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이 땅에 홀로 살아남은 티라노의 속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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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혁 시인의 신간시집 <다음 창문에 가장 알맞은 말을 고르시오>

눈으로 보고 겪은 것은 다 추억이 됩니다. 슬며시 눈을 감으면 아련히 풍경이 펼쳐집니다. 같이 뛰놀던 골목을 떠올리면, 금방 동네 조무래기들의 웃음으로 가득 찹니다. 추억은 과거의 기억을 소환해 눈앞에 펼쳐놓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괜히 친근한 것이 있습니다. 지구상에 존재했지만 책에서, 영화에서 본 공룡입니다. 공룡은 인간이 존재하기 전에 살았습니다. 돌 속에 남아 있는 공룡의 뼈를 통해 공룡의 형태를 알 수 있습니다. 용암에 다 타버린 살과 털은 그저 상상할 뿐이지요. 상상은 현실을 재현하거나 왜곡할 수도 있지만, 꿈을 꿀 수 있게 해줍니다. 평생 그 꿈을 품고 살아가지요.

기혁 시인(왼쪽)과 <다음 창문에 가장 알맞은 말을 고르시오> 표지 / 리메로북스

기혁 시인(왼쪽)과 <다음 창문에 가장 알맞은 말을 고르시오> 표지 / 리메로북스

시인의 길은 순수로 기억되는 마음 장마 초입에 신박(신기하면서도 참신)한 시집 한권을 받았습니다. 무서우면서도 우스운 티라노사우루스 그림이 표지 중앙에 떡하니 그려져 있는데, 꼭 들어가야 할 제목이나 저자도 없었습니다. 위쪽에는 로고가 들어가 있습니다. 시집이라는 선입견 없이 보면 그림엽서 같습니다. 시집을 슬쩍 뒤집었더니, 거기 저자와 제목이 있었습니다. 순간 앞표지와 뒤표지가 바뀐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지만, 아니었습니다. 책을 펼치면 기존 시집의 체계와 다르지 않았으니까요.

이 시집은 리메로북스가 출판한 첫 번째 책입니다. 스페인어로 라임장수를 뜻하는 리메로(limero), 장르적 규약을 뛰어넘는 다양한 기획출판을 통해 라임(lime)처럼 상큼한 책과 콘텐츠를 만들겠다는 의미라는군요. 표지 그림은 시인의 아들이 다섯 살 때 그린 것이라 하네요. 굳이 아이가 그린 공룡 그림을 선택한 이유는 이미 멸종했지만, 어린아이의 마음속에서 전혀 다른 색과 형태로 기억되고 재생되는 모습이 문학의 순수성과 닮았기 때문이랍니다. 순수하게 기억되는 마음을 담은 것이 아들이 그린 티라노사우루스 그림이고, 출판사가 추구하는 방향이고, 시인이 갈 길이라네요.

기혁 시인(1979~ )은 2010년 ‘시인세계’를 통해 시로 등단한 이후, 201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했습니다. 2014년 첫 시집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로 김수영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2018년 두 번째 시집 <소피아 로렌의 시간> 이후 4년 만에 낸 세 번째 시집입니다. 약력을 보면 “라임처럼 상큼한 책을 파는 1인 출판사 리메로북스에서 노조위원장을 맡고 있”다면서 “LP 음반과 진공관 앰프를 좋아하고, 스토리 가공과 신상 막걸리에 관심이 많”다고 합니다. 1인 출판사의 노조위원장이라니, 참 재미있는 발상입니다. 신상 막걸리도 좋아한다니, 이와 관련된 책도 언젠가 나오지 않을까요.

속수무책으로 날아오는 차고 시린 슬픔 시집에는 “잉크 대신 피를 넣은 만년필”(‘개나리 벽지’)로 쓴 모두 55편의 시가 수록돼 있습니다. “밟아도 죽지 않는 고독”(이하 ‘노루잠’)과 “매일 밤 자신을 닮은 덫”을 놓는 심정으로 쓴 시에는 “겨울이 가면 절필”(‘개나리 벽지’)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1인 출판사를 차리고 ‘티라노 독서 시리즈’를 시작한 심정도 이와 다르지 않겠지요.

연재물의 첫 시집 ‘티라노 처음 독서’에는 공룡 관련 시가 ‘티라노 눈사람의 사랑’ 딱 한편 실려 있습니다. 티라노 눈사람은 “눈도 사람도 공룡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입니다. 쌓인 눈을 뭉쳐 만든 티라노 눈사람은 “공룡인데/ 이토록 가벼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소한 식욕 하나가/ 자연사를 바꿀 수도 있”다네요. 시인은 짝을 찾지 못한 채 티라노 눈사람의 “차고 오래된 고독”에서 “청춘의 한 방식”을 떠올리면서 “나도 공룡”임을 고백합니다. “생면부지의 얼굴을 붙들고 멸종된 인연을 수소문하던 지난날에도 가슴 속 담벼락엔 타인의 이름 대신 공룡을 그렸”다고 털어놓습니다. 공룡 그림을 그린 건 아들이지만, 시인의 마음속에는 이미 공룡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화석 기록에 의하면 공룡은 약 6500만년 전에 사라졌습니다. 갑작스러운 공룡의 멸종 원인은 백악기 말에 일어난 조산운동(대규모의 습곡산맥을 형성하는 지각변동), 지구와 소행성의 충돌 등을 꼽습니다. 공룡처럼 인류도 화산활동도 없이 땅이 솟아오르거나 소행성 충돌로 멸망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삶은 참으로 허무할 것입니다. 시인이 우주에 관심을 두는 이유입니다. 시인은 “처음엔 우주라는 말을 썼”(‘손에 묻은 사인펜 자국을 지우며’)고, “돌의 내부에 우주가 있고/ 그 어디쯤 신의 거처가 있다”(‘탑신에 내리는 눈’)고 믿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멸망할지 모르는데 삶은 과연 내 것이 맞을까요. 하여 시인은 “삶으로부터 가장 먼 위치”(이하 ‘태양극장’)에서 “무성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한없이 유연”하게 삶을 관조합니다. 현재의 삶을 무대에 올리거나, 내가 아닌 타인의 삶을 추구하거나 “사람들 사이에/ 선을 그으며 살아왔”(‘팬터마임’)습니다. “마음이 아플 땐 돌멩이를 던”(‘노련한 강물과 오늘의 슬픔’)지거나 “속수무책으로 날아오는 차고 시린 슬픔”(이하 ‘눈사람 신파극’)을 견뎌야 했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사랑은 신파 같지 않을까요. “움직이는 눈사람을 신파라고 여긴다면 사람의 폐허엔/ 겨울만이 발”을 디디면서 말입니다.

조강석 문학평론가 겸 연세대 국문과 교수는 추천사에서 “이 시집에서 독자는 사유-이미지로 분주한 쓸쓸함을 읽는다. 틀림없이 이 시집의 배음은 어떤 쓸쓸함”이라고 했습니다. 또 “기혁의 이미지는 집중된 사유가 낳는 적요와 놀고 있”는데, “외로이 높은 노래”라 했습니다. 이 땅에 홀로 살아남아 사람들 틈에 사는 티라노사우루스의 속울음 같은.

시인의 말

▲빛들의 수다 | 설태수 지음·예술가·1만5000원

[김정수의 시톡](11)이 땅에 홀로 살아남은 티라노의 속울음

시(詩), 고맙고
과분하다.
또 다른 전환점이
됐으면 좋겠다.

▲검은 앵무새를 찾습니다 | 임경묵 지음·시인의일요일·1만원

[김정수의 시톡](11)이 땅에 홀로 살아남은 티라노의 속울음

당신은 검은
앵무새입니까?

▲그 여름의 서쪽 해변 | 고미경 지음·현대시학·1만원

[김정수의 시톡](11)이 땅에 홀로 살아남은 티라노의 속울음

가만히 뒤돌아보니
내 마음이 혼자서 걸었던 길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은유의 강 | 수피아 지음·천년의시작·1만원

[김정수의 시톡](11)이 땅에 홀로 살아남은 티라노의 속울음

구름의 어려운 시절을 따라가 보면 어느덧
시 한 편이 펼쳐지는
들판에 다다른다.

▲네가 오는 시간은 연시 | 임지나 지음·상상인·1만원

[김정수의 시톡](11)이 땅에 홀로 살아남은 티라노의 속울음

하염없는
더 하염없는 자,
늘 부족하고
가슴속만 만월이다.

▲그 벽을 껴안았다 | 김이담 지음·애지·1만원

[김정수의 시톡](11)이 땅에 홀로 살아남은 티라노의 속울음

아픔을 딛고
이 땅을 살아가는 꽃들에 나의
토막말들이 눈물을 닦아주는 손수건이
될 수 있다면.

<김정수 시인 sujungih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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