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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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한 밤 되세요”, “푹 쉬세요” 문자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다. 언젠가부터 끝인사를 하기가 어려워졌다. 으레 해왔던 이 말이 누군가에게 건네는 인사로 너무 손쉬운 말은 아닌가 생각한다. 실제 상황과 무관하게 그저 아무 탈 없이 푹 쉴 수 있는 사람으로 지레 단정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고심 끝에 인사말을 고른다.

시각장애인들이 지난 6월 11일 키오스크 주문이 가능한지 시연해보기 위해 서울 중구 맥도날드 서울시청점을 찾았다. 혼자서 주문이 불가능하자 직원이 도움을 주고 있다. / 한수빈 기자

시각장애인들이 지난 6월 11일 키오스크 주문이 가능한지 시연해보기 위해 서울 중구 맥도날드 서울시청점을 찾았다. 혼자서 주문이 불가능하자 직원이 도움을 주고 있다. / 한수빈 기자

한 번 더 번거로워지면 한 번 덜 상처를 준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매번 말의 한계를 느낀다. 시각장애인들이 키오스크(무인정보단말기)를 사용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시연하려고 패스트푸드점을 찾은 현장을 최근 취재했다. ‘소리 없는 벽’과도 같은 기계 앞에서 하염없이 손을 배회하는 이들과 함께 비장애인 중심으로 설계된 시스템을 비판하는 이야기를 나눴다. 몇몇 시각장애인에게 명함을 받고 나도 명함을 건네려던 찰나, 점자 없는 매끈한 명함이 부끄러워졌다. 그동안 어떤 언어를 쓰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왔던 걸까.

많은 말 속에서 하루를 살아간다. 어떤 말로 세상은 조금 더 살 만한 곳이 되지만, 어떤 말은 누군가를 가두고 소외시킨다. 고려대 미화·경비·주차 노동자들은 올해 시급 400원가량을 인상하고, 땀에 전 몸을 씻을 수 있도록 샤워실을 늘려달라고 지난 3월부터 요구해왔다. 학교가 침묵으로 일관하자 학교 본관 1층을 점거했다. 수년째 일하고도 비정규직을 벗어나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도저히 안 돼서 마음먹고 원청(고려대)에 들어오게 됐다”고 했다. 학교는 이를 “무단 침입”으로 규정하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학교가 “샤워시설이 어떤지 보겠습니다” 정도의 말이라도 했다면 학교에서 필수노동을 하는 이들이 학교 밖의 하청업체 직원에 머물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작 말을 필요로 하는 곳에는 말이 가닿지 않고 있다. 발달장애인과 가족이 목숨을 잃는 일이 끊이지 않자 시민단체들은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 인근에 있는 삼각지역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49재를 지냈다.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 관계자들 누구도 분향소를 찾지 않았다. 24시간 지원체계 구축을 요구하며 국가의 말을 간절히 바랐던 이들은 “정부가 또 한 번 고인들의 죽음을 외면했다”고 비판했다. 대통령의 말은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리는 도어 스테핑(약식 기자회견)에서 쏟아진다. “과거에 민변 출신들이 아주 도배를 하지 않았느냐”(검찰 편중 인사를 묻는 질문에), “제가 대통령은 처음이라… 어떻게 방법을 좀 알려주시라”(김건희 여사 논란과 관련해서)….

이승우 작가의 소설 <마음의 부력>에서 큰아들 성준을 갑작스레 잃은 어머니는 작은아들 성식에게서 걸려온 전화마다 “성준이냐”고 묻는다. 자신임을 알리며 ‘오해’를 잡아주던 성식은 다음번 전화에서는 “네. 성준이에요. 별일 없지요?”라고 운을 떼며 어머니에게 회한으로 남은 형의 ‘카페 계약’ 이야기를 꺼낸다. 성식이 한 이 말로 어머니는 죽은 아들의 살아생전 바람에 응답하지 않았다는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었을지도 모른다. “그 역할은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부여받은 것 같았다”고 성식은 말한다. 궁금하다. 오늘 당신의 말은 누구를 향해 있었고, 어떤 역할을 부여받았는지.

<박하얀 사회부 기자 whit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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