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화 부채질하는 정부의 부자 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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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둔화·인플레이션·금리 인상 겹치면서 계층 간 양극화 커져… “세제개편 땐 더 악화”

30대 초반의 직장인 윤희정씨(가명)는 최근 1개월 유급휴가를 다녀왔다. 3년을 근속한 후 받은 꿀맛 같은 재충전 시간이다. 캐나다 로키산맥 트래킹에 이어 쿠바여행까지 다녀왔다. 희정씨는 “한 달이란 기간을 쉬어본 적은 처음이라 이 시간을 잘 활용해야겠다는 기대감이 컸다”면서 “자연을 좋아해 짧은 휴가로 다녀오기 어려운 곳들, 도시와 단절된 곳들을 찾아갔다”고 말했다. 팀원들의 배려로 휴가 동안 업무와는 철저히 단절될 수 있었다. 충분히 쉬니 복귀할 때도 마음이 가볍다. “휴가가 끝났다는 아쉬움보다 얼른 가서 팀원들이 진 짐을 내려주고 싶은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고 했다.

서비스연맹 유통분과 소속 마트노동자들이 8월 4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 집무실 인근에서 대형마트 의무휴업 폐지 시도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서비스연맹 유통분과 소속 마트노동자들이 8월 4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 집무실 인근에서 대형마트 의무휴업 폐지 시도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희정씨는 “길게 쉬면 생각하는 것도 바뀌고, 자신의 일하는 방식을 돌아보고 회사에 없던 애정도 생기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와 함께 열심히 일한 시간을 마무리할 때 짧든 길든 재충전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면 기업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서 리프레시(재충전) 휴가가 정착되는 건 인재 영입을 위한 방편인 면이 크다”고 말했다.

희정씨가 일하는 ICT 분야의 대기업들은 3~5년 단위로 한 달의 유급휴가를 주는 곳이 많다. 최근에는 차별화를 위해 국내외 휴양지에서 일할 수 있는 ‘워케이션’을 제공하는 곳도 많다. 일례로 네이버는 지난 7월 4일부터 매주 직원 10명을 추첨해 강원도 춘천에서 4박5일간 일할 수 있도록 했다. 지난해 7월부터 국내 워케이션을 허용한 네이버의 관계사 라인플러스는 올해 원격근무지를 일본, 대만, 태국, 싱가포르 등으로 확대했다. IT기업만이 아니라 CJ ENM이나 한화생명 같은 대기업도 워케이션을 도입했다.

의무휴업 폐지, 노동자·소상공인 위협 희정씨는 재충전 휴가, 쉴 권리를 보장하는 문화가 대기업만이 아니라 중소기업과 소규모 사업장으로도 퍼지길 희망했다. 현실은 반대로 가고 있다. 정부는 현재 주 최대 12시간인 연장근로시간 한도를 1개월 단위로 관리해 약 52시간(12시간×4.345주)의 총량만 지키면 되는 방향으로 주 52시간 근무제 개편을 검토 중이다. 이런 방향으로 근무시간이 조정되면 주 6일 동안 최대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다. 근로기준법은 주 60시간 이상 일하다 숨지면 과로사로 인정하는데, 정부가 과로사 기준을 넘겨 일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셈이다. 권성동 국민의힘 당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는 지난 7월 21일 “국가가 국민의 일할 자유, 경제적 자유를 제약해서는 안 된다. 국민이 갖고 있는 ‘시간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며 정부 안(案)을 지지했다.

대형마트 의무휴업 폐지 추진도

노동자의 쉴 권리를 위협한다. 대형마트 의무휴업과 영업시간 제한(자정부터 오전 10시)은 골목 상권을 보호하고, 종사자들의 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오랜 사회적 논의를 거쳐 2012년 시행됐다. 이후 유통 대기업들은 의무휴업 등의 영업규제로 쿠팡을 비롯한 온라인 업체와의 경쟁이 어렵다며 제도 폐지를 요구했다. 새 정부는 이에 호응해 지난 8월 4일 규제 개혁을 공언하며 신설한 규제심판회의의 첫 회의를 열고 대형마트의 월 2회 의무휴업과 영업시간 제한 폐지를 논의했다.

마트 노동자, 소상공인들은 제도 폐지 움직임을 부정적으로 본다. 서울의 한 대형마트 매장 직원인 이정민씨(가명)는 “휴일엔 손님이 많아 쉬겠다고 말하기 부담스러운데, 의무적으로 쉬는 날엔 눈치 보지 않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서 “의무휴업 폐지를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대기업 대표들이나 정부 관계자들이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책상머리에서 결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에서 정육점을 운영하는 김호연씨는 “우리 가게는 큰 차이가 없지만 대형마트에 인접한 곳에서 일하는 지인의 정육점은 대형마트가 문을 닫지 않은 일요일 매출이 150만원 정도라면, 문을 닫은 날은 200만원을 넘는다”면서 “한 달 100만원이면 소상공인에게는 큰돈”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대형마트는 차를 끌고 가 한 번에 쇼핑하고 가버리니 대형마트 근처 지상엔 다니는 사람이 없다”면서 “작은 과일가게나 식품점들이 살아야 거리에 유동인구도 많아지고 손님도 늘기 때문에 소상공인을 위해 문을 한 번씩 닫아주는 게 좋다”고 했다. 그는 “대형마트가 문을 닫는 주에는 미리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장을 보는 사람이 많아 일요일 의무휴업을 해도 매출에 큰 타격은 없을 것”이라면서 “직원들이 휴일에 쉴 수 있으면 평일에 더 열심히 일하고, 손님 응대도 잘할 테니 차라리 그게(의무휴업을 유지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온라인 마켓의 비중이 커진 현실을 감안한다면 의무휴업제를 온라인 플랫폼까지 확장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코스트코 노동자 약 1만명이 소속된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마트산업노동조합(마트노조)은 지난 8월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윤석열 정부가 의무휴업 폐지를 논의하면서 노동자 건강권·휴식권 문제를 배제하고 있다”며 “의무휴업을 폐지할 게 아니라 쿠팡, 식자재마트, 이케아 등 유통산업 전반으로 영업 제한을 확대해야 한다”고 밝혔다.

기업도, 개인도 양극화 심해진다

쉴 권리의 격차는 우리 사회 양극화의 한 단면이다. 경기둔화와 인플레이션, 금리 인상이 겹치면서 기업 간·계층 간 양극화는 커지고 있다. 현대차는 올해 2분기 매출 35조9999억원, 영업이익 2조9798억원으로 사상 최대 기록을 세웠다. KB, 신한, 하나, 우리 등 4대 금융지주의 상반기 순이익 추정치는 역대 최대치인 9조2086억원으로 추정된다. 기업 실적이 좋은 수출기업과 ICT 분야 대기업들은 휴양지 원격근무 등 파격적인 복지 혜택을 늘리고 있다. 반면 고용의 대다수(1754만명·81.3%)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의 매출은 2019년 대비 2020년 0.7% 늘었을 뿐이다.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제조 분야의 대기업들은 이미 고도로 로봇화·자동화돼 있어 코로나19 시기에도 상대적으로 타격이 작았고, 원격근무를 지원할 여력에서도 차이가 나면서 양극화를 더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기업 양극화는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원인(대기업의 갑질과 중소기업의 허약한 경쟁력)과 단기적 원인(코로나19 위기)이 겹친데다 기후위기와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산업 전환까지 겹쳐 매우 복합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면서 “각각에 대해 서로 다른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첫 번째는 공정거래 이슈이고, 두 번째는 안전망의 이슈, 세 번째는 구조조정의 문제로, 공정거래 규제를 보다 철저히 하고 혁신적이지만 단기적인 유동성 위기에 빠진 중소기업은 아낌없이 지원하는 것이 핵심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극화 부채질하는 정부의 부자 감세

계층 간의 빈부격차도 더 커지고 있다. 소득격차보다 자산격차가 양극화를 키우고 있다. 통계청이 지난해 12월 16일 발표한 ‘2021년 가계금융복지조사’를 보면, 시장소득을 기준으로 한 지니계수는 2019년 0.404에서 2020년 0.405로 소폭 상승했다. 지니계수는 소득불평등 정도를 0과 1 사이에서 나타내는 지표로, 0에 가까울수록 평등하다는 의미다. 처분가능소득을 기준으로 한 지니계수는 2020년 0.339에서 2021년 0.331로 개선 양상을 보였다. 지난 정부에서 기초연금 확대, 기초생활보장제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재난지원금·소상공인 지원금 등 시장소득 격차를 줄이는 재정정책을 편 결과이다.

하지만 저금리·양적완화에 따른 부동산가격 상승으로 자산격차는 크게 확대됐다. 통계청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부채에서 자산을 뺀 순자산 기준 지니계수는 2017년 0.584에서 2020년 0.602까지 상승했다. 강병구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공평한 분배를 실현하고, 경제의 안정과 성장을 추구하는 게 정부 재정이 해야 할 주된 역할이다. 전(前) 정부의 조세재정정책은 가처분소득 측면에선 개선을 이뤘지만, 자산에서의 불평등은 여전히 확대됐다”고 말했다.

전방위 부자 감세 택한 정부

기업 간·계층 간 양극화는 새 정부가 대기업·대자산가 위주로 큰 폭의 감세를 추진하면서 악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는 지난 7월 21일 발표한 ‘2022 세제개편안’에서 과세표준 3000억원을 초과하는 초대형 법인에 적용하던 법인세 최고세율을 25%에서 22%로 낮춘다고 밝혔다. 2021년 기준 전체 법인 수의 0.01%인 103개 대기업이 여기 해당한다. 유호림 강남대 세무학과 교수(경실련 재정세제위원장)는 이들 기업이 내는 법인세가 감세로 약 4조1000억원 줄어들 것으로 추정했다.

정부는 상속세도 인하했다. 가업승계제도 적용대상 중견기업의 범위를 매출액 4000억원 미만에서 1조원 미만으로 확대하고, 상속공제 한도는 현행 500억원에서 최고 1000억원으로 높였다. 가업승계 증여세 특례한도는 100억원에서 최대 1000억원으로 확대했다. 유 교수는 “과세특례 적용 한도액을 10배 인상한 사례는 금번 가업승계 증여세 과세특례 개편 이외에는 대한민국 세제사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면서 “부의 무상이전이자 결과적으로 기회균등이라는 헌법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라 막무가내로 풀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해외 자회사 유보소득의 국내 유입을 유도하기 위해 해외 자회사로부터 국내 모회사가 배당금을 수취하는 경우, 그 배당금 수익을 국내 모회사의 소득금액에 합산하지 않도록 개정했다. 적용대상이 되는 해외 자회사의 범위도 지분율 기준 현행 25%에서 10%로 인하해 적용범위를 대폭 확대했다. 정부는 외국에 유보된 해외 자회사의 재원이 100조원 이상으로 이 돈이 국내로 송금되면 경기가 활성화될 수 있다는 기대 효과를 개편의 이유로 들었다.

양극화 부채질하는 정부의 부자 감세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그 혜택은 국내 모회사를 지배하는 대주주(재벌의 경우 재벌일가)에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유 교수는 “배당금을 국내로 송금할 때 한국에서 과세하지 않으니 일단 재정수입이 줄고, 두 번째로 세금을 국내에서도 해외에서도 빼주니 국내 모회사 주주들의 배당이익이 굉장히 높아진다”면서 “해외 자회사를 가진 기업의 대부분이 재벌기업이라는 점에서 이중과세를 빼준다는 합리적 근거를 대고 있지만, 사실은 재벌기업의 핵심 주주들, 재벌일가와 그 방계의 조세 부담을 크게 줄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해외 자회사를 이용한 조세 회피 우려도 나온다. 강병구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런 정책이 국내 기업의 해외투자를 국내로 되돌려 일자리를 늘리려는 리쇼어링 정책과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재벌·고액 자산가를 위한 ‘맞춤형 감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일감몰아주기 증여의제와 관련해 법인 단위로 증여이익을 산출하는 방식을 사업부문별로 계산하는 방식으로 바꾸고, 수출목적의 국내 거래는 증여이익 계산에서 빼줬다. 국내 상장주식의 양도소득세 대상이 되는 ‘대주주’ 기준도 완화해 지분율 요건을 삭제하고, 보유 금액 기준은 종목당 10억원에서 100억원으로 확대했다.

부동산세제 정상화라는 이름으로 종합부동산세 과세기준을 주택 수에서 가액기준으로 바꿔 다주택자 중과세를 없앴고 세율도 낮췄다. 2023년부터 주택분 종부세 기본 공제 금액은 현행 6억원에서 9억원으로 오른다. 재산세의 경우 1세대 1주택자 공정시장가액비율을 현행 60%에서 45%로 낮췄다.

재산세, 종부세 등 보유세의 완화는 다주택 보유자가 집을 팔 유인을 줄일 것으로 보인다. 이강훈 참여연대 부집행위원(변호사)는 “한국부동산원 자료에 따르면 소득 대비 주택가격(PIR)이 서울의 경우 2022년 12.9로 과거 평균(8.6)보다 크게 뛴 상태”라면서 “세제 감면과 규제완화가 주택시장의 안전성, 국민의 부담 가능성 측면에서 바람직한 정책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유호림 교수는 “총액기준을 가액기준으로 바꾼 건 정부가 부동산 임대업을 장려하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양두구육’ 세제개편안

정부는 서민·중산층의 세 부담을 완화하고 중소기업을 지원한다고 했지만 이는 구색맞추기에 가깝다. 근로소득세 과세표준 구간 조정에 따른 감면세액은 약 2조3000억원이지만 대상자인 중저소득 근로자가 약 1800만명에 달하는 점을 고려하면 1인당 감세액은 약 12만6000원 수준에 불과하다. 연봉 2000만~5000만원 근로자의 식대 비과세 한도를 10만원에서 20만원으로 늘렸는데 이로 인한 혜택은 연간 22만원 정도다. 협력업체의 임금 수준을 높이기 위해 유지·강화해야 할 투자상생협력세제는 일몰 폐지됐다.

정세은 교수는 “상위 100대 기업 법인세 감세의 이익이 대주주에 집중되고, 상장주식 양도차익 과세 대상의 대주주 범위를 줄여주는 것은 최상위 주식 부자들에게 유리한 세제 결정”이라면서 “이번 세제개편안은 보통 부자도 아닌 최상위 부자를 위한 감세”라고 규정했다. 정 교수는 이번 세제개편안이 명분은 물론 실리도 놓쳤다고 평가했다. “부자 감세라는 점에서 명분도 없지만, 법인세를 인하한다고 해서 투자가 느는 것도, 투자가 늘어난다고 해서 고용이 느는 것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실리도 놓쳤다. 최근의 투자는 로봇화·자동화 투자이기 때문에 투자가 자연히 고용을 늘린다고 하기 어렵다.”

장기적으로 보면 양극화를 심화시킬 우려가 크다. 정 교수는 “부자들의 늘어난 소득이 자산으로 축적되고, 자산에서 소득이 더 발생하므로 다시 소득양극화를 자극할 것”이라면서 “저소득층 내에서 저임금 경쟁이 일어나 저소득층 소득감소가 일어나고 부동산에서 더 높은 불로소득이 기대된다면 고소득, 고자산 계층의 부동산 투기와 그로 인한 부동산 가격상승, 임대료 상승 등의 악순환이 지속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7월 27일 서울 종로구 경실련에서 열린 윤석열 정부 세제개편안 평가와 제언 토론회에서 유호림 경실련 재정세제위원장(왼쪽 세 번째)이 새정부 세제개편안에 대한 평가 및 제언을 주제로 발제하고 있다. / 연합뉴스

7월 27일 서울 종로구 경실련에서 열린 윤석열 정부 세제개편안 평가와 제언 토론회에서 유호림 경실련 재정세제위원장(왼쪽 세 번째)이 새정부 세제개편안에 대한 평가 및 제언을 주제로 발제하고 있다. / 연합뉴스

부자들이 덜 낸 세금, 결국 서민 부담으로

정부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세제를 합리적으로 재편”한다고 밝혔다. 세계적 흐름은 증세에 가깝다. 각국은 인플레이션 극복을 위해 유동성 회수를 목적으로 한 통화정책을 펴면서 동시에 경기침체와 기후위기 대응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증세를 추진 중이다. 대자산가와 고소득자를 대상으로 한 이른바 ‘슈퍼리치세’나 에너지 위기 속에서 떼돈을 번 석유화학기업을 대상으로 ‘횡재세’ 도입이 검토되고, 법인세율 인상도 논의된다.

예컨대 미국 상원은 지난 8월 6일(현지시간)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투자와 부자 증세 등의 내용을 담은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과시켰다. 에너지 안보와 기후변화 대응에 3690억달러(약 479조원), 처방약 가격을 낮추기 위한 전(全)국민건강보험에 640억달러를 투자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재원 마련을 위해 대기업에 최소 15%의 법인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영국도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악화된 재정건전성을 회복하기 위해 2023년부터 현행 19%인 법인세율을 25%로 인상하기로 했다. 대신 타격을 입은 실업자와 자영업자에게는 재정지출을 통해 평균 소득의 80%를 계속 보전해주기로 했다.

유호림 교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코로나19 위기상황을 4단계(위기·봉쇄·전환·포스트코로나)로 구분하고 전환과 포스트코로나 단계에서는 타격을 입은 경제 주체들, 즉 자영업자와 저소득자 계층에 재정지출을 늘리고 그에 필요한 재원을 증세로 조달해야 한다고 권고했다”면서 “지금 우린 경제적 타격을 입은 계층에는 그다지 큰 혜택을 주지 않고 증세 대상인 자산가와 고소득자에는 엄청난 감세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시대착오적인 낙수효과에 기대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낙수효과는 감세로 투자와 고용을 늘리면 성장률이 높아지고, 세수가 확충되면서 재정건전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가설이다. 강 교수는 “선순환 논리가 시장에서 작동하지 않는 현실에서 부자 감세 기조를 유지하면서 정부가 재정준칙 등 재정건전성을 강화할 경우 조세정책의 재분배 기능과 경제 안정화 기능이 약화되고, 그 결과로 양극화가 심화되면 성장잠재력도 약화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감세로 인한 세수 감소는 보수 정부가 강조하는 재정안전성도 해칠 수 있다. 과거 MB 정부는 법인세율을 22%로 인하해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약 4년간 26조7000억원에 달하는 법인세를 감면했다. 같은 기간 기업 투자는 약 23조원으로 직전 4년간(2005~2008년)의 투자총액보다 10조원 이상 줄었다. 낙수효과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고, 기업 사내유보금만 2009년 약 72조원에서 2011년 약 165조원으로 늘었다. 2012년 이후엔 세수가 줄어 2014년 약 11조원의 결손을 기록했다. 이 때문에 박근혜 정부는 부족한 세수와 재정적자를 보전하려 담배소비세와 주민세를 인상하는 대대적인 서민 증세를 단행했다.

정부는 이번 세제개편안으로 5년간 누적 60조원 정도의 세수가 감소할 것으로 전망한다. 강병구 교수는 “정부가 지출 구조조정으로 재정을 효율화하는 방식으로 재원을 확보한다고 하지만 지출 구조조정으로 재원을 확보하는 건 한계가 있고, 경제성장으로 인한 자연세수 증가분을 언급했는데 최근 경제전망치가 하향조정되면서 그것도 상당히 쉽지 않은 상황이다”고 말했다. 김태일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교수는 “재정건전성을 강조하는 건 맞지만 윤 정부가 감세를 하면서 재정건전성을 유지하자는 기조라는 점에서 재정운용이 힘들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시장지상주의 벗어나 해결책 고민해야

전 세계는 코로나19를 계기로 정부 역할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정부가 손을 떼면 공공성이 흔들린다는 걸 목격했다. 공공보건 인프라가 부족하면 간호사가 과로로 죽고, 상하수도 예산을 줄이면 폭우로 침수 피해를 겪는다. 부자 감세로 인한 복지지출 감소는 서민의 삶을 위협한다. 이미 정부는 노인일자리 제공 같은 복지 부문의 정부 지출을 줄이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정부가 주택 공급 속도를 높인다는 명목으로 도심 복합사업에서 공공에만 부여하던 용적률 상향과 토지 수용 등 도시 건축 특혜를 민간에도 적용하면 개발이익이 건설사나 리츠(부동산투자신탁) 등 민간사업자로 집중될 수 있다.

용산 정비창 부지에 계획하던 공공주택 공급을 줄이는 대신 초고층 빌딩을 세우면 주거빈곤 문제의 해결은 한층 더 멀어진다. 정부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지 않는 부동산 개발을 장려하면서 민간업자에게 이익을 넘겨주는 방식으로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유호림 교수는 “윤석열 대통령이 이전에 자유주의 경제학과 관련된 책을 읽었다고 하는데 자유주의 경제학의 핵심 주장이 이익은 사유화하고, 비용은 사회화하는 것”이라면서 “이 방향으로 세제를 개편하고 부동산 정책을 펴는 건 공공성의 위기이자, 정부 역할을 민간에 넘기는 정부의 위기”라고 평가했다.

점차 가시화하는 탄소장벽과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가 세제 정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김태일 교수는 “법인세 인하는 사실 초대기업만 상당한 이득을 보는 구조로, 굳이 법인세를 낮출 거면 하청기업과의 상생이나 탄소중립을 위한 노력과 연계해서 혜택을 제공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탄소세와 같은 새로운 세제 도입도 논의할 시점이 됐다. 탄소 배출에 가격을 매겨 탄소배출량을 줄이고, 그 재원을 에너지전환과 취약계층에 지원하는 내용이다. 강병구 교수는 “탄소세 도입과 배출권거래제 활성화와 같은 세제 정책으로 기후위기에 적극 대응할 필요가 있다”면서 “탄소세로 확보한 세원을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재원으로 일부 쓰고, 한편으로 세수의 역진적 성격을 완화하는 탄소배당금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양극화도 세제로 풀어야 할 과제다. 강 교수는 “우리 사회의 고질인 대·중소기업 간 격차 해소를 위해 대기업에 대규모 감세를 제공해 주주와 대기업 노동자에게 이익을 집중시키기보다 적정한 수준에서 과세하고 그 재원을 중소기업과 그곳에서 종사하는 근로자 지원에 활용하는 게 더 적절하다”고 말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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