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에 대한 진보의 시각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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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불평등> 펴낸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 인터뷰

“민주당을 혁신한다는 것이 뭐냐, 저는 경제정책 노선의 혁신이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짜로.”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52)의 말이다. <좋은 불평등>. 지난 9월 초 최 소장이 낸 책 제목이다. 불평등인데 ‘좋은 불평등’이라니. 불평등은 나쁜 것이며 해소해야 한다는 건 진보만의 어젠다가 아니다. 2008년 경제위기를 겪고 난 뒤 주류사회와 보수경제학자들도 글로벌차원의 불평등 심화 문제를 주목했다. 최 소장은 좋은/나쁜, 평등/불평등의 2×2의 경우의 수를 제시했다. ‘좋은 평등’이 되면 가장 좋겠지만 ‘나쁜 평등’의 길도 있다. 당위나 윤리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 데이터가 그렇다. 막연한 짐작과 달리 실제 경제 수치가 보여준다. 경제사정이 어려워지면 불평등도 줄어든다. 나쁜 평등 쪽으로 간다. 책은 데이터에 근거해 그동안 진보진영에 광범위하게 공유돼 있던 막연한 통념에 도전한다. 예컨대 불평등은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체제가 도입된 후 심화된 것이 아니다. 데이터가 가르치는 출발점은 그 이전 1994년부터였다. 최 소장의 주장에 따르면 핵심은 1992년 한중수교 이후 본격화된 대(對)중국교역이다. 중(中)숙련·중임금 시장과 노동자가 그 시점부터 몰락했다. 진단부터 틀렸기 때문에 엉뚱한 처방이 나왔고, 그 결과 진보정책과 대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는 주장한다. 근거로 제시한 것이 110여개의 그래프다. 최 소장은 110여개를 추려내기 위해 2200여개의 데이터를 섭렵했다고 말했다.

사진/ 박민규 선임기자

사진/ 박민규 선임기자

최 소장의 활동을 주목한 건 오래전부터다. PC통신 진보논객이던 20여년 전으로 올라간다. 그는 민주노동당을 거쳐 민주당 정책보좌관을 지냈다. 서울시 정책보좌관에 이어 민주당 민주연구원 부원장을 맡았다. <좋은 불평등>은 그의 첫 책이다. “집필에만 1년 반이 걸렸지만 실제로는 쓰다가 이런저런 직책을 맡아 좌초하고 다시 쓰다 좌초하는 일을 겪었기 때문에 5년에 걸친 작업”이었다고 했다. 인터뷰는 지난 9월 7일 경향신문사에서 진행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가 인상적입니다. 집권 기간은 5년이었지만 문재인 정부는 25년짜리 진보정책을 실천한 25년짜리 진보정부였다고 했는데요.

“지난 대선 6개월, 또는 1년 전부터 이번 대선은 최악의 네거티브선거가 될 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왜냐, 포지티브한 어젠다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 이유는 당시 후보였던 윤석열, 이재명 개인의 캐릭터 문제도 부분적으로 있겠지만 25년짜리 진보 어젠다를 다 털었기 때문에 새로운 어젠다가 없을 것이라 예측했던 겁니다. 딱 그대로 된 거죠.”

-지금 와서 복기해보면 문재인 정부의 노동·경제정책은 의외로 ‘강성진보’에 가까웠습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나 소득주도성장이 대표적이죠.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적으로 좌향좌 분위기가 형성됐습니다. 국내적으로는 ‘참여정부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할 거냐’를 두고 활발한 담론이 일었습니다. 정책적 관점에서 평가했을 때 당시 가장 큰 사건은 2010년의 무상급식이었습니다. 무상급식 정책을 계기로 민주당이 왼쪽으로 온 거죠. 저는 그거 잘했다고 생각해요. 순기능이 여전히 더 많았다고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동네가 절제와 균형감각이 없다 보니 왼쪽으로 계속 가는 거죠. 왼쪽 끄트머리까지 간 게 소주성(소득주도성장)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약간 좀 너무 과하게 간 게 기본소득인데 이제는 거의 현금을 나눠주는 현찰박치기까지 간 겁니다. 정리하자면 글로벌 금융위기가 2008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2009년이고 무상급식이 2010년인데 그때의 에너지로 박근혜도 복지국가,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한 거예요. 어떻게 보면 복지국가·경제민주화 1기 정권이 박근혜 정부이고, 2기 정권이 문재인 정부입니다. 시대의 트렌드인 셈인데 건강보험제도 비급여의 급여화, 치매국가책임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는 여전히 긍정적으로 평가를 해야 하고 고용보험에서도 사각지대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고용보험을 확대한 건 문재인 정부가 잘한 거예요. 낮은 수준이지만 전국민고용보험에 대한 기초논의가 들어간 것도 잘한 것으로 봐야지요. 5정도의 성과가 있다면 2018년, 2019년의 최저임금 인상에 이은 일자리 쇼크 등을 고려할 때 부작용도 5정도가 있었다고 봅니다.”

-코로나19 위기가 중간에 끼어서 그런 건가요.

“코로나 시국 때는 거의 경제위기 관리내각에 가까웠지 않습니까. 경제정책으로서의 문재인 정부를 시기 구분하면 2018년, 2019년, 2020년 이후 등 3등분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2018년이 순수한 의미의 임금주도성장이었다면 2019년은 노인주도 성장+연착륙 전략, 나아가 소주성을 포용적 성장으로 바꿔치기한 것이 2019년부터예요. 이 시점 이후부터는 소주성이라는 말을 안 씁니다. 정무적 고려가 있었다고 봐야죠. 어떻게 보면 나름 유능하게 잘한 것으로 봐야 해요.”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부작용에서 온 쇼크를 막아냈다는 점에서는 연착륙에 성공했다?

“그렇죠. 연착륙한 거죠. 다만 중도를 약간 잃고 말았죠. 반대급부로 내부 결집은 할 수 있었지만요. 한꺼번에 후퇴한 것이 아니라 단계를 두고 후퇴한 셈입니다. 최저임금 인상률을 보면 16.4%, 10.9% 그다음에 2.6%입니다. 2.6% 인상을 결정한 것이 2019년 7월이거든요. 세 번째가 코로나19 시기인데 K방역의 성공엔 중국과 트럼프를 싫어하는 영미권 언론의 호평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뉴욕타임스나 월스트리트나 BBC 등이 트럼프도 싫고 중국도 싫으니까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면서도 방역을 잘하고 있는 한국을 띄워주는 그런 국제지형이 작동했다고 봐야죠. 물론 실제로도 잘했고.”

-소주성에 대한 흔한 비판이 ‘마차가 말을 끌 수는 없지 않냐’는 것이었습니다. 동의하나요.

“그 표현을 누가 처음에 쓴 줄 아나요.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을 한 이정우 교수예요. 2017년 대선 당시 칼럼으로 그 표현을 썼는데 유명해진 정책이에요. 최저임금 1만원 정책의 부작용을 책에 썼는데 세가지 잘못된 판단을 한 겁니다. 첫째로 임금불평등과 가구소득불평등이 트레이드오프(상충) 관계인 것을 몰랐습니다. 이 부분을 규명한 것은 약간 제가 경제학적으로 기여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둘째로 누가 진짜 하층인지 몰랐어요. 진짜 하층은 어르신들이었죠. 소주성 정책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저임금 노동자가 누군지도 몰랐던 거예요. 저부가가치이면서 소규모 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저임금 노동자의 실체인데,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하면 그분들더러 일을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소득을 올려주려면 소규모 기업이 중기업으로 클 수 있도록 부가가치 상향을 도와줘야 해요. 인적 자본을 개선하던 기업 덩치를 키워주든. 제가 책에는 안 썼지만, 한계상황에 있는 소상공인을 지원해주는 정책은 저임금 노동자 활성화 정책과 동의어입니다.”

책표지 / 메디치미디어

책표지 / 메디치미디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것이 지금도 노동운동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명제이고 진보는 당위론적으로 그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건 그것대로 또 긴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비정규직이 어디에 제일 많이 있냐면 30인 미만 사업장에 약 75%가 있어요. ‘저부가가치 소규모 기업에 종사하는, 완전경쟁 시장에 가까운 불안정 고용’이 비정규직의 실제 내용이에요.”

-정규직화로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 아닐까요.

“2~3명 일하는 식당 아주머니를 정규직화하는 거랑 대기업 비정규직 중 누가 더 처지가 좋냐고 한다면 당연히 대기업 종사하는 비정규직 처지가 좋죠. 연봉이 더 많으니까. 그래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노동운동계가 사회운동 차원에서 만든, 논리적으로는 성공한 담론이지만 해법은 없는, 따라서 결과적으로 틀린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운동적 수사일지는 모르지만 노선도 수정돼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수정할 필요는 있는데 단기간에 수정되진 않을 겁니다. 사회운동의 논리라는 표현을 했는데 누가 대통령이 돼도 실현할 수 없는 담론을 만들어야지 운동이 지속돼요. 대정부 투쟁을 꾸준히 할 수 있거든요. 미션 임파서블이기 때문에. 한편으로 이해는 갑니다. 오랜 반독재 민주화 과정에서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우리 안에 광범위하게 뿌리내려 있어요. 그걸 바꾸는 것이 진짜 주류교체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 탓하는, 남 탓의 정치, 핑계의 정치는 이게 다시 선명성 중심의 경제정책으로 이어집니다. 많은 사람이 정치 밑에 시민사회가 있고 시민사회 밑에 대중이 있다고 인식하거든요. 진보적 유권자 집단과 진보적 시민사회가 같이 바뀌어야 합니다. 민주당 의원들만 바꾼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불평등에 대한 진보의 기존 시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20년 넘게 천착해왔다고 했는데요.

“진보학계나 진보적 시각을 보면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불평등 문제입니다. 불평등 문제를 줄이는 것이 가장 큰 미션(임무)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 이 책의 실제 결론이 뭐냐면 불평등 담론의 해체입니다. 불평등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며, 불평등은 경제학적으로 격차 그 자체라는 겁니다. 격차는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경제발전 단계와 패턴에 따라 좋은 방향으로도, 나쁜 방향으로도 커질 수 있어요. 마찬가지로 좋은 방향으로도, 나쁜 방향으로도 줄어들 수 있는데, 그건 생각보다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되는 것이 많습니다. 핵심은 ‘불평등은 나쁜 것이고 평등은 좋은 것’과 같은 1차 방정식적인 사고를 버리자는 것이 이 책의 진짜 결론입니다. 저는 결국 핵심은 기업을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라고 봅니다. 종전의 20세기 냉전 좌파 경제학에서는 기업을 착취의 도구, 착취가 일어나는 공간으로 봤는데 혁신의 주체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지난 5년간 국회 신성장학파라는 이름으로 196차례에 걸쳐 스터디를 하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한국 경제사, 산업정책 등 전문가들을 모시고 공부해왔습니다. 지금 민주당 앞에 먼저 놓인 과제는 정신승리를 할 것인지, 유능한 경제정당으로 나갈 것인지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특정 정치인 몇명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 진보정책 생태계의 집단적 과오이기 때문에 그동안의 정책실패에 대해 특정인들에게 책임을 묻는 건 부당해요. 보수보다 유능한 경제정책을 내는 것이 중요하지 보수보다 왼쪽,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국민의힘보다 좌파가 되려고 노력할 게 아니라 국민의힘보다 유능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윤석열 정권의 노선에 맞서 좌파경제학을 하겠다가 아니라 윤석열 정권보다 유능하겠다, 그러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친(親)기업을 하지만 노동도 잘할 수 있다, 친성장을 하지만 복지도 잘할 수 있다, 그런 걸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유능한 경제정당이고 수권정당 아닐까요.”

<글·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사진·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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