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독립에 헌신한 헐버트와 베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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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사업본부가 8월에 발행한 기념우표는 총 128만5000장이었다. 종류는 크게 두가지. 한국의 독립에 헌신한 외국인과 임금이 행차할 때 연주를 담당하던 악대인 ‘취타대’가 소재였다.

우정사업본부가 지난 8월 발행한 기념우표 / 우정사업본부 제공

우정사업본부가 지난 8월 발행한 기념우표 / 우정사업본부 제공

우정사업본부가 ‘대한 독립에 헌신한 외국인’을 주제로 발행한 기념우표는 총 2종이다. 기념우표의 주인공도 2명이다. 최초의 근대식 공립학교인 ‘육영공원’ 교사로 활동한 호머 베잘렐 헐버트와 데일리 크로니클 특파원으로 한국에 온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이 기념우표에 담겼다.

헐버트의 한국명은 ‘헐벗’으로 1891년 한국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했다. 한국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의 창간을 돕고 영문판 편집 업무도 담당했다. 1905년에는 고종 황제의 밀사로 미국을 방문해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호소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파견돼 한일 협약의 부당함과 일본의 침략을 규탄했다.

그는 1949년 숨지기 전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치됐다. 1950년 건국훈장 독립장(당시 태극장)에 추서돼 한국의 독립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2014년에는 한글 관련 공로로 금관문화훈장에도 추서됐다.

특파원이었던 베델의 한국명은 ‘배설’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창간했다. 베델이 창간한 매체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반대 목소리를 냈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주장하고 고종이 을사늑약에 서명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친서도 게재했다. 베델 또한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됐다.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추서돼 공로를 인정받았다.

취타대 기념우표는 총 3종이다. 각 기념우표에 3명씩 등장한다. ‘취타’는 임금이나 고위 관료, 군대 등이 행차할 때 연주하는 음악이다. 취타 연주를 담당하던 악대를 취타대라고 한다. 취타는 이름 그대로 취악기(부는 악기)와 타악기(치는 악기)가 중심으로 취타, 길군악, 길타령, 별우조타령, 군악 등 5곡을 ‘취타 계열의 음악’으로 부른다. 취타는 조선시대 임금이 성문 밖이나 능에 행차할 때, 또는 군대의 행진이나 개선 때 연주하던 ‘대취타’와 혼용하기도 한다.

취타대는 군대가 보유했기 때문에 군대별로 복장이 달랐다. 현재까지 노란 제복을 입은 궁중의 취타대 형태인 ‘내취’가 이어지고 있다. 취타 음악 중에서 대취타는 일반 타악기와 취악기(나발·나각)로 구성된다. 취타, 길군악, 길타령 등을 연주할 때는 피리, 해금, 대금 등의 선율악기를 추가하기도 한다.

기념우표에는 각기 다른 악기나 지휘봉을 들고 있는 장면을 담았다. 군복을 갖춰 입은 무관이 손에 등채를 쥐고 맨 앞에서 취타대를 이끈다. 나발, 나각, 태평소, 장구, 북(용고), 징, 바라, 운라 연주자는 무관 뒤에 있다.

가까운 우체국을 방문하거나 인터넷우체국(www.epost.go.kr)에 신청하면 기념우표를 구매할 수 있다.

<김원진 기자 one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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