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한다

법원만 쳐다보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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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4일, 헌법재판소에서는 사형제 폐지 위헌심판 사건의 공개변론이 열렸다. 한국은 1997년 12월 30일 이래 25년째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국제사회에서 실질적 사형제 폐지 국가로 분류되고 있다. 사형제가 헌재에서 다뤄지는 건 1996년, 2010년에 이어 세 번째다. 긴 세월 분분하게 오간 논의를 살피다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법률의 개폐는 국회의 책무다. 재판관들이 위헌성을 논박하며 복잡한 법 논리를 구성하지 않더라도 국회는 얼마든지 사형제 존폐 문제를 논의하고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국회는 실효적 논의를 한 적이 없다. 사형제 폐지를 위한 법안이 15대 국회에서 21대 국회에 이르기까지 모두 9건이나 발의됐지만 모두 소관 상임위원회인 법제사법위원회의 문턱도 넘어보지 못하고 부유하다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오늘을 생각한다]법원만 쳐다보는 나라

국회는 선거로 뽑힌 대표자들이 토론하고 고민하며 법률의 형태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곳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 자리한 다종다양한 갈등의 현장에서 국회의 역할은 갈수록 생경해질 뿐이다. 국민의 의견이 분분히 갈려 첨예한 대립을 이루는 이슈들일수록 더욱 그렇다. 많은 의원이 이런 이슈들에 입장을 표하는 일을 부담스러워한다. 괜한 이슈에 휘말렸다가 다음 선거에 안 좋은 영향이라도 받진 않을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모두 법원만 쳐다본다. 대법관들이 판례를 어떻게 바꾸는지, 헌법재판관들이 법률의 위헌 여부를 어떻게 판단하는지 마음 졸여 지켜볼 뿐이다.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않으니 개별 법률을 해석하는 방법과 관점을 바꾸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방도가 없는 탓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제도는 2018년 헌법재판소의 병역법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라 마련됐다. 낙태죄의 존폐도 헌법재판소가 결정했다. 올 4월부터는 동성 군인 간 성관계를 처벌해온 군형법 제92조의6(추행죄)을 합의된 성관계에는 적용할 수 없게 했는데,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종전의 판례를 뒤집었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국회가 제도의 필요성과 시대의 변화를 따져 충분히 토론하고 결론 냈어야 할 문제들이다.

논란이 일고 의견이 분분한 이슈일수록 민의를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이 토론하고 합의하는 과정이 뒷받침돼야 한다. 나와 다른 생각이 합의의 결과물이 될지라도 결과에 승복할 수 있게 만드는 민주적 정당성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오늘날 투표로 선출한 우리의 대표들은 법관들에게 책무와 권한을 외주 맡기고 있다. 우려스러운 일이다. 정당성이 빈약한 결과물은 또 다른 갈등의 씨앗이 될 가능성을 내포할 뿐이다. 고(故) 변희수 하사 강제 전역 사건의 판결문의 말미에는 강제 전역이 위법하다고 판시하면서도,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 문제 등은 국가 차원에서 입법적·정책적으로 결정할 문제’라는 단서를 남겼다. 국회가 할 일을 하지 않으니 시민들이 사회적 쟁점을 들고 법원을 찾아와 시비를 가리는 것 아니냐는 우회적 비판이리라. 길을 내는 일은 법원이 아닌 국회의 몫이다. 정치가 멈춰 있는 세상에서 더 갈 수 있는 길은 없다.

<김형남 군인권센터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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