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화원-승자만 살아남는 ‘병맛’ 여직원 격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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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청순미나 이지적인 캐릭터로 알려진 인물들이 양아치 어투를 쓰며 망가진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의 스토리 전개에서 <지금부터 우리는>, <크로우즈> 같은 학원폭력만화를 끊임없이 의식하며 차별화를 시도한다는 것이다.

제목 지옥의 화원(地獄の花園)

제작연도 2021

제작국 일본

상영시간 102분

장르 오피스 코믹 액션

감독 세키 가즈아키

출연 나가노 메이, 히로세 아리스, 나나오, 카와에이 리나, 오오시마 미유키, 카츠무라 마사노부, 마츠오 사토루, 마루야마 토모미, 엔도 켄이치, 코이케 에이코

개봉 2022년 12월 15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수입/배급 찬란

공동 배급 ㈜하이스트레인저

찬란

찬란

물론 그럴 리 없다. 사무실 여직원의 문화가 마치 1970~1980년대 한국의 남자 고등학교 문화처럼 싸움 실력에 따라 서열이 결정되고 지배-복종 관계로 이어진다는 설정. 싸움의 상대방이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을 던질 때마다 반복해 되풀이되는 답변인 ‘오에루’가 필자는 알지 못하는 일본어 단어가 아니라 영어 약자 ‘OL’임을 깨달은 건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나오코(나가노 메이 분)는 평범한 회사생활을 동경했다. 구내식당에서 동료 직원들과 밥을 먹으면서도 가끔은 비싼 식당에서 외식도 하고, 백화점에서 쇼핑도 하는 그런 직장생활. 영화는 “영화계나 정치, 학교와 같은 집단엔 파벌이 존재한다”는 나오코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이어 등장하는 직원들 사이의 파벌싸움. 말 그대로 ‘싸움’이다. 몸으로 치고받는. 나오코의 회사에는 크게 3개의 파벌이 존재한다. ‘광견 사타케파’와 ‘악마 슈리파’ 그리고 ‘대괴수 칸다파’다. 세 파벌은 격돌 끝에 최종적으로 악마 슈리파를 이끄는 안도 슈리(나나오 분)가 승리를 거둔다. 파벌 다툼은 서열이 정리되면서 끝나는가 싶더니 난데없이 경력으로 들어온 여직원 하나가 세 파벌의 수장들을 물리치고 서열 1위에 등극한다. 호조 란(히로세 아리스 분. 오늘날 일본 연예계의 정상급 배우인 히로세 스즈의 언니)이다.

양아치 여사원들의 ‘그들만의 리그’

나오코는 이 파벌 다툼에 끼진 않는다. 싸움 실력으로 서열을 정하는 파벌 다툼은 나오코와 같은 평범한 회사원들이 아닌 ‘자기들끼리의’ 저쪽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우연한 계기로 나오코와 회사의 서열 1위가 된 호조 란이 절친이 된다. ‘혜성같이 나타난 직원이 기존의 파벌을 평정했다’는 소문이 그쪽 세계에 퍼지면서 다른 회사의 ‘양아치 여직원’들이 호조 란을 찾아 결투를 신청한다. 나오코는 그들 세계의 일은 모르는 척 눈을 감아준다. 그중 가장 악질적인 톰슨사의 ‘양아치 여직원’들이 호조 란의 절친 나오코를 인질로 납치하면서 영화는 반전을 맞이한다.

이렇게 요약해 놓고 보니 1970년대나 1980년대 일본 야쿠자영화 스토리처럼 돼버렸지만, 영화는 코미디 액션물을 지향한다. 실제 그런 회사생활이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이들 양아치 여직원들은 마치 1970~1980년대 일본의 폭주족이나 불량청소년들이 호랑이 무늬가 그려진 가운 같은 걸 입었던 것처럼 ‘천수관음(千手觀音)’, ‘극악비도(極惡非道)’와 같은 한자가 수놓인 단복 같은 걸 입는다. 나오코 쪽의 슈리가 하고 있는 레게 파마머리도 불량함의 상징이다. 톰슨이라는 회사의 양아치 여직원들은 누가 봐도 중장년 남자들인데 자기들끼리 ‘7색의 주먹을 가진 여자’라느니 ‘시모노세키의 참복어’니 하고 부르며 불량한 여자인 양 행세한다.

서브컬처 장르의 인용과 확장

코미디 액션물이라고 하지만 한국적 맥락에서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장르 명칭이 있다. 병맛. 일본 쪽 자료를 훑어보니 영화에 나오는 히로인들 대부분 일본에서 꽤 알려진 배우들이다. 청순미나 이지적인 캐릭터로 알려진 인물들이 양아치 어투-뭐, 실제는 어떨지 모르나 일본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보면 조폭이나 불량서클에 가담한 여성 특유의 말투가 있다-를 쓰며 망가진다. 당장 ‘광견 사타케 시오리’를 연기하는 카와에이 리나는 일본의 대표적 아이돌그룹 AKB48의 1기 멤버로 인스타그램 같은 걸 검색해보면 케이크나 커피, 강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는 그냥 유명 연예인이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의 스토리 전개에서 다른 서브컬처-일본 학원폭력만화(<지금부터 우리는>이나 <크로우즈> 같은) 장르를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차별화를 시도한다는 점이다. 모두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만 결국 승자와 패자는 나뉘게 마련이며 이 직원들의 약육강식 세계에서 승자는 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영화의 중간중간이나 엔딩에서 남성캐릭터의 사용, 커피 심부름이나 복사, 서류정리에서 기본기를 닦을 수 있다는 설정 등에서 일본사회 특유의 보수성 내지는 가부장성이 엿보인다. 돌이켜보면 코미디라는 장르 자체가 위계와 차별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성립되는 장르인지라, 어떤 이들에게는 영화가 깔고 있는 웃음코드가 불편할 수도 있다.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넷팩상을 수상했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단어, OL

찬란

찬란


OLs, 그러니까 사무실 여직원(Office Ladys)이라는 말은 흔히 ‘재플리시’라고 불리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영어 단어’로 실제 영어권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단어다. 와이셔츠, 비닐하우스, 샌드백, 리어카, 컨닝과 같은 단어가 대표적이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이 표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서 등장했다. 처음에는 BGs(Business Girls)라는 표현을 사용하다가 영어권에서 비슷한 표현인 B-girls가 Bar girl, 그러니까 ‘술집여자’를 뜻한다는 영어사용자들의 지적에 따라 일본 여성주간지인 ‘여성주간’이 대대적으로 변경캠페인을 벌여 1963년 내놓은 대체 표현이다.

대부분 고졸 여성 취업자들을 지칭하는 OL의 주업무는 종신고용직 남성으로 이뤄진 일본 사무직 직장의 업무보조다. 커피 타기, 타이핑, 담배 심부름 등. 흔히 ‘핑크칼라’로 분류되는 돌봄노동 범주에 해당하는 일들이다. ‘그런 일들은 그냥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 아님?’이라고 생각할 만큼 다른 나라의 직장문화와는 구별되는 일본 특유의 문화다. 위키피디아가 인용하는 연구에 따르면 과거 고도성장기 OL의 규모는 상당했다. 1980년대 중반 이뤄진 조사에서 전체 여성 일자리의 3분의 1가량을 OL이 차지했다. 우리나라처럼 남성 직장인뿐 아니라 OL의 경우도 입사를 기준으로 동기를 구분하는 기수 문화나 선후배 문화가 작동한 모양인데, 1980년대 후반부터 대학을 졸업한 전문직 여성들이 대거 직장에 들어오면서 여러 직장 내 문화 문제가 발생한 듯싶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일본사회 특유의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직장문화가 여전하다는 지적이 많다. 경력단절로 인한 임금 격차 문제나 직장 내 성적 괴롭힘 등이 그나마 이슈화된 것도 최근 일이라고 한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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