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누가 윤리적 인간이 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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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종영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한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우영우는 현금입출금기 특허 재판에서 의뢰인 측 증인의 거짓말로 재판에서 이긴다. 얼마 후 상대편 기업 대표로부터 편지를 받고, ‘권모술수’ 권민우와 언쟁을 벌인다. 우영우는 진실과 거짓이 무엇인지 질문하지만, 권민우는 어처구니없다는 식으로 반응한다. 권민우에게 중요한 것은 재판에서 이겼다는 사실뿐이다. 이 장면은 꽤 흥미롭다. 만일 우영우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천재 변호사가 아니라 평범한 비장애인 신입 변호사였다면, 그는 이른바 고구마 캐릭터로 보이지 않았을까? 로펌이라는 조직의 생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무지하고 순진한 소리만 늘어놓으니 말이다. 그런데 왜 시청자는 권민우가 아니라 우영우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것일까?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한 장면 / ENA 홈페이지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한 장면 / ENA 홈페이지

윤리적 인간 우영우

우영우가 ‘이상한 변호사’인 이유는 그의 장애가 아니라 그가 윤리적 인간이라는 사실에 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변호사 중 오로지 우영우만이 옳고 그름, 정의와 부정의, 진실과 거짓을 따지고, 규범에 어긋나는 행위에 부끄러움과 분노를 느낀다. 드라마 전체에서 그의 장애에 집중하는 에피소드는 초반 몇개뿐이다. 우영우가 던지는 윤리적 질문과 그것을 둘러싼 갈등 구도가 이야기 전체를 이끌고, 인물 간 관계를 규정한다. 변호사 정명석은 장애인 우영우를 보살펴주는 사려 깊은 선배가 아니라 우영우가 주장하는 원칙과 현실적 조건 사이에서 타협점을 모색하는 일종의 전략가다. 태수미와의 관계도 그의 자폐와 별 관련이 없다. 장관 임명을 위해 잘못된 길을 가려는 변호사 태수미와 그걸 저지하려는 변호사 우영우의 대립이 마지막 화(話)의 핵심이다. 그가 우영우의 친모라는 사실은 이 대립 구도의 해소를 위한 부차적 장치일 뿐이다. 권민우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그가 ‘공정에 집착하는 이대남’이어서가 아니라 윤리적 질문을 부정해야 한다는 원칙을 내재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애초에 ‘윤리적 변호사’라는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그래서 권민우의 다른 면모를 보여주려 했던 작가의 시도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 드라마가 판타지인 이유는 서번트 신드롬이라는 설정이 아니라 서울대 수석 천재가 순진할 정도로 도덕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에 있다. 우영우가 자폐인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서울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형 로펌에 들어간 비장애인 천재가 만사에 옳고 그름을 따진다는 것은 결코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다. 시청자를 설득하려면 별도의 설정이 필요하다. 그 인물의 ‘아픈 과거사’ 따위를 추가하는 것이 가장 흔한 방식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전혀 다른 길을 택한다. 천재 자폐인을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시청자는 ‘자폐인=윤리적 인간’이라는 연결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오히려 비윤리적 자폐인을 상상하지 못한다. 거짓말하고 사기 치는 자폐인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겠는가?

드라마 전체를 보면 자폐는 우영우의 삶에 어떤 걸림돌도 되지 않는다. 그는 높은 지적 능력과 학벌, 신뢰할 만한 친구와 조력자, 훌륭한 업무 능력과 직업적 신념을 가졌으며, 심지어 사내 연애도 한다. 그에게 장애가 있다면, 오로지 ‘비윤리적으로 행동할 능력 없음’이라는 장애뿐이다. 정명석의 대사를 빌자면, ‘그냥 보통 변호사’가 당연히 갖추고 있을 만한 능력이 우영우에게는 없다. 그래서 권민우가 보기에 우영우는 뜬금없는 행동을 하는 이상한 변호사일 뿐이다. 여기에 천재 자폐인 변호사라는 설정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있다. 순수하게 윤리적인 인물은 자폐라는 조건하에서야 비로소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부정의가 정상인 세상

정상과 비정상은 윤리적 규범 혹은 통계 수치에 따라 규정될 수 있다. 물론 규범과 수(數)는 분리되지 않는다. 폭력이 규범에서 벗어난 비정상적 행위라면, 그 행위의 수도 줄어야 한다. 만일 폭력적 행위가 통계적으로 다수가 된다면, 정상적 규범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 조직의 비리를 폭로한 내부고발자가 비도덕적인 배신자로 낙인찍히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에서는 무엇이 정상을 규정하는가?

미국식 히어로물의 세상은 중립적이다. 히어로와 빌런의 싸움에 따라 세상은 좋아지거나 나빠진다. 한국의 현실을 다루는 드라마와 영화는 ‘세상이 온통 썩어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폭력, 거짓, 부패, 부정의는 특정 인물의 속성이 아니라 세상을 움직이는 정상적 원리다. 넷플릭스에서 전 세계적 인기를 얻은 한국 드라마 상당수가 이런 세계관에 기초한다. 그것들에 장르명을 붙일 수 있다면, ‘지옥도’가 가장 어울릴 것이다. 이런 종류의 작품에도 윤리적 인물이 등장하지만, 정상과 일반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묘사된다. <오징어게임>에서 유일하게 인간성을 끝까지 지킨 강새벽은 탈북인이고, 그를 살리고 대신 죽은 지영은 성폭력 피해자다. <비밀의 숲> 주인공 황시목은 감정 능력이 제거된 인물이다. 다수가 폭력과 거짓을 일삼고, 그것이 정상적 규범으로 작동하는 지옥도의 세상에서, 윤리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은 소수자, 비정상인, 타자들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세계관은 훨씬 더 밝고 낙관적이지만, 지옥도의 세계관과 전혀 다른 맥락에 속해 있지는 않다. 여성 직원 구조조정 사건에 등장하는 노동 전문 변호사 류재숙을 보자. 우영우가 고심하는 문제는 의뢰인의 이익과 사회정의 사이의 딜레마에서 발생하는데, 류재숙은 그 문제의 간단한 답을 가진 사람이다. 즉 의뢰인의 승리와 사회정의의 실현이 일치하는 사건만 맡으면 된다. 우영우에게는 두개의 길이 있다. 류재숙을 따라 정의로운 세상으로 가거나, 부정의가 정상으로 간주되는 세상에 남는 것이다. 우영우는 두 번째 세상을 택하고, 대형 로펌 한바다에 남는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시청자의 절대다수가 그런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류재숙은 정말로 ‘양쯔강 돌고래’ 같은 인물이다. 그런 변호사가 멸종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많지만, 그처럼 살아가려는 이는 별로 없다.

대부분은 부정의한 세상에 살면서, 정의로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그 불가능한 희망을 다룬다. 이는 오로지 ‘이상한’ 존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거짓과 부정의를 비정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자폐인과 비자폐인의 차이로 대체된다. 바로 여기에 이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쟁점이 있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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