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백이 우리를 구할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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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거리를 걸으면 재미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너도나도 똑같은 핸드백을 손에 들고 다니는 모습이다. 대유행 중인 이 핸드백의 크기는 가로세로 15㎝ 정도다. 색상은 화이트가 압도적이지만 블랙이나 브라운도 가끔 눈에 띈다. 부직포로 만들어 가볍고, 얇은 손잡이는 고무 재질이라 신축성이 뛰어나다. 올 S/S시즌(봄과 여름)을 강타한 이 핸드백의 정체는 마스크로 만든 ‘마스크백’이다!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된 지난 5월 2일 서울 중구 명동에서 시민들이 마스크를 손에 들고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된 지난 5월 2일 서울 중구 명동에서 시민들이 마스크를 손에 들고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2년이었다. 바이러스가 모두의 일상을 폭격한 세월이. 숫자로 보면 짧지만 이야기로 보면 한 세기만큼 길었다. 자유롭게 나들이를 가거나 늦은 시간 지인들과 모이던 당연한 일상이 통제됐다. 여기서 그쳤다면 행운아다. 바이러스는 하필 불공평하기까지 해서 가진 것이 없거나 몸이 약할수록 더 자주, 더 크게 앓았다. 자영업 사장들의 고통이 아득한 높이로 쌓여가는 동안 땅값이 내려갔다는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바이러스가 불공평했던 걸까. 아니면 이곳은 원래 그런 식이었을까.

긴 답답함이 미움을 키웠다고도 한다. ‘코로나 앵그리’라나. 한 조사를 보면 10명 중 8명이 코로나 앵그리를 겪었단다. 8명 중 2명은 그 감정이 ‘각종 혐오 감정의 극대화’로 이어졌다고 한다. 낙인찍고 증오하면서 골이 갈수록 깊어졌다는 이야기겠다. 서로에게서 ‘인간의 얼굴’을 읽기 어려워져 그랬나 생각해보기도 했다. 모두가 얼굴의 절반을 가린 채 살았으니까. 가까운 사이라면 서로 ‘인간의 얼굴’을 보았겠지만, 먼 존재일수록 ‘인간의 얼굴’을 발견하긴 어렵지 않았을까. 그런데 정말 그것 때문만일까.

나침처럼 자꾸 부정을 가리키는 질문들 속에서, 그나마 확실하게 봤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우리 모두 어쨌든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나를 보호하는 일이면서, 다른 사람에게 바이러스를 옮기지 않겠다는 일종의 배려였다. 우리가 불편과 분노, 혐오와 증오 속에 2년을 살면서도 얼마간 남을 생각했다는 것, 그 증거를 산책하는 이들의 손에 들린 마스크백에서 읽는다. 인류가 먼 훗날 나락의 끝자락에서 어찌저찌 살아남는다면 그 이유는 아마도 저 작은 마스크백에 담겨 있지 않겠나 싶기도 하다. 너무 가벼워 의식조차 못 한 채 팔목에 끼거나 들고 다니는 마스크처럼,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어떤 성정 속에.

분노와 혐오가 소용돌이치는 판에 우리 안의 순함을 믿어보자고 말하려니 무척 민망하다. 나이브해서가 아니라 너무 어려운 요청이라서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거의 불가능한 미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희망은 언제나 절망보다 난도가 높은 일이었다. 손끝마다 나풀거리는 마스크백을 보노라면 그게 꼭 그렇게 불가능할 것 같지만도 않다. 마스크 한개에 10g쯤 나간다고 한다. 인식하지 못해도 분명히 존재하는, 그 무언가가 우리에게도 분명 있지 않을까.

<조해람 사회부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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