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정책 대원칙이 ‘전임 정부 뒤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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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적 안목 없이 대립-관여 오락가락

놀랍게도 포용정책 ‘뿌리’는 보수정부

“국민 여러분, 늘 ‘우리 민족끼리’를 주장하던 북한이 미사일을 연달아 쏘아댔습니다. 북한은 지난 4월, 장거리 로켓을 발사한 이후 긴장의 강도를 점점 높여왔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우리 국민의 안전은 철통같이 지키겠습니다. 정부는 완벽한 안보태세로 발생 가능한 모든 상황에 대해 빈틈없는 대응책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북한이 미국의 핵추진 항공모함인 ‘로널드 레이건호’가 동원된 한미 연합훈련에 대응해 포병과 비행대들의 합동타격훈련을 실시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타격훈련을 지켜보는 모습을 지난 10월 10일 노동신문이 보도했다. / 평양 노동신문=뉴스1

북한이 미국의 핵추진 항공모함인 ‘로널드 레이건호’가 동원된 한미 연합훈련에 대응해 포병과 비행대들의 합동타격훈련을 실시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타격훈련을 지켜보는 모습을 지난 10월 10일 노동신문이 보도했다. / 평양 노동신문=뉴스1

최악으로 치닫는 남북관계를 설명하는 대통령의 ‘발언’이다. 국민의 안전을 ‘철통’같이 지키고, 빈틈없는 ‘대응’을 마련했다는 언급에서 군 통수권자의 비장함이 느껴진다. 국민이 안도감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발언의 화자는 윤석열 대통령이 아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다. 해당 발언은 2009년 6월 1일, 북한의 2차 핵실험 직후 나왔다. ‘발생 가능한 모든 상황에 대한 빈틈없는 대응책’을 강조했지만, 채 1년이 안 된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사건이 발생했다. 같은해 11월에는 연평도 포격사건도 터졌다.

적대적인 냉전구도가 해체된 1990년대 이후, 남북관계는 되풀이되는 시간 속에 갇힌 모양새다. 대북정책은 ‘대립’과 ‘관여’ 사이를 주기적으로 오간다. 구조적으로 보면 냉전시대 ‘제로섬 게임’ 관계였던 남북이 냉전 해체 후 ‘적응과 수용’의 관계로 전환되는 형국이다. 이 기간에 한국은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정권교체를 시작했고, 정책 전환도 활발히 이뤄졌다. 이는 안보도 각 진영의 정치적 ‘판단’ 영역으로 편입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에서 불거진 남북 간 위기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진 진보정권 10년 직후 발생했다. 북한에 대한 ‘관여’ 정책을 추진한 진보정권에 대한 반발은 상호주의를 강조한 ‘비핵·개방 3000’을 추진하는 동력이 됐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 고조됐던 위기는 2017년 절정을 맞았다. 이는 남북협력을 표방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완화됐다.

정권이 좌우를 오가는 동안 정부 간 상호부정은 날로 강화됐다. 전임 정부의 대북정책 뒤집기는 집권 후 필수과제가 됐다.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마다 대북정책이 널뛰기했지만, 정치권은 살뜰히 이득을 챙겼다. 한쪽은 안보에 대한 ‘국민적 불안’을, 한쪽은 통일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적절히 이용했다. 한국 정부가 정책적 일관성을 잃어가는 동안 북핵은 일관되게 고도화됐다.

한국은 ‘정권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원칙’, ‘10년, 100년의 미래가 반영된 대북정책’을 가져보지 못했다. 국가의 명운을 걸고 진행한다는 정책 뒤집기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시작됐다. 집권 6개월여를 맞은 윤석열 정부의 색채가 두드러지는 곳 역시 대북정책이다. 북한에 대한 억제정책, 전임 정부 대북정책 관여자들에 대한 수사가 빠르게 진행 중이다. 동시에 잠시 잊었던 북한발 위협이 재점화됐다. ‘방사포’, ‘탄도미사일’ 발사가 이어지고, 북한의 7차 ‘핵실험’ 역시 코앞으로 다가왔다.

원칙 없는 대북정책, 따지고 보면 ‘자기부정’ 한국의 대북정책은 두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대북온건(포용) 정책이고, 또 다른 하나는 대북강경(반포용) 정책이다. 절충은 없다. 이는 좌우 정권의 정책의지를 반영한 결과물이자 지지기반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포용정책의 뿌리가 진보 쪽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포용정책의 정통성은 보수정당에서 찾을 수 있다.

남북관계에서 정책적 선택이 가능해진 시점은 냉전이 해체된 1990년대 이후다. 냉전시대를 표상했던 한반도는 기존 질서의 해체 역시 가장 앞장서 반영했다. 1988년 노태우 정부는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선언)’을 발표하며 “남과 북은 분단의 벽을 헐고 모든 부문에 걸쳐 교류를 실현할 것”이라고 밝혔다. ‘봉쇄’에서 ‘관여’로의 대북정책 기조 전환이었다.

북한 포병과 비행대들의 합동타격훈련 모습. 지난 10월 10일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해당 훈련이 10월 6일과 8일에 진행되었다고 전했다. / 평양 노동신문=뉴스1

북한 포병과 비행대들의 합동타격훈련 모습. 지난 10월 10일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해당 훈련이 10월 6일과 8일에 진행되었다고 전했다. / 평양 노동신문=뉴스1

문제는 노태우 정부 이후 집권한 김영삼 정부가 정책기조를 계승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 전 대통령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남북 간 상호주의’를 대북정책의 원칙으로 세웠다. “교류도 상호 호혜적 교류가 돼야 할 것이다. 남에서 10명이 북으로 가면 북에서도 10명이 오는 등 남북이 자유스럽게 오가야 한다”는 것이 김 전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큰 걸림돌은 노태우·김영삼 정부 시기에 시작된 북핵위기였다. 특히 제1차 북핵위기는 정부 정책결정 과정의 난맥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를 한국 정치권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북한 영변 핵시설의 존재가 국제사회에 알려진 건 1989년이었다. 프랑스 위성을 통해 영변 핵시설 사진이 공개되며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핵사찰 협의를 시작했다. 1992년 북한과 합의한 IAEA는 핵사찰을 시작했지만, 북한이 신고한 플루토늄의 양이 IAEA 추정치와 일치하지 않으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급기야 북한은 1993년 3월 핵확산 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한다.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자 다급해진 쪽은 미국이었다. 1993년 6월 1단계 북미 고위급회담을 시작했다. 북한의 NPT 탈퇴를 유보시키고 미국이 핵불사용 약속을 해주는 선에서 1단계 회담을 마무리했다. 1993년 7월 2단계 북미 고위급회담까지 마무리되며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김영삼 정부가 판을 흔든다. 1993년 11월 한미정상회담이 열렸다. 당시 미국은 북한과의 포괄협상 혹은 일괄타결을 방침으로 정했고, 북한 역시 수용할 의사를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이를 반대했다. 한국이 배제된 채 진행되는 북미 간 협상에 동의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면에는 정치적 판단이 있었다. 정종욱 당시 외교안보비서관은 회고록에서 “이분(김 전 대통령)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신문에서 우리는 빠지고 미국하고 북한만 나온다고 공격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결국 북핵위기는 1994년 10월에서야 제네바 합의를 도출하며 마무리된다. 결과적으로 이마저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박용수의 논문 ‘제1차 북핵위기 대응과정에서 나타난 김영삼 대통령의 정책관리유형’은 “김영삼 대통령은 제네바 합의를 기회의 창으로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이는 대체로 그의 보수적 인식과 언론에 대한 민감성과 관련되는 것이며 결국 그의 임기 동안 미국과 북한 간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북핵문제 해소 혹은 관리 가능성은 줄어들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후 집권한 김대중 정부 역시 정책기조를 뒤집었다. 남북정상회담을 열었고, 관광을 포함한 남북교류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두차례의 서해교전과 미사일 발사 등의 문제가 가려졌다. 이는 남남갈등을 표면화하는 시발점이 됐다. 뒤를 이은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의 정책을 계승·강화했다. 북한주민의 인권문제 외면, 대북 인도적 지원 과정에서 투명성 문제 등이 새롭게 부각했다. 노무현 정부 이하 진보정부는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을 계승·강화하며 정책을 ‘교조화’한다는 비판을 초래했다.

진보정권이 남북협력을 선점하며 보수정부는 반대 방향으로 질주했다.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신뢰프로세스는 사실상 대립구도를 강화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반발로 집권한 윤석열 정부 역시 그 연장선에 섰다. 이제는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상황 변화에 맞는 정책을 선택하는 것인지, 전임 정부와 거리 두기부터 하려는 것인지 알기가 어렵게 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월 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국가위기관리센터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에서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 현황 및 대응방안에 대해 보고받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월 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국가위기관리센터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에서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 현황 및 대응방안에 대해 보고받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

같은 정책이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나 “ 북한이 순항미사일에 탄도미사일로 무차별 도발하고 있다. 북의 이런 도발에 대해 나름 빈틈없이 최선을 다해 대비태세를 구축해나가고 있다.”

윤 대통령이 지난 10월 14일 용산 대통령실로 출근하며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명박 정부 당시 남북관계와 유사하게 흘러가는 모양새다. 이날 정부는 ‘대북 독자 제재’ 카드도 꺼냈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과 대북제재 회피에 관여한 개인 15명, 기관 16곳을 제재 명단에 올렸다. 2015년 6월, 박근혜 정부 외교부와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독자적인 대북 금융제재’와 판박이다. 남북교류가 차단된 상황에서 독자 제재가 효용을 발휘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붙는 것까지 유사하다.

박근혜 정부 당시 제재 발표 하루 전까지 홍용표 통일부 장관은 “남북 대화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부 부처 간 정책 혼선이 심각했거나 북한을 향한 발언은 단순한 인사 정도였다는 의미다. 윤석열 정부의 대북정책인 ‘담대한 구상’ 역시 비슷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권영세 통일부 장관은 “(북한과) 대화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북핵 문제를 둘러싼 대북제재만 더욱 부각되는 상황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역사를 사실상 답습하는 모양새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우리의 목표가 북한의 핵을 없애는 것인지, 적대적 관계를 해소하고 평화를 달성하는 것인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며 “비핵화가 적대관계를 해소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현실과 괴리가 큰 완전한 비핵화를 대북정책의 간판으로 달기보다 상호 안전보장, 군축 등의 보다 포괄적 간판을 달고 북한을 끌어내는 시도를 하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역사적으로 사실상 핵을 보유한 것으로 인정받는 국가와 비핵화를 전제로 협상해 성공한 사례는 없다”고 말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대북정책에 연속성이 없다는 점이 (남북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 건 분명하다”며 “특히 좌우를 막론하고 ‘인도주의적 지원’과 ‘인권문제’ 두가지 부문에서는 일관성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진보정부는 인도주의적 지원을 남북관계 개선의 마중물로, 보수정부는 북한의 행동 변화에 따른 보상으로 접근했다. 인권문제에 대해서도 국제사회의 보편적 가치에 맞춰 연속성 있게 문제 제기를 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박 교수는 “(이런 식이라면) 정치권에서 북한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문제 해결에 더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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