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어떤 책을 읽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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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사람 단 한명의 이야기만 제대로 들어도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수습기자 때 들었던 말 가운데 이 말 하나만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누구에게나 이야기가 있게 마련이고, 또 하나의 세계에 접속하는 것과 같다는 메시지였다. 동시에 좁은 시야에 갇히지 말고 더 넓은 세계를 마주하라는 당부였다.

지난 8월 11일 서울 신림동 반지하주택 방범창 사이로 이웃 빌라가 보인다. 집중호우로 이 반지하주택에서 발달장애인 가족 3명이 사망했다. / 성동훈 기자

지난 8월 11일 서울 신림동 반지하주택 방범창 사이로 이웃 빌라가 보인다. 집중호우로 이 반지하주택에서 발달장애인 가족 3명이 사망했다. / 성동훈 기자

사람이 책이라면 우리는 살면서 몇권을 읽을까. 읽기 편한 책, 소화하기에 무리 없어 보이는 책을 집어드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읽고 싶은 책만 읽는다면 우리의 세계는 요동치지 않고 잔잔할 것이다. 그뿐이다. 책을 읽는 건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지만,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갖고 있던 생각에 조금씩 균열이 나고 우리가 접속할 수 있는 세계는 확장된다.

덴마크에는 ‘사람 도서관’이 있다. 이곳에서는 책 대신 사람을 빌려준다. 장애인, 무슬림, 성소수자, 소수민족, 홈리스 등 다양하다. 보수 기독교인인 백인과 트랜스젠더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흑인 운동가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가 만나는 식이다. 도서관의 신조는 책의 표지만 보고 판단하지 말 것. 최소 30분 탐독의 시간을 갖는다. ‘사람 책’을 펼쳐 들기 전과 후는 분명 다르다. 굳어온 편견이 조금씩 녹아내리고 이 공간을 느낌표와 물음표로 채운다. 80개가 넘는 국가가 사람 도서관을 운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민은 갈등을 자발적으로 해소할 근육을 만들고 사회의 갈등 비용은 줄어든다.

“아, 주무시다 그랬구나”, “서초동에 제가 사는 아파트가 전체적으로 좀 언덕에 있는데도 1층에 물이 들어와 침수될 정도이니 (호우 상황이 심각하다).” 지난 8월 9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주택에서 숨진 일가족 3명의 집을 창문 너머로 내려다보던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은 그가 취약계층의 삶에 무관심하고 무지함을 드러냈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이 이 집을 ‘관조’하는 듯한 사진에 문구를 넣은 카드뉴스를 배포했다가 비판 여론이 일자 삭제했다. 숨진 이들은 ‘자다가’ 들이치는 빗물에 피해를 본 것이 아니었다. 여성에게 쏠린 돌봄노동, 장애인의 가족에게 떠맡겨진 돌봄의 무게, 취약계층에게 보장되지 않는 주거권, 작동하지 않은 안전시스템…. 이 모든 게 얽힌 ‘인재’였다. 구경거리가 아니다.

‘낮은’ 곳에 사는 이들의 삶을 읽지 않으니 정부가 내놓은 대안은 책의 결말만 급히 읽고 쓴 서평 같았다. ‘반지하 일몰제’를 대책으로 제시하면서도 대안적인 주거공간은 보장하지 않았다. 서울의 반지하주택에 살며 중학생 딸과 아픈 남편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50대 여성은 “여기서 지내지 못하면 서울에서는 살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정부가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 말도 들어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반지하, 고시원, 쪽방촌, 비닐하우스…. 이런 곳에 사람이 살게 된 이야기를 정부는 좀처럼 읽지 않는다.

윤 대통령은 어떤 책을 읽고 있나. 사서 역할을 하는 참모들이 대통령에게 권하는 책에 ‘이대남’, ’대기업’만 찍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지지율을 끌어올릴 해법은 ‘페미니즘 때리기’, ‘기업인 사면’이 아니라 펼쳐보지 않은 책에서 찾아야 한다.

<박하얀 사회부 기자 whit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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