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이 여겨서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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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희 여사가 지난해 12월 26일 허위 경력 의혹 등에 대한 입장문 발표를 위해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 입장하고 있다. / 국회사진기자단

김건희 여사가 지난해 12월 26일 허위 경력 의혹 등에 대한 입장문 발표를 위해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 입장하고 있다. / 국회사진기자단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끝난 지난 6월 2일 강모씨에게 전화가 왔다. 일전에 ‘시각장애인 외면하는 지방선거’ 기사를 쓰며 알게 된 사람이다. 시각장애인인 그와의 이전 통화는 사전 선거를 다뤘다. 그는 비장애인용 투표용지를 받아 투표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증언했다.

이번 전화는 다른 용건이었다. 은행 업무를 위해 발급되는 일회용 비밀번호(OTP)가 시각장애인이 쓰기에 너무 불편하다고 했다. 정치부 기자가 다루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소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부 기자에게 전달해두겠다”가 그에게 건넬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아, 그렇습니까.” 그는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눈치였다.

기자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부르지만 하는 일은 부서마다 다르다. 사회부 기자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대소사를, 정치부 기자는 국회나 대통령실, 외교안보 부서의 현안을 다룬다. 현상을 엮어 의미를 길어내는 기획기사도 종종 쓰지만 대부분 소속 부서가 담당하는 기관과 조직(소위 출입처)에 관련된 내용으로 한정된다. 기자들에겐 상식이다. 독자 시민에게도 그럴까.

박원순 서울시장이 사망한 2020년 7월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성추행 의혹 피고소…박원순 서울시장 사망’ 기사를 두고 누군가 문제를 제기했다. 박 시장 사망을 경찰에서 공식 확인하기 전에 어떻게 사망 기사를 작성했냐고 따졌다. 박 시장의 사망 사실을 경찰이 확인한 시각은 신고 다음 날인 10일 0시 1분. 그 기사의 최초 입력 시각은 9일 오후 9시 5분이었고, 최종 수정 시각은 10일 오전 2시 16분이었다.

사정은 단순했다. 처음엔 ‘실종’이라고 썼다가, 사망 사실을 확인한 뒤 ‘사망’이라고 고쳤다. ‘굳이 새 기사를 쓰지 말고, 기존 기사를 업데이트하자’가 당시 뉴스룸의 합의였다. 그땐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니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실종 단계부터 ‘박 시장 사망’이라는 지라시가 돌아다니는 상황이었다. 경찰의 수색 작업은 ‘쇼’에 불과하며, 부러 사망 사실을 뒤늦게 확인했다는 음모론이 횡행했다. ‘경향신문처럼 큰 언론사도 9일에 사망 기사를 썼다’는 절반의 사실이 가짜뉴스의 근거로 작용할 수 있었다.

지난해 12월 26일엔 기자들이 욕을 많이 먹었다. 이제는 대통령 부인이 된 ‘김건희씨’의 허위 이력 의혹 관련 기자회견에서 질문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당시 윤석열 후보 측이 김씨와의 질의응답을 지양해달라고 요청했고, 기자들이 받아들였다고 들었다(당시 휴무였다). ‘김씨는 정치인이 아니어서 질의응답이 낯설 수 있다’, ‘대신 사실관계를 공보 담당자가 충분히 설명하겠다’는 취지의 요청이었다고 한다. 현장에 있지 않아 판단하기 어렵지만, 나도 물밑 협상을 받아들였을 것 같다. 김씨가 회견장에서 나갈 때 붙잡고 물어보면 되니까.

실제로 기자들은 회견장 앞에서 대기했다가 김씨에게 ‘허위 경력 의혹을 모두 인정하는 것이냐’는 등의 질문을 했다. 방송에 나간 건 질문하지 않는 기자들의 모습뿐이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게는 질문을 쏟아내더니’ 등의 조롱이 쏟아진 배경이다. 질문을 하지 않으면 기자들이 오명을 쓰게 된다고, 여러 언론사가 합심해 질의응답 기회를 받아냈으면 어땠을까. 생방송 기자회견이나 토론회가 의미 있는 건 권력자가 당황해하거나 답변을 회피하며 침묵하는 모습도 때로는 중요한 정보가 되기 때문이다. 부당한 비난도 많지만, 언론이 변화와 해명에 게으른 건 아닌지도 생각해본다. ‘격앙’됐던 강씨가 누그러진 건 “가볍게 생각해서가 아니라”는 말을 여러 번 거듭한 뒤였다.

<조문희 정치부 기자 moon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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