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이 모르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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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마가 할퀴고 간 현장을 돕겠다고 여당 지도부가 출동했습니다. 수건을 두르고선 수해 복구에 구슬땀을 흘렸습니다. “솔직히 비 좀 왔으면 좋겠다. 사진 잘 나오게….”(김성원 국민의힘 의원). 동료 의원이 팔을 낚아챘습니다. 옆에 서 있던 권성동 원내대표는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바라봤습니다. ‘내부총질’ 문자 유출 파동으로 곤욕을 치른 게 불과 얼마 전입니다. 주위엔 취재기자와 언론 카메라가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편집실에서]왼손이 모르게 하라

설화(舌禍)라고 할까요. 언론이 보는 앞에서 말을 잘못했다가 탄탄대로를 달리던 정치행보에 급제동이 걸리거나 자료화면으로 남아 두고두고 고생을 치른 정치인이 한둘이 아닙니다. 잊을 만하면 사고가 터지는데도 무슨 행사만 있다 하면 언론을 대동하고 나서는 정치인들의 관행은 변할 줄 모릅니다.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는 말이 있긴 합니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사는 정치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한쪽 눈 질끈 감고 “내 말은 옳고 네 말은 틀렸다”고 강변하고 나서는 것도 반대편 진영의 욕을 먹을지언정 색깔을 분명히 해야 인지도를 끌어올리는 데 유리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일단 유명해져야 당내 경선이든, 공천 과정에서 뭐라도 해볼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의정활동을 잘해도 이름이 유권자들 뇌리에 깊이 박히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그런 점에서 카메라는 양날의 칼입니다. 자기 손이 베일 걸 알면서도 쥐고 마구 휘두릅니다.

한 중진 정치인은 최근 한 종편채널에 출연해 “(국회에 나가면) 일부러 유력 의원을 찾아가 귀엣말을 하거나 악수를 청한다”며 언론의 관심을 끌기 위한 ‘꿀팁’을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이 정도는 애교입니다. “그 섬(여의도)에는 카메라 사라지면 눈 동그랗게 뜨고 윽박지르고, 카메라 들어오면 반달 눈웃음으로 악수하러 온다.” 윤핵관과의 전면전으로 국민의힘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이준석 전 대표가 일전에 ‘폭로’한 여의도의 ‘정치문법’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국정감사나 상임위원회 회의에서 서로 죽일 듯이 달려들던 여야 의원들이 카메라 플래시가 꺼지기만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술잔을 기울이며 의기투합하는 풍경은 정치권에선 상식으로 통합니다.

이쯤 되면 방송 화면에 비친 정치인들의 모습을 액면 그대로 믿어선 곤란하겠지요. 자원봉사 등은 더 그렇습니다. 일정을 미리 알려 기자들이 줄줄이 따라나선 구호활동을 보고 진정성을 느낄 유권자들이 얼마나 될까요. 말 그대로 ‘스스로 원해서 하는 봉사활동’이라면 주위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피해현장을 찾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 모습에 감동한 주민들이 SNS에 사진을 올리거나 언론에 제보해 세상에 알려진다면 정치인들이 그토록 바라는 홍보 효과도 배가될 터인데요. 지금처럼 화려한 카메라 조명을 받으며 진흙을 걷어내고 비에 젖은 가재도구를 말리는 정치인들의 모습은 아무래도 영 어색합니다.

<권재현 편집장 jaynew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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