인하고 싶었겠군요.

“전현수 교수의 도움을 받아 우선 500장 분량의 자료를 인편으로 전달받았어요. 그것과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얻은 구 소련 정기간행물에 수록된 한국 관련 기사, 그리고 일본에서 발간된 간행물을 토대로 박사학위논문을 완성했죠. 그런데 제가 직접 코민테른 자료를 들여다보고 싶다는 열망이 솟구쳤어요. 그래서 1994년 봄에 6개월, 1995년 9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모스크바로 날아갔습니다. 두 번째 갔을 때는 모스크바대학 어학원에 수강생 등록을 했죠. 어학원과 문서보관소를 매일 오갔어요.”

-문서보관소에 직접 가보니 어떻던가요.

“세상에! 놀라워요. 경찰 기록을 보면서 어슴푸레 짐작만 했던 사건들과 그에 관련된 기록이 거기 딱, 있는 거예요. 날마다 충격과 환희를 느꼈어요. 전대미문의 미개척 자료군을 목도한다는 게 역사학자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행운을 맛본 거예요(웃음).”

-체류비도, 복사비도 만만찮게 들었겠습니다.

“제 아내(강선미씨)가 고생이 많았죠(웃음). 학교 2년 후배로 농촌문제연구회에서 만나 1987년 결혼했는데, 제가 2004년 마흔다섯 되던 해에 성균관대 교수로 임용되기 전까지 강사로 17년간 떠돌이 생활을 했거든요. 그동안 아내가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다시피했어요. 일월서각, 동녘 등 출판사에서 오랫동안 일하다가 나중에는 독립해 표지디자인 회사를 운영했어요. 생활미술과 출신이거든요. 제가 러시아에 갈 때 1000만원 들고 갔어요. 그 돈은 어찌어찌 스스로 마련했는데 생활비나 양육비는 온전히 아내 몫이었죠. 아내는 3년 전 신장 이식수술을 받았어요. 다행히 지금은 건강이 괜찮습니다.”

임경석 교수가 집필한 단행본 사진 크게보기

임경석 교수가 집필한 단행본

“코민테른 ‘조선공산당’ 첫장이 3·1운동
한국 사회주의는 3·1운동서 시작한 것
김립 억울한 죽음…유공자 재심해야”

그는 10년 전 발표한 박사논문을 대거 수정·보완해 2003년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을 출간했다. 2004년 <이정 박헌영 일대기>, 2009년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 2012년 <모스크바 밀사>, 그리고 2022년 9월 <독립운동열전>을 펴냈다. 구 코민테른 문서보관소에서 복사해온 방대한 자료에 대한 분석이 바탕이 됐음은 물론이다.

-박사논문 발표부터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 출간까지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된 이유는 뭔가요.

“문서보관소에서 너무 많은 자료를 얻게 됐기 때문이에요. 항일투쟁 당사자들이 국제공산당과 교류하며 생산한 문서의 양이 굉장히 많았거든요. 또 각 시기, 각 사건의 비밀결사에 참가한 사람들의 입장과 논리, 욕망 이런 것들도 잘 드러나 있고요. 이전에 보던 자료에서 추출한 역사상과는 완전히 다른 역사상이 떠올랐어요. 문서가 아주 많았습니다. 그걸 보느라 10년이 걸렸습니다.”

-대표적 사례는 어떤 건가요.

“코민테른 문서보관소의 ‘조선공산당 폰드(문서군)’의 첫 번째 파일에 어떤 정보가 있을 것 같습니까? 3·1운동 기록이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아주 감각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죠. 한국 사회주의는 3·1운동에서 시작한 것임을요.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을 지낸 김립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 공방도 깨끗이 정리할 수 있었어요. 김립 암살을 지시한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구는 <백범일지>에 모스크바 자금 횡령범을 처벌했다고 썼지요. 그 때문에 김립은 지금도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도 임시정부 공금 횡령범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 관련한 진실을 문서보관소 자료를 통해 알게 됐다?

“그렇죠. 모스크바 자금의 관할권은 임시정부가 아니라 한인사회당과 그 후계 단체인 고려공산당에 속해 있었음을 알려주는 자료들을 발견했으니까요. 독립운동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로, 임시정부를 지탱한 3대 정치세력 중 하나인 고려공산당 소속이었던 김립이 임시정부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쓴 겁니다.”

-김립의 공식적인 명예회복이 이후 이뤄졌습니까.

“아뇨.”

- 왜죠.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포상을 위한 공적심사위원회가 있어요. 거기서 다뤄야 해요. 적극적으로 나서서 김립 유공자 여부를 재심해야 합니다. 모스크바 자금의 성격과 그 관리주체가 누군지를 확인하는 공적인 과정을 거쳐서 김립에 대한 명예회복 작업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임경석 교수는 1994년과 1995년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구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문서보관서에서  “날마다 충격과 환희를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외무성의 영사관기록이나, 조선총독부 고등경찰 기록 등을 보면서 어슴푸레 짐작만 했던 사건들과 그에 관련된 (항일운동 당사자) 기록이 거기 딱, 있었다”고 했다.  / 강윤중 기자 사진 크게보기

임경석 교수는 1994년과 1995년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구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문서보관서에서 “날마다 충격과 환희를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외무성의 영사관기록이나, 조선총독부 고등경찰 기록 등을 보면서 어슴푸레 짐작만 했던 사건들과 그에 관련된 (항일운동 당사자) 기록이 거기 딱, 있었다”고 했다. / 강윤중 기자

“독립운동 영웅 중심 연구 방식 대신
배신·고통 등 곡절도 직시하게 해야
사회주의자 서훈 관련 시스템 바뀌길”

임 교수의 연구 및 저술활동을 통해 새롭게 발굴된 독립운동 사건의 숨겨진 진실이 적잖다.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의 앞잡이가 된 엄인섭의 밀고와 그로 인해 실패로 돌아간 ‘15만원 탈취 사건’의 내막, 1922년 3월 28일 일본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황포탄 의거’ 참가자들의 유언, 광주학생운동을 전 조선학생운동으로 확대시킨 장석천 이야기, ‘송하살인사건’의 진실, 김철수와 김마리아의 이뤄지지 않은 애틋한 사랑 등. 뿐만 아니다. 그동안 묻혀 있던 여러 독립운동가의 이름과 행적도 새롭게 알렸다. 채그리고리, 박길양, 홍범도의 아내 이씨부인, 김창숙의 둘째아들 김찬기, 근우회의 책사 박신우, 사회주의를 수용한 유교지식인 김규열, 동지들 사이에서 ‘홍도’로 불린 홍진의 등이다.

-<독립운동열전>에 기술한,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하며 동지들을 혹독한 고문과 죽음으로 몰아넣은 엄인섭과 오현주(애국부인회) 등의 변절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엄인섭은 2000년 이전까지는 엄인섭 장군으로 불릴 만큼 칭송받았어요. 국사편찬위원회가 <불령단 관계 잡건>(不逞團關係雜件)이라는 일본 영사관 기록을 공개하기 전까지는 역사학계에서도 그의 정체를 잘 몰랐거든요. 그 이후에야 비로소 정체가 알려졌어요. 오현주는 밀고 대가로 큰 돈까지 챙겼지만 해방 후 반민특위 처벌도 피하고 천수를 누렸어요. 그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 여전히 많습니다. 역사에 정의가 있는 건지 묻고 싶죠.”

-독립운동 내부의 배신과 변절, 혹은 당파싸움에 의한 무고한 죽음 등을 목도하며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독립운동이 부조(浮彫)적으로 연구되는 경향이 있어요. 영웅 중심의 현창(顯彰) 방식 말입니다. 특히 정부와 공공기관이 수행한 연구성과에 그런 경우가 도드라집니다. 저는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아요. 독립운동사에는 형용하기 어려운 수많은 곡절이 있습니다. 독립운동 기술은 그것을 직시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미처 몰랐던 배신이라던가, 고통이라던가 이런 것을 같이 보여주는 게 필요하죠. 밀정 이야기도 마찬가지고요.”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남는 한국 사회주의 혁명가는 누구인가요.

“윤자영이 참 애틋해요. 식민지 조선이 낳은 걸출한 혁명가 중 한 명으로 자신을 헌신해 항일투쟁을 전개한 인물인데 스탈린의 정치적 대숙청 때 일본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불명예스럽게 생을 마감했잖아요. 그리고 그대로 잊혀가고 있죠. 독립운동가 중에는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해방 후 정부 기금으로 처음 간행된 <독립운동사>(전10권, 1970~1971)는 물론이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사자료>(전43권, 1970~2007),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전70권, 1986~2007)에서도 사회주의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했지요. 정부기관의 독립유공자 선정에서도 철저히 배제돼왔고요.

“1987년 이후에 일부 개선된 것은 인정해요. 그러나 대단히 제한적이죠. 해방 후까지 사회주의운동을 계속한 독립운동가는 여전히 독립운동가 서훈을 인정하지 않거나 등급을 깎는 현실이 계속되고 있으니까요. 전형적 인물이 김원봉이에요. 일본이 가장 미워했던 의열단 단장인데 월북했다는 이유로 서훈을 안 해주잖아요. 광주학생운동을 이끈 장재성도 마찬가지죠.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였어요. 해방 이후 광주형무소 복역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7월 처형당했어요. 불법적인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됐지요. 불법적으로 처형당한 것도 억울한데, 그걸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도 안 해주고 있습니다. 서훈과 관련한 정부의 이런 불합리한 시스템은 하루빨리 바뀌어야 해요.”

임 교수에게 ‘과거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역사는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갖도록 돕고, 공동체가 장래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효용이 있다”면서도 “역사를 통해서 교훈을 얻기란 쉽지 않다”고 답했다. 이유는 역사를 다 알기가 어렵기 때문이란다. 그는 “역사 속 미지의 영역이 너무나 넓고 깊기 때문에 인간은 역사를 다 아는 것처럼 자임하는 것을 삼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주연 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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