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검은 벽돌 건물, 그곳의 악몽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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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1호선 남영역에 잇대어 남영동이 있다. 용산구 남영동은 현대사의 상처와 변곡점이 남아 있는 곳이다. 남영역 플랫폼에서 담벼락 넘어 보이는 검은 벽돌 건물이 남영동의 상징이던 때가 있었다.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1976년에 경찰청 치안본부의 대간첩 수사를 위해 만들었다. 지금은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다시 나기 위해 공사 중이다. 본디 목적을 뛰어넘어 대공분실은 언제부턴가 고문과 조작의 악명을 뒤집어썼다. 영화 <1987>이나 <남영동 1985> 등이 그곳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잘 보여준다. 세월이 변했어도 남영역에서 바라보는 검은 벽돌 건물은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를 던진다.

남영역은 남영동의 중심이다.

남영역은 남영동의 중심이다.

남영역은 일반적인 전철역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기차가 지나는 철교에 이어져 역이 있는 형국이라 겉보기에도 낯설다. 역을 나서자마자 남쪽으로 꺾인 샛골목을 들어서면 청년 주택을 짓는 건축현장이 있고, 곧바로 길게 철조망이 쳐진 담이 나온다. 그곳에 검은 건물이 있다. 골목은 대체로 평범하지만, 성인용품 가게와 각종 모텔이 들어서 있어 정치적이기보다는 육감적이다. 대공분실이 있던 곳과 맞닿아 ‘미군 위문 협회(USO)’ 건물이 있었다. 지금은 철수하고 없다. 미8군 쇼 무대를 주관하던 곳으로 유명했다.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옮겨가며 남영동 곳곳엔 이렇게 버려진 미군 관련 시설이 여럿 보인다. 그 남쪽으로 삼각지가 있고, 전쟁기념관이며 요사이 가장 주목되는 ‘용산 대통령 집무실’이 있다. 남영역 남쪽 골목길은 여기서 그친다.

일반적인 전철역과는 다른 곳

큰길인 한강대로를 건너면 검은 건물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분위기의 남영동 골목길을 볼 수 있다. 미군부대가 있던 담벼락이 길게 이어지고 길을 따라 반듯한 골목이 이어진다. 오래된 동네라 대충 보이는 간판들은 40여년 전 분위기고, 그 연륜만큼 오래 장사한 가게들이 자리 잡고 있다. 칼국숫집과 해물탕집, 횟집과 오래된 미용실이며 무술도장도 사이사이 있다. 젊은이가 주고객인 골목상권이라 세련되게 새로 고친 고깃집을 볼 수 있고, 산뜻한 카페와 빵집도 눈길을 끈다. 일제강점기에 지은 건물도 있지만, 그 속을 채운 건 요즘의 문화다. 젊은 감각은 놀랍도록 색다르고 세련됐다.

골목에 잇댄 철조망 쳐진 담벼락엔 그곳이 미군 관련 시설물임을 알리는 간판이 아직도 붙어 있다. 간판뿐 아니라 미군이 오가던 흔적은 오래된 식당에서도 볼 수 있다. 남영동 골목길의 식당 대부분은 다른 곳과 비슷한 메뉴를 다룬다. 이 골목만의 독특한 식당이 너댓곳 눈에 띈다. 바로 스테이크 전문점. 소시지구이와 부대찌개도 함께 팔고 있다. 가게들은 대략 수십년 동안 미국식 스테이크를 내놓고 있단다. 겉보기엔 일반 동네 식당과 다를 바 없다. 메뉴는 남영동만의 독특함이 묻어 있다. 이와 비슷한 식당은 아무래도 동두천이나 송탄쯤 가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대낮부터 스테이크를 즐기는 젊은 손님들이 가게마다 있다. 가게 분위기는 얼핏 보기에도 연륜과 실력이 엿보인다.

다양성과 새로움이 남영동 골목을 채우고 있다.

다양성과 새로움이 남영동 골목을 채우고 있다.

골목 내내 먹고 마시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사이사이 여관과 모텔들이 들어서 있다. 대부분의 환락가와 비슷한 모습이다. 여관들의 호시절은 한참 전에 지난 듯했다. 문 닫은 곳도 있고 임대 안내판을 붙인 곳도 눈에 띈다. 길 건너편으로 새롭게 단장한 호텔과 고급 모텔들에 손님을 많이 빼앗겼다고 한다. 어떤 곳은 게스트하우스로 간판을 바꿔달았지만, 팬데믹 여파로 그동안 어려움이 많았으리라 짐작이 갔다. 늘 좋은 날은 없고 그렇다 해 늘 지옥 같지만도 않은 것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도심지에 가까운 금싸라기 땅이라 몇몇 공동주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집을 상업용으로 쓴다. 군데군데 도심에서는 드물게 넓은 공간을 끼고 앉은 창고나 공장도 보인다. 골목길을 지나면서 참 색다른 모습과 분위기가 혼재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너무 혼잡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고요하지도 않은, 적당한 혼돈이 골목에 서려 있다. 미군부대가 있던 자리를 끼고돌면 용산고등학교가 나온다. 그 건너편으로 수도여고가 있었다. 지금은 이사했고, 서울시교육청(2024년 이전 예정)이 그 자리에 들어서 있다.

철길 굴다리를 지나면 숙명여자대학이 있어 남영동으로 젊은이를 끌어들인다. 1978년쯤 4대문 안 도심지역에 학원을 금지하면서 서울역 인근 갈월동과 남영동 일대에 입시 전문학원들이 몰려들었다. 중고등학생과 대학생은 물론이고 학원생과 재수생들이 남영동 일대를 메웠다. 그다지 크지 않은 권역이지만 젊은이들이 모여 놀기에는 충분했다.

오래된 가게들 사이로 젊은 감성의 가게들이 함께 있다.

오래된 가게들 사이로 젊은 감성의 가게들이 함께 있다.

교육환경 바뀌며 변한 거리

교육환경이 바뀌면서 학원도 노량진과 강남 등지로 이사를 했고, 인터넷 강의 등으로 대치되면서 변화를 맞았다. 지금은 뒷골목 식당 아저씨만이 당시를 기억한다. “고깃집보다 여기저기 분식집이 더 많았다. 학생들이 많다 보니 허구한 날 싸움질도 많았고 골목이 소란했다. 그래도 그땐 참 활기가 있어 좋았다.” 그땐 지금처럼 너그럽지는 않았지만, 세월은 송곳 같던 사람의 감정도 무디게 만든다. 마을의 ‘성장 동력’이 떨어졌는지 큰 길가에도 낡은 상가들이 여럿 보인다. 그중 몇은 리모델링을 위해 건물을 비워 더 을씨년스럽다. 용산시대가 열린다니 그 곁의 남영동도 좀더 나아지리라는 생각이 든다.

억압과 공포의 상징이던 남영동 대공분실은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다시 나고 있다.

억압과 공포의 상징이던 남영동 대공분실은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다시 나고 있다.

남영동엔 유명한 극장 3곳이 있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있던 성남극장, 재개봉관 중 시설 좋기로 유명했던 금성극장 그리고 남영극장이다. 당시 영화관은 개봉관을 일류 극장이라 했고, 재개봉관을 이류라 불렀다. 동시 상영을 하는 변두리 극장을 삼류라 불렀다. 요즘 시대에는 이해할 수 없는 통칭이다. 일류 개봉관에서 돌고 돈 필름이 재개봉관을 거쳐 동시상영관까지 올 무렵이면 상태가 좋지 않았다. 스크린엔 흠집으로 비 내리는 화면을 보여주기도 했으니 일류와 삼류 사이의 격차가 분명히 있었다. 금성극장은 1963년 최신식 시설을 갖춘 개봉관으로 문을 열었다. 곧 재개봉관이 됐다.

금성극장은 홍콩 무협영화의 전성기와 시대를 함께했다. 날아다니는 칼날과 화려한 초식에 눈이 팔린 까까머리 학생들은 관람 불가를 피해 몰래 극장을 드나들었다. 영화의 전성시대가 저물어가면서 극장쇼의 시대가 열렸다. 특히 금성극장과 성남극장의 쇼무대는 알차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멀티플렉스 극장 시대가 오면서 1992년 금성극장이 먼저 문을 닫았다. 성남극장은 그 긴 역사만큼 오래도록 버티다가 2003년에 결국 문을 닫았다.

철길 사이사이 청파동으로 이어지는 굴다리들이 남영동의 상징 중 하나다.

철길 사이사이 청파동으로 이어지는 굴다리들이 남영동의 상징 중 하나다.

성남극장 뒤편 주택가엔 박완서의 소설 <나목>에 등장하는 그림공장들이 있다. 귀국하는 미군을 위한 초상화부터 풍경화와 정물화 등 팔릴 만한 갖가지 그림을 찍어내던 그림공장들은 지금은 희미한 흔적만 남아 있다. 남영동 전철역으로 통하는 길목의 한 그림 가게 주인은 “당시엔 실력 있는 화가들도 먹고살 길을 찾아 공장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이 많았다. 지금은 남영동에 그림공장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라고 사정을 전했다. 언젠가 남영동 골목 어느 한편에 짙은 물감 냄새가 배어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주민과 함께 나이를 먹은 집들

남영동에서 서울역 쪽으로 다가서면 갈월동과 동자동이 이어진다. 골목 안 풍경은 이곳 골목들이 남산을 중심으로 펼쳐졌음을 알게 한다. 낮은 울타리의 그만저만한 집들이 이어지고 1970~1980년대 지은 빌라들도 눈에 띈다. 골목은 대체로 고즈넉하다. 전형적인 주택가의 모습이다. 구시가의 고질병인 주차난이 한눈에 드러나 좁은 골목의 반은 주차된 차들이 점령하고 있다. 슈퍼라는 이름의 구멍가게가 여전히 건재한다는 사실은 반가웠다. 부동산 주인은 “도심에서도 비교적 방값이 싼 편에 속한다. 예전엔 미군 가족들도 많이 살았는데 지금은 다 평택으로 갔다”고 말했다.

젊은 감성의 카페들이 골목 곳곳에 숨어 있다.

젊은 감성의 카페들이 골목 곳곳에 숨어 있다.

1980년대 이후 변화를 멈춘 듯 새롭지는 않지만 차분한 편이다. 종종 마주치는 주민들은 대체로 연령대가 높아 보였다. 미술학원과 음악학원들도 눈에 띄어 어린 학생들도 상당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골목 깊숙한 곳에 채소 과일가게와 옷 수선집도 보여 골목길의 연륜을 느낄 수 있다. 주민과 함께 집들도 나이를 먹어간다. 군데군데 건축 수리점이 있다. 한 수리점 주인은 “터가 좀 넓은 집들은 예전에 집주인이 밀고 빌라를 지었다. 1층짜리 오래된 집들은 주인과 함께 나이를 먹었다. 사람이나 집이나 오래 쓰면 고장 나는 일이 태반이라 고치고 손볼 것투성이다. 그 덕에 나 같은 사람도 먹고사는 게 아니겠나”라며 웃었다.

남영동의 골목길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도 세월의 나이테가 드러나 있어 걷는 맛도, 보는 재미가 있다. 젊은이들은 여전히 그 골목을 기웃거리며 무엇인가를 찾는다. 좀더 오래된 주택가는 서울 도심의 옛 주택가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산책하며 마음에 무엇인가를 떠올리기에 좋은 길이다. 다채로움과 정숙함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배어 있다.

남영동 골목엔 격변의 시기가 녹아 있다. 우리가 어찌 살아왔는지가 길 위에 쌓여 있다. 한때는 민주주의의 적들도 이 골목의 주인이었다. 지금은 공사 중인 검은 벽돌의 대공분실 건물을 바라보면 그들은 무엇이 그리 두려웠으며, 세상에 어떤 공포를 강요했는지 묻게 된다. 한강대로를 사이에 두고 젊은이의 자유분방함과 억압의 공간이 공존했다는 사실도 놀랍다. 고문의 시절이 그다지 오래전이 아니었음을 돌이켜 보면 우리 사회엔 아직도 더 많은 시행착오가 남아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침묵하지 않고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거듭 말할 때 세상은 미래를 향해 더디게나마 무거운 발자국을 내디딜 수 있다. 남영동 골목은 그 희망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가 들면 남영동 골목길의 검은 벽돌 건물 앞을 지나가 보자. 열린 세상을 향한 길이 여기에서 다시 시작된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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