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A도 없는 행정안전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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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워치의 지난해 미국 911 광고가 기억에 남는다. 교통사고로, 농장에서, 바다에서 각각 사고를 당한 이들이 워치로 911에 연결돼 결국 구조되는 실제 녹취 내용이었다. 이 광고가 이상하게 마음에서 떠나질 않는다. 해피엔딩 때문이다.

애플워치 광고 캡처 / 유튜브

애플워치 광고 캡처 / 유튜브

접근법이 효과적이었는지 올해 애플의 마케팅은 유독 구난에 초점을 뒀다. 아이폰은 오지에서도 위성통신으로 도움을 요청한다. GPS와 소음, 특수한 가속도 센서를 활용해 날카롭고 짧은 충격도 감지할 수 있다. 기계학습으로 교통사고 등을 인식, 정신을 잃어도 위치 정보와 함께 911을 부른다.

민간의 어떠한 혁신도 그 하부를 지탱하는 정부의 역할이 기능하지 않으면 무의미해진다. 특히 행정안전은 말 그대로 생과 사를 가르는 운영체제다. 지난여름 서울 관악구의 반지하 침수 사고는 119 신고 접수 후 ‘통한의 151분’을 흘려보낸 비극이었다.

전쟁이나 자연재해로 동시다발적 구조신호가 발생할 때 이를 받아줄 시스템이 붕괴하는 공포는 현실이 됐다. 지난 10월 29일 이태원의 밤. 미사일이 날아온 것도, 지진이 난 것도 아닌데 수도 한복판에서 정부의 역할은 먹통 상태였다.

2011년, 우면산 산사태는 서울 남부순환도로 8차선을 완전히 뒤엎었다. 직관을 믿고 도로를 차단한 한 경찰관의 용기 덕분에 수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 영웅적 기지에 감동했지만, 왜 그러한 판단이 톱다운으로 내려오지는 않았는지 궁금했다. 무엇의 부재였던 걸까.

현장의 의인이라는 우연은 복제되기도, 반복되기도 힘들다. 다들 현장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했을 수 있다. 더 나서기에는 책무가 아닐 수도 있고 섣불리 나섰다가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간다면 욕만 먹을 수도 있다. 결국 차이를 만드는 건 시스템과 기준이다.

기업은 고객이 기대할 수 있는 서비스 수준을 기술한 문서인 SLA(Service-Level Agreement·서비스 수준 협약)라는 걸 마련하고 약속한다. 119에 적용한다면 신고 후 (평균값인) 10분 내로 구출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질 게 눈에 보인다면 시스템의 SLA가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해 현장에서 즉각 비상사태를 선언해 도로를 막고 라인을 치는 등의 권한을 발휘하는 식이다.

최신 기술 혁신 덕에 중앙은 현장보다 더 많은 정보를 지니고 있다. 군중 밀집도를 알리는 도시 데이터를 시는 이미 운영하고 있다. 하다못해 중국 못지않게 촘촘하게 박힌 CCTV로 내려다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 시간, 그 공간의 생명선은 끊겨 있었다. 최악의 경우 정부는 자신의 부재를, 즉 장애 상황을 알릴 책임도 있다. 재난 문자든, 통신이든, 방송이든, 확성기든, 어떻게든 ‘지금은 10분 내 구난이 불가능한’ 정부 먹통 상황임을 알렸더라면 다른 판단을 하는 사람들이 생겼을 터다. 지난여름에도 지역 주민이 반지하에 갇혀 있음을 누구라도 알았다면 장비를 찾아 팔 걷고 나섰을지도 모른다.

이중화하지 않는 인터넷 업자는 빈축을 산다. SLA도 없는 행정시스템은 세상을 잃게 만든다. 공문에는 ‘사망자 156명 발생’이라고 건조하게 적혔겠지만 그 수만큼의 우주도, 세계도 무너져 내렸음을 알아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김국현 IT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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