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김’ 코인사기극 ‘급’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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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벤처사업가도 감쪽같이 속은 사건 전말 추적기

지인의 추천으로 넷플릭스 드라마 <애나만들기(inventing Anna)>(2022)를 보는 중이다. 미국 뉴욕 상류층 사교계 인사들을 감쪽같이 속여 사기행각을 벌인 20대 여인이 주인공인 드라마다. 회를 거듭할수록 주인공 애나 델비의 대담한 수법과 임기응변 능력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뉴욕 사교계 인사들은 어떻게 넘어갔을까. 애나가 언뜻언뜻 내비치는 진짜 고급 취향을 알아보는 ‘심미안’, 그리고 거침없고 당당한 태도에 압도돼 그를 ‘진짜 러시아 부호의 상속녀’라고 믿게 된다. 약간의 ‘귀동냥’과 구글 검색만으로 나오는 정보라는 건 까마득히 모르는 채로.

알 헤르메스그룹 코리아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회사 소개 페이지. 사우디아라비아 국왕과 왕자 사진을 올려놓고 사우디 왕가와 관련이 있는 회사인 것처럼 소개하고 있으나, 회사 도메인이나 홈페이지 운영은 한국에서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 alhermasgroup.com 캡처

알 헤르메스그룹 코리아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회사 소개 페이지. 사우디아라비아 국왕과 왕자 사진을 올려놓고 사우디 왕가와 관련이 있는 회사인 것처럼 소개하고 있으나, 회사 도메인이나 홈페이지 운영은 한국에서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 alhermasgroup.com 캡처

이 이야기는 실제 사건이다. 심지어 등장하는 인물도 대부분 실존인물이다. 사건의 실체가 드러난 건 2018년 언론보도를 통해서인데, 넷플릭스는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애나에게 이 이야기 판권을 32만달러에 샀다. 우리 돈으로 약 4억원이다.

한국판 애나 소로킨 사건 있었다 지난해 출소한 애나 델비(본명 애나 소로킨)는 당당하다. 심지어 사기사건의 발판이었던 SNS 활동도 재개했다. 드라마 덕분에 애나의 유명세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인스타그램엔 자신이 그린 그림을 NFT(대체불가능토큰)로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바다 건너 한국. 애나 사건이 알려진 2018년 시점에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애나 사건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막 기소돼 재판이 열릴 예정이라는 점이다.

“나 역시 처음 들었을 때는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어떻게 속냐’고 생각했다.” 관련 피해자 측 변호사의 말이다. “사건을 수임한 뒤 여러 자료를 검토하면서 이 사람이 오로지 허황된 이야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나중에 들었다. 뭔가 실적으로 보여주긴 했다. 혹할 만도 했다. ‘아, 이 사람은 진짜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정통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할 만한 것을 보여줬으니.”

기자가 업계에서 이른바 ‘사우디 김’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김○○씨와 관련한 제보를 받은 것은 지난 4월 즈음이다. 사우디 왕가와 친분을 과시하며 왕자회사의 한국지사 회장 직함으로 여러 이권에 개입해 사기사건을 벌였다는 제보였다. 언론보도에 나온 김씨 활동을 보면 2021년까지 모 언론사가 주최한 금융포럼 행사에서 ‘암호화폐의 미래’ 토크쇼에 참석했다던가, 이 회사가 만든 암호화폐가 글로벌 가상화폐거래소에 상장됐다는 소식 같은 것들이다.

김씨의 ‘행적’ 중 압도적으로 많이 나오는 이야기가 아랍이나 동남아, 아프리카 관련 투자 협약식을 가졌다는 보도들이다. 그중 집중적으로 거론되는 것은 사우디 파하드 왕자가 만든 회사의 한국 자회사와 관련한 활동이다.

과거 언론 인터뷰에 따르면 김씨는 서울 출신으로 대학 졸업·장교 전역 후 한 보험회사의 팀장으로 회사의 투·융자 자금을 운용했다. 벤처열풍이 불던 2000년대 초반, 바이오벤처 분야에 뛰어들면서 보험업계를 떠났다. 제보받은 김씨의 이력서에는 과거 보험회사 경력은 언급돼 있지 않다. 대신 사우디 왕자가 설립했다는 알 헤르마스글로벌 그룹의 고위 고문 및 에이전트(2014년), 그리고 이 알 헤르마스그룹 코리아 유한회사 알헤르마스 RM(왕족 관리), 알헤르마스 CJ(자선 공의) 회장을 2015년경부터 맡아온 것으로 돼 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알 헤르마스그룹 코리아’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이 회사가 파하드 왕자라는 사우디 왕가에서 설립한 글로벌그룹의 자회사라며, 왕가 계보도와 최신 왕가 소식 유튜브 뉴스 자료 등을 링크로 걸어놓고 있다. 뜯어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본사에 해당할 알헤르마스글로벌그룹의 도메인은 한국에서 유지하고 있다. 도메인 등록자도 한국거주자다. ‘al hermas group’ 등의 단어로 검색하면 캄보디아지사 등 해외 지사가 나오기는 하는데 대부분 알헤르마스 코리아와 관련된 활동들이다. 실제 사우디 왕가가 저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 맞을까.

“김씨가 보내준 회사 소개 문서자료를 보면 정의화 전 국회의장하고도 같이 사진을 찍었고, 파하드 왕자와 같이 찍은 사진도 있다. 또 김씨가 파하드 왕자를 수행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그래서 ‘아, 이 사람이 진짜 중동에서 영향력이 있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김씨에게 사기 피해를 당한 한 회사 임원의 말이다. 계속되는 이 인사의 말이다. “처음에는 회사 내에서도 반반이었다. 1조원 이야기를 했다가 정유회사에 80조원, 차명으로 미국회사에 묻어둔 돈이 또 얼마라고 하는데 무턱대고 믿을 사람이 어디 있나. 이 사람의 수법이 문건을 들고 오는데, 프린트해서 직접 넘겨주지 않고 살짝 보여주기만 했다. 또 유명한 사람이랑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 식이었다.” 이 회사에서 피해를 본 뒤 조사를 해보니 알헤르마스글로벌이라는 회사는 실체가 없는 유령회사였다. 사우디 왕가가 묻어놨다는 돈도 다 허상이었다.

2019년 8월 22일 김씨 회사의 싱가포르지사가 콩고민주공화국의 광산회사 자산과 관련해서 블록체인으로 보증한다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주장했다. (앞줄 왼쪽이 김씨) / alhermasgroup.com 캡처

2019년 8월 22일 김씨 회사의 싱가포르지사가 콩고민주공화국의 광산회사 자산과 관련해서 블록체인으로 보증한다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주장했다. (앞줄 왼쪽이 김씨) / alhermasgroup.com 캡처

사우디 왕가 한국지사, 진짜일까 사실 김씨가 ‘중동인맥’을 과시하며 사기사건을 일으킨 게 2018년이 처음은 아니었다. 김씨의 과거행적을 검색해보면 2009년 6월에 새만금 일대인 전북 비응도에 3000억원을 들여 당시까지 국내 최고층인 47층 호텔을 건립하겠다는 계획과 관련한 보도에서 김씨의 이름이 나온다. ‘계획’에 따르면 김씨는 사우디에 본사를 둔 호텔 운영과 건설·무역 사업을 하는 ‘S&C그룹’의 부회장을 맡고 있는데 호텔건설 사업을 통해 아시아 지역 진출을 모색하는 차원의 투자로 3000억 규모의 SPC(특수목적법인)를 설립할 예정이라고 돼 있다. 특히 “중국 관광객의 수요에 맞춰 운용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후 실제로 그 사업이 추진됐다는 소식은 없다. 어떻게 된 걸까. 실마리는 그해 11월과 이듬해 군산시 의회 회의록에서 발견된다. 당시 군산시 의회에서 사업추진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던 채경석 전 군산시 의원과 8월 10일 통화했다. “그게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나온 이야기였다. 시장이나 지사로서는 투자유치 성과로 홍보하기 딱 좋은 아이템이었다. 사우디에서 투자한다고 하는데 대표이사는 한국 사람인 김씨였다. 그 사우디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모르기 때문에 알아보라고 질의했는데, 마침 건국대 중동연구소라는 곳이 있어 사우디가 어떤 나라이며 어떤 경우에 그 사람들이 사업을 하는가 쭉 물어보니 안 맞았다.” 채 전 의원이 중동 사정에 밝은 전문가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실제 3000억원 정도 투자를 한다면 반드시 왕실이 개입돼 있을 것이고, 둘째로 그 사람들에 있어서 사업성은 두 번째고 자신들의 종교와 부합돼야 한다. “거기다 그 회사(S&C그룹)에 대해 알아보니 자본금이 2억7000만원밖에 되지 않았다. 3000억원을 투자하는 사업이면 3억원만으로 계약이 성사되지 않는다. 게다가 펀드를 모집한다고 하는데 펀드는 사우디 방식이 아니라 미국 방식이다. 사우디는 돈이 많기 때문에 MOU(양해각서) 같은 복잡한 방식이 아니라 현금으로 계약한다. 3000억원 펀드라 해놓고 2000억원만 모집해도 김씨 쪽에선 어마어마한 수익을 챙기는 셈이다. 사우디 본사와 맺은 3억원 정도의 계약금을 날리는 건 일도 아니다. 다분히 ‘먹튀’ 냄새가 났다.” 결국 계약은 성사되지 못했다.

중동투자 사기행각, 과거에도 있었다 의문은 당장 뉴스만 검색해도 중동인맥을 내세우며 지자체 등에 접근해 사기를 친 전력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김씨의 수법이 최근까지 어떻게 통할 수 있었냐는 점이다.

“아랍 쪽 돈을 끌어오겠다는 건 군산에서 호텔을 짓겠다고 했을 때부터다. 사우디 왕자 이름까지 팔아먹으리라곤 당시만 해도 다들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우디의 무슨 건설회사와 호텔 하는 회사가 군산에 호텔을 짓는다고 했는데, 당시 김씨는 사우디의 사업가 정도를 이야기했다. 유명한 사람이면 정보가 확인되지만 건설회사·호텔을 운영하는 사람을 어떻게 다 확인하겠는가.” 건너 건너 연결된 김씨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인사의 말이다. 그는 김씨가 본격적인 사기의 길에 접어들기 전 여의도 증권가에서 투자전문가로 이름을 날릴 당시 상황부터 알던 인물이다. “김씨가 군산에 호텔을 짓는다는 게 당시 경제지 1면 머리기사로 났다. 2008년경의 일이다. 그때는 정보를 휴대전화로 안 보고 종이신문으로 볼 때니까. 당시는 사우디의 일개 건설사 수준이었고, 사우디 왕자 이야기는 2019년 코인이 터지고 난 다음에야 나오는 이야기였다. 김씨가 정말 사우디 왕자하고 아는 사이였다면 벌써 다른 일을 했겠지, 왜 이상윤을 소개해주겠는가.”

지난 2009년 사우디 S&C 인터내셔널 그룹이 2012년도까지 군산 비응도에 사업비 3000억원을 투자해 지하 4층, 지상 47층의 5성급 특급호텔을 건설하겠다며 내놨던 조감도. 추진 주체 및 자금 조달계획에 대해 군산시 의회 등이 문제 제기하면서 사업은 무산되었다. / 군산시 홈페이지

지난 2009년 사우디 S&C 인터내셔널 그룹이 2012년도까지 군산 비응도에 사업비 3000억원을 투자해 지하 4층, 지상 47층의 5성급 특급호텔을 건설하겠다며 내놨던 조감도. 추진 주체 및 자금 조달계획에 대해 군산시 의회 등이 문제 제기하면서 사업은 무산되었다. / 군산시 홈페이지

이상윤 블룸테크놀로지 대표(52)는 김씨 사건의 피해자로 김씨를 검찰에 고발한 당사자다. 그와 그의 회사가 개발한 ‘로커스체인’이라는 암호화폐를 정식 상장 전 중동왕가에 선판매해주겠다고 김씨가 약 1억개를 가져가 반환하지 않고 일부를 편취한 혐의다. 이 대표는 IT업계에서는 2000년대 초반 국산전략시뮬레이션게임 ‘킹덤 언더 파이어’ 시리즈를 낸 판타그램사의 대표로 유명하다. 부인 김세정 블루사이드 대표와 함께 한국 IT산업의 역사를 이끈 대표적인 ‘1세대 개발자’로 인식되고 있다. 블록체인 붐이 일어나면서 그도 가상화폐 개발에 뛰어들었다. 2017년 사명을 ‘블룸테크놀로지’로 변경하고 로커스체인이라는 가상화폐를 개발해 내놨다. 게임에서 동시접속자가 많을 때 로드가 걸리지 않도록 하는 기술을 블록체인과 접목해 ‘병목현상’을 없앤 게 로커스체인의 특장점이다.

김씨, 어떻게 청와대 사칭할 수 있었나 김씨와 이 대표를 연결해준 것은 IT업계에서 ‘마당발’로 통하는 또 다른 유명인사 A씨로, 2014년 여름경의 일이었다. A씨는 이 대표 부인에게 김씨에 대해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의 동생인 파하드 왕자의 보좌관으로 사우디에서 근무하는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A씨는 이와 함께 “김씨가 청와대 경호실과 국정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 국내외 정치권 및 해외지도층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씨의 경력엔 청와대나 국정원 근무 관련 내용이 없다. 그런데 왜 A씨는 그렇게 소개했을까. A씨를 접촉해봤다. “내가 소개해준 것은 맞다. 사실 나도 피해자인데 김씨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만나는 사람은 다 당할 것이다. 지금에 와서 보면 허술해보이는데, 아무리 나는 속지 않을 자신이 있다, 라고 장담하는 사람도 막상 만나면 다 당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천재다.” A씨가 김씨를 만난 건 15년 정도 됐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검증에 충분한 시간인데 대통령 경호실이나 국정원 근무 이야기는 어떻게 나오게 된 것일까. “실제 누구를 만났다고 하는데 사진을 보면 진짜로 만난 건 사실이다. 청와대 누구와 여의도 식당에서 만나는 자리가 있었는데 나는 옆방에 있었다. 나중에 김씨가 보여주는 명함을 보니 청와대 명함이었다. 이상윤 대표를 소개시켜주기 몇년 전에는 그 누구냐, 공항에 들어오면서 가방을 던진 사람, 현 여권의 김무성하고도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그런 정치인을 아무나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냐. 아랍사람하고 단체로 사진도 찍고, 말로만 그랬으면 모르는데 만났다는 사진이 있으니. 한번은 모 건설회사를 인수한다고 여의도 산업은행을 함께 갔는데 실제로 서류를 내는 것도 봤다.”

그는 결과적으로 자신도 20억원 정도 김씨에게 뜯겼다고 말했다. “금전적 피해를 봤다. 결과적으로 내가 바보 맞다. 출장을 가야 하는데 ‘출장비가 없다’ 그러면 안 빌려줄 수가 없었다. 몇백일 때도 있고 몇천일 때도 있었다. 나중에 모두 다 더해보니 20억원 정도 된다. 돈을 준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석은 짓인데 이 사람이 신용불량자라고 해서 본인 통장이 아닌 다른 사람의 통장으로 입금했었다.” A씨는 스타트업·벤처업계에서 “깐깐한 검증으로 알려진 투자자”로 유명한 인사다. 그런 그도 바보 같이 당한 셈이다. “그를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사우디 김’이라고 불렀다. 파하드 왕자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 운전수행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리던데 사실이 아니다. 김씨는 운전을 못 한다. 그래서 항상 택시를 타고 다닌다. 게다가 아랍어도 못 한다. 영어는 잘하는 편인데, 신기하게 김씨가 만나는 아랍사람들이 영어는 잘한다. 비즈니스는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하니까.”

김씨가 과거 대통령실이나 정치권 관계를 사기에 이용했다는 건 기자가 입수한 김씨와 이 대표 부부 사이의 대화록에서도 확인된다.

“한국 귀빈이 문제인데, 청ㅇ대 초청할까요? 초청하면 외국인에게 폼 잡는 것은 확실하니! 단, 하나 걱정! 초청하면, 신상 다 털림 A to Z….” 2018년 3월 30일 김씨가 이 대표 측에 보낸 텔레그램 문자다. 여기서 ‘청ㅇ대’는 청와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로커스체인 행사에 자신이 청와대 인사를 초청할 수 있다고 과시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부연 설명한다. “청와대는 내가 경험해봐서 아는데, 내 와이프가 금감원 부원장 후보가 돼 청와대에서 마지막으로 검색하는데 30년 전 본인 활동 및 사촌들까지 뒤지더라고!” 본인의 부인이 금감원 부원장 후보까지 올라갔는데 청와대의 공직검증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그해 9월에는 아프리카 말라위 수상을 만나 “말라위의 다음 선거를 한국정부가 도와달라고 했고, 대통령에게도 그렇게 말해달라고 해서 자신이 ‘I said ok’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나눴다는 기록도 눈에 띈다.

기자가 입수한 김씨 이력서. 알 헤르메스 글로벌 그룹 관련 한국 내 회사들의 회장을 맡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기자가 입수한 김씨 이력서. 알 헤르메스 글로벌 그룹 관련 한국 내 회사들의 회장을 맡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취재를 하면서 흥미로운 대목은 김씨가 문재인 전 대통령과 모종의 관련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다닌 것이 여기저기서 확인된다는 점이다. 김씨가 각종 행사에서 대동했던 외국인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는 한 인사의 전언이다. “두바이에 거주하는 인도 사람으로 알고 있다. 김씨가 이 사람을 초대해 한국방문을 주선했는데, ‘아랍의 전통복장을 하고 와달라’는 부탁을 건넸다고 한다. 이 사람은 한국에 와서는 코엑스 인터콘티넨탈호텔에 묵었고, 국회의원실에도 초청받아 갔다. 지방의 한 기관도 방문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인상적이었던 건 그 사람은 한국말을 잘 몰랐는데 대체적으로 그 내용은 기관이 소재한 지자체에 해외 자금을 유치해주겠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사람 말이 유치 이야기를 하니 오히려 그쪽에서 화를 내면서 ‘우리도 자금을 운용하는데 무슨 소리냐’는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거절을 당한 뒤 호텔에 돌아왔는데 김씨가 그다음 날 와서 하는 말이 “브라더에게 이야기해서 화를 낸 그 담당자를 잘라버리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브라더가 누구냐고 이야기하니 ‘프레지던트 문’이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나는 라스트네임이 다른데 어떻게 형제냐고 반문했다. 김씨가 두바이에 갔을 땐 이런 일도 있었다. 체류비용은 다른 사람이 냈는데, 그걸 달라고 하니 김씨가 한국의 외교부, 포린어페어 부서의 멤버이니 정부가 지불할 것이라고 둘러댔다는 이야기도 들은 기억이 난다.”

이상윤 대표 측에서 정리한 문서를 보면 김씨가 친분을 과시하며 제시한 문재인 정부 당시 국회의원과 청와대 선임행정관들의 명함사진도 있다. 8월 18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문재인 정부 청와대 당시 선임행정관을 지낸 인사는 “김○○이라는 이름이 내 휴대폰에 저장돼 있지도 않고, 실제 기억나는 인물도 없다”라며 “명함만 놓고 보면 지역구(서울 양천구 목동) 모임 관련이었을 것 같은데 중동에서 관련 사업한다는 사람을 만난 기억은 없다”라고 덧붙였다.

실제 일부 비용 지급한 ‘고단수’ 사실 취재를 하다 보면 권력 주변부에서 김씨와 같이 중동 왕가와의 친분을 과시한다든가, 조선조 구 황실재산의 관리인 행세, 재벌가나 정치인의 차명재산 처분 등을 내세워 접근하는 건 종종 접하게 되는 전형적인 사기수법이다. 김씨 사건의 피해자들은 만에 하나 그럴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기자와 마찬가지로 변호사 역시 여러 부류의 사람을 만난다. 김씨 사건을 들여다본 것이 2~3년은 되는데 김씨는 상당한 고단수다. 수단이 낮은 사기꾼은 자기 돈을 안 쓰면서 하는데 김씨는 실제 비용을 지급한다. 말하자면 거짓과 진실이 혼재돼 있는 상태다. 피해를 입은 회사는 김씨 말이 맞는지 조사도 하고 검증도 하는데, 하다 보면 그럴듯한 이야기로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피해 회사의 변호사가 ‘개인적 견해를 전제로’ 털어놓은 김씨의 사기 행각에 대한 소회다. “코인 관련으로도 자신이 중동 쪽에 5억개를 판매한다고 가져갔는데 실제 2500만개 정도는 팔았다. 말하자면 이쪽저쪽에서 호가호위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사우디에 가서는 실제로 이런저런 사람들과 친분을 가졌고. 이번에는 코인으로, 예전에는 지자체 건설 그런 관련으로 관계를 맺었다. 그쪽 사람들에게는 한국의 권력과 연결돼 있는 건실한 사업가인 양 행동해 뭔가를 얻어내고, 그 친분을 이용해 한국에 와서는 ‘사우디 돈을 끌어올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식이다.”

앞서 언급한 피해 회사 임원의 말이다. “실제 인도에 있다는 10억954만달러 가치의 채석장 소유권 증서와 감정평가서를 담보재원으로 투자하겠다는 말을 듣고 우리 재무 쪽에서 그쪽 은행에 연락했다. 규정이 바뀌기 전에 작성한 문서로 판명 났다. 혹시 사기 아닐까 의심을 품은 계기였다. 그전까진 뭐에 홀린 듯 다들 ‘우리 기술이 이제야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구나’ 하고 떠받들었다. 김씨에게 회장님, 회장님 하면서 별별짓을 다했다. 심지어는 우리 회사에 방문하고 자기 목도리를 놓고 갔다고 자기가 묵고 있는 호텔에 가져다 달라고 해서 직접 가져다주는 개인 심부름도 했다. 당해본 사람들만 안다. 그나마 나는 조금 거리를 두면서 객관성을 유지하는 편이었다. 진실을 몰랐던 당시는 그가 하는 걸 보면 우와~ 하고 입이 딱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기사 마감을 하루 앞둔 8월 17일 심야, 김씨를 검찰에 고발한 이상윤 대표와 통화했다. “우리가 당한 뒤 조사하면서 알게 됐는데, 우리가 몰랐던 더 많은 악행을 벌인 사기꾼이었다. 물론 우리가 피해를 크게 본 것은 사실이다. 우리 이후에도 다른 피해를 입은 회사들이 있는데, 우리 수사가 빨리 진행돼 먼저 기소됐다면 다른 회사의 피해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굉장히 힘들게 억울함을 당해왔다. 제3의 피해자가 더 안 나왔으면 좋겠고, 중형을 받아 이렇게 사기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앞으론 사라지면 좋겠다.”

기자는 취재 내용에 대한 김씨의 반론을 듣고자 여러 경로로 수차례 연락을 취했지만 김씨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기혐의로 기소된 김씨 사건은 오는 9월 중 첫 재판이 열릴 예정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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