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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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마켓에서 카세트 라디오를 충동 구매했다. 테이프가 한개 들어가는 골드스타 라디오의 중고가는 2만5000원. 예약금 5000원을 보내놓고 주말 방문 일정까지 잡아둔 마당에 후회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대체 왜 지금 카세트를? 살림을 합친 이후 짐을 줄이라고 배우자를 매일 닦달해온 내가 왜 이런 결정에 이르렀는가.

반야심경을 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잠시 불국사의 어린이 법회에 나갔다. 그때부터 지금껏 ‘색즉시공 공즉시색’까지만 왼다. 지난달 외할머니의 사십구재 때 따라 읊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모들의 웅얼웅얼 소리를 부러워할 뿐. 이런 것을 입속으로 외는 데서 오는 마음의 평화. 잊은 지 오래인 그 평화가 그리웠다. 태정태세문단세…. 뭔지도 모르는 걸 끝까지 외면 할아버지가 크게 칭찬하곤 했다. 내처 구구단까지 외웠더니 ‘신동’이라 했다. 학교에 입학했을 때 구구단은 이미 까먹은 상태였다. 그것도 모르고 “안다” 말하고 다니다가 곱하기 시험이 있던 날 말 그대로 경을 쳤다. 후로 오래 암기의 무용함을 주창했다. 그런 것들이야 검색하면 다 나오지 않느냐고.

30대 중반이 돼 다시 이런 것들을 그리워한다. 배회하는 정서를 붙잡아둘 데를 본능적으로 찾는 것 같다. 종일 너무 많은 소식이 눈으로 귀로 들어온다. 엄지손가락을 밀어 ‘쓱쓱’ 스크롤을 내리는 동안, 기뻤다가 슬펐다가, 분노했다가 안도했다가, 몹시 바빠졌다가 또 쉬고 싶어졌다가, 들쭉날쭉한 감정을 눈치채고 스스로 당혹스러워하며 빠져나온다. 그러고 나면, 어디라도 영혼을 정박시켜야 할 것 같은 절박감이 들었다. 시는 너무 무겁고 노래는 소리를 크게 내야 하니, 입속으로 중얼거려도 되는 불경 정도면 딱이겠다 싶었다.

이런 얘기를 지인에게 했더니 한병철의 <리추얼의 종말>을 추천했다. 알아듣기 어렵게 쓰여 있는데, 하여간 마음에 남는 바는 있는 책이라 했다.

1996년 7월 29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우울증 치유 음악’ 카세트테이프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6년 7월 29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우울증 치유 음악’ 카세트테이프 / 경향신문 자료사진

“오직 반복되는 것만 명백히 심장에 도달한다.” 그 책에서 이 문장을 만났다.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바로 그때였다. 반야심경이 다시 소환됐다. 이번에야말로 외우고 말리라. 그러려면 어느 스님의 목소리가 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걸 유튜브로 재생하는 건 영 내키지 않는 일이다. ‘딸깍’ 하는 카세트테이프의 재생 소리와 손가락의 느낌이 그리웠다. 오래된 카세트에서 테이프가 잠시 풀려나오다 소리가 새어나오던 순간, 그 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당근마켓에 들어갔다. 오래된 카세트가 주르륵 나왔다. 얼른 하나를 집었다. 마음이 바뀌기 전에 재빨리 5000원을 보내버렸다.

시절이 켜켜이 물건으로 쌓여 남는 일. 땅이 남아나는 곳으로 이주하지 않는 한 그럴 일이 이젠 없을 것이다. 오래된 것을 쓰려는 욕구, 소비하지 않으려는 노력마저 뭔가 사는 것으로 귀결된다. 한병철은 책에서 오늘날 개인의 행위가 ‘자아’에 집착하고 ‘소비’로 (자아를) 실현하는 점을 신랄하게 비꼰다. 바로 그 책을 사서 읽다가, 그가 옹호하는 ‘의례’에 이끌려 반야심경을 떠올린 내가 이른 곳이 당근마켓이다. 이 미로에서 탈출할 방법이 있을까?

<최미랑 뉴콘텐츠팀 기자 r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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