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청 착취 계속되면 조선업 경쟁력 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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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수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장 인터뷰

“안 할 수가 없던 싸움이었다. 불이 났다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는데 집주인이라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결국 우리가 불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김형수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장(가운데)이 지난 7월 21일 거제시 아주동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하청업체와 비공개 협상을 하고 있다. / 문재원 기자

김형수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장(가운데)이 지난 7월 21일 거제시 아주동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하청업체와 비공개 협상을 하고 있다. / 문재원 기자

김형수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장은 51일간 스스로 지핀 불구덩이 한복판에서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의 파업을 이끌었다. 유례없는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의 파업은 공권력 투입을 시사한 정부의 고강도 압박에도 불길이 꺾이긴커녕 전국적인 의제로 폭발했다. 이들의 요구가 하청노동자들의 먹고사는 문제만이 아니라 한국 조선산업의 지속가능성과도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파업은 여러모로 이례적이었다. 조선산업 생태계에서 가장 열악한 위치에 놓인 하청노동자들이 산업의 미래를 염려하며 목소리를 냈다는 점, 원청인 대우조선과 대주주인 산업은행, 정부에 포위된 형국이었지만 대중은 외면하지 않아 고립을 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랬다. 임금 4.5% 인상만 놓고 보면 하청노동자들의 패배라는 평가도 나오지만, ‘이제라도 근본 문제를 짚어보자’는 공감대를 이끌어낸 점을 주목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조선산업의 왜곡된 고용구조가 노동문제를 넘어 ‘산업의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 파업이기도 했다. 지난 7월 26일 경남 거제시 하청지회 사무실에서 만난 김형수 지회장은 “경영진과 정부의 나태함, 방만함, 비리로 인해서 조선소가 힘들어지는 걸 보며 가슴이 아팠다”며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조선소가 망해도 되겠지만, 인생을 갖다 바친 우리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싸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51일간 이어진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의 파업이 일단락됐다. 어떻게 평가하나. 합의 직후 ‘초라하고 걸레 같은 합의서’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게 사실이니까. 다 아쉽다.”

-임금 30% 인상이라는 노조의 당초 요구에 훨씬 못 미치는 4.5% 인상에 합의했다. 애초 요구가 현실성이 없었던 건 아닌가.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물건을 1만원에 팔려고 부러 3만원을 부른 게 아니라 정말 30%를 올려야 하는 이유와 명분이 있었다. 조선소의 가장 큰 문제이자 핵심이 임금이었기 때문이다. 20년차 숙련공도 최저임금 수준으로 받으면 하청노동자가 가족과 함께 살아갈 수 없다. 3~4년치 일감이 들어왔는데 정작 일할 사람이 없는 구조적 문제가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는 다른 곳보다 일이 위험하고 어렵고 더럽다. 숙련공이 그 돈 받고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그 산업에 종사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이 많을 때 산업의 경쟁력이 나오지 않겠나. 산업은행과 대우조선해양이 고민해야 할 문제인데 당사자들이 안 하니까 우리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합의를 왜 했나.

“가장 큰 이유는 조합원들이었다. 무사하게, 안 다치길 바랐다. 빼앗긴 임금을 되찾겠다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우조선, 산업은행, 현 정부의 (하청노동자에 대한) 태도가 어떻다는 것은 만천하에 알릴 수 있었다.”

하청지회는 조선업 불황이 닥친 2015년 이후 삭감된 임금 30%의 원상복구를 요구하며 지난 6월 2일부터 대우조선 옥포조선소 1도크 점거농성을 벌였다. 고공농성과 단식농성이 이어졌고, 유최안 부지회장은 스스로를 0.3평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다. 원청인 대우조선은 “손해액이 8100억원에 달한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을 내비쳤고, 대통령을 필두로 한 정부는 최후의 방법인 공권력 투입까지 언급했다. 파업은 51일 만인 지난 7월 22일 노사합의로 일단락됐다. 관건이었던 임금은 사측의 최초 제시안대로 4.5%만 인상하기로 했다. 하청노동자들의 패배라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합의사항에는 주목할 조항들도 있다. ‘일시적 물량증가에 따른 재하도급은 가능하다’는 단서가 붙었지만 하청업체의 ‘불법적 재하도급’을 금지하기로 했다. 하청노동자들의 고용안정을 위해 근로계약기간은 1년 이상으로 하기로 했다. 또 하청업체의 폐업으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를 ‘최우선으로 고용하기 위해 노사가 최대한 노력한다’는 조항도 담겼다. 하청노동자들이 22개 하청업체와 집단교섭을 벌여 단체협약을 체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합의 내용에 의미 있는 부분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어떻게 평가하나.

“의미나 성과라고 하기에는 초라하다. 어쨌든 단체협약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하게 돼 가장 의미 있는 것 같다.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은 지금까지는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겠다는 근로계약서만 썼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문서화했다.”

-기존에도 개별 하청업체들과 교섭을 하지 않았나.

“노조 대 회사의 단협이 아니라 노동자 대표와 회사의 합의였다. 이렇게 개별 합의를 해도 업체가 폐업하면 휴짓조각이 돼서 노동 3권이 형해화됐다. 이번엔 22개 하청업체와 단협을 체결한 점이 다르다. 조선소의 문제를 하청노동자들에게 모두 전가하는 폐해가 사라지길 바란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나은 교섭을 하겠다.”

-주요 합의사항 대부분에 단서조항이 달렸다. 예컨대 고용보장은 폐업업체 노동자를 ‘고용한다’가 아니라 ‘최대한 노력한다’ 수준에 그쳤다.

“그렇다고 의미가 없지는 않다. 근로계약기간을 1년 이상으로 맺으면 회사에 일이 없을 때 (하청노동자들을) 잘라내는 경향이 줄어들 수 있다. 이전에는 일당을 받는 하청노동자들이 한두 달짜리 계약서를 계속 갱신하면서 일했다. 회사가 언제든 내보낼 수 있어 노동자의 목숨줄을 쥐고 있었다. 또 폐업업체 노동자들의 고용보장을 위해 노사가 최대한 노력하기로 한 만큼 하청업체가 고용을 100% 마음대로 할 수도 없게 됐다.”

지난 7월 21일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1도크에서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왼쪽)와 정규직 노조가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 문재원 기자

지난 7월 21일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1도크에서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왼쪽)와 정규직 노조가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 문재원 기자

-‘재하도급 금지’가 들어갔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과제가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그래도 노조는 계속 이 문제를 알려가겠다. 사실 이 문제를 방치하면 회사에도 좋을 게 없다. 재하도급으로 일이 외주화되면 노동자가 품질에 신경 쓸 이유가 없어진다.”

-사회적으로도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의 현실이 이렇게까지 널리 회자한 적이 있나 싶다. 파업에 들어가기 전에 이 같은 상황을 예상했나.

“아무도 상상 못 했다. ‘한번 보자, 절실하게 요구하면 누군가 우리의 소리를 들을 거다. 그 사람들이 누군지 보자’고만 생각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들어주셨다. 파업이 이렇게 길어질 줄도 몰랐다. 도크 로테이션 기간(선박의 첫 번째 블록 탑재부터 완성된 선박을 진수할 때까지 걸리는 기간)이 통상 45일인데 그렇게까지 파업하면 현장이 어떻게 될까 막연히 상상만 했다.”

-파업기간 최대 고비를 꼽는다면 언제인가. 공권력 투입이 처음 거론됐을 때인가.

“그 얘기 나왔을 때도 힘들었다. 그렇지만 정규직 노동자들 동원해 무력침탈할 때가 가장 견디기 어려웠다. 현장에서 얼굴을 보던 분들도 있는데 속된 말로 개싸움 붙이는 것 같았다. 하청노동자 중에는 그때 몸이 다친 분들도 있다. 몸이 다친 거야 나으면 되는데, 마음이 다친 거는…. 유최안 부지회장이나 단식농성·고공농성하는 동지들을 보고 있는 것도 힘겨웠다. 유 부지회장은 먹고, 자고, 배변 활동까지 그 좁은 공간에서 했다. 인간 대접을 못 받는 우리 현실을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대우조선해양의 2만5000여 노동자 중 하청노동자는 1만7000여명에 달한다. 이중 하청지회에 가입한 하청노동자는 600여명에 불과하다. 이중 이번 파업에 적극 참여한 조합원은 100명 남짓이다. 하청노동자가 노조에 가입해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직을 걸어야 하는 현장 분위기를 반영한 결과다. 15년차 용접공으로 대우조선 하청업체에서 일했던 김형수 지회장도 2020년 1월 지회장 임기를 시작한 지 23일 만에 업체에서 해고됐다. 지금도 부당해고 소송을 벌이고 있다. 헌법이 정한 노동3권이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현실을 보여준다. 엄혹한 상황에서도 김 지회장 등 하청노동자들은 2017년 지회를 출범시키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왔다.

-집행부에 대한 체포영장이 기각됐지만 수사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오늘(7월 26일) 경찰에서 휴대전화를 압수수색해 갔다. 지난해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의 파워공 투쟁과 관련해서는 이미 형사재판을 받고 있고, 손해배상 소장도 받았다.”

-회사가 수천억대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는 관측도 많다. 감당이 되겠나.

“1000만원만 돼도 물질적으로 감당이 안 되는데 당연히 걱정은 된다. 그래도 노조 가입한 걸 후회한 적은 없다.”

-대화로는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고 생각하나.

“안 할 수 없었던 싸움이다. 지난해 교섭할 때부터 임금 문제를 계속 얘기했다. 충분히 대화로 풀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정부나 원청이나 산업은행이나 책임질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정부부터 조선업을 포기할 건지 말 건지, 고민을 해야 한다. 조선업은 인력 중심 산업인데 지금과 같은 임금구조로는 노동자들을 끌어들일 수가 없다.”

-파업 이후 정부가 인력난 해소를 위해 ‘외국인력 신속도입’ 제도를 추진한다고 한다. 원하청 임금 격차를 줄이기 위해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는 방안도 거론되는 것 같더라.

“조선업계가 한두 달 일한다고 숙련이 쌓이는 산업이 아니다. 이주노동자를 늘린다고 해법이 될 수 없다. 근무조건이 위험하고 열악하다 보니 지금도 조선소를 떠나는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밥 없으니 빵 먹으라는 얘기와 같다. 정규직 임금 삭감은 ‘노노갈등 2탄’으로 이어질 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말한 시장경제가 노동자 몫의 임금을 한정해 놓고 원하청이 나눠 가지는 것인가. 이건 시장경제도 아니고 총체적인 정치철학 부재다. 이번 파업에서는 정규직 노동자들과 서로 입장이 달랐지만, 이런 일이 실제로 추진된다면 하청노동자들도 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겠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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