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경제학’ 한걸음의 가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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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면서 보상까지 얻는 다양한 걷기앱 성행

스마트폰에서 확인한 지난 5월 한 달간 하루평균 걸음 수는 6350걸음이었다. 거리로 치면 4.1㎞ 정도다. 성인 남성 평균이 6000걸음 정도라는데 딱 그 수준이다. 사무직의 하루평균 걸음 수는 5000걸음 정도라고 한다. 올해 들어 지난 5월 말까지 기자의 하루평균 걸음 수는 5057걸음, 이동거리는 3.3㎞다. 지금까지는 단순하게 수치를 확인하는 정도였다면 요즘에는 걸으면서 작은 보상을 받기 시작했다. 금융 플랫폼 ‘토스’의 만보기 서비스를 이용하면서부터다. 최근 사흘간 140원을 벌었다.

Photo by Arek Adeoye on Unsplash

Photo by Arek Adeoye on Unsplash

2019년 7월 첫선을 보인 토스의 만보기 서비스는 1000걸음, 5000걸음을 걸을 때 10원을 주고, 1만보를 걸으면 20원을 준다. 토스가 지정한 특정 장소를 방문하면 방문 보상으로 20원씩 100원까지 받을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받을 수 있는 하루 최대 보상액은 140원이다. 한 달 기준 4000원이 조금 넘는다. 2017년 2월 선보인 캐시워크는 100걸음마다 1캐시를 준다. 하루 최대 100캐시(약 71원)까지 적립할 수 있다. 삼성생명·삼성화재·삼성카드·삼성증권 등 삼성그룹 금융계열사 4곳이 공동으로 지난 4월 선보인 금융 플랫폼 ‘모니모’도 만보기 서비스를 제공한다. 5000보 이상을 걷는 등 특정 미션을 수행하면 ‘젤리’를 보상으로 주는데 젤리 1개당 10원에서 50원의 가치가 있는 ‘모니머니’로 교환해준다. 다양한 걷기앱을 함께 이용하면 한 달 프랜차이즈 브랜드의 커피값 정도는 벌 수 있는 셈이다.

만보기 서비스는 이동하면서 돈을 번다는 의미에서 ‘무브 투 언(Move to Earn·M2E)’ 앱으로도 불린다. 그저 목적지에 가려고 걸을 뿐인데, 왜 만보기 서비스를 하는 기업들은 보상을 줄까. 우선 앱에 사용자를 불러들이는 ‘리텐션(Retention·유지)’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리텐션이란 앱을 설치한 후 특정 기간 앱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유저의 수를 의미한다. 이용자의 참여와 관심도, 충성도 수준을 나타내는 핵심 지표로 기업의 수익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져 있다. 톡이 올 때마다 앱을 열게 되는 카카오톡이나 뉴스나 블로그 검색을 위해 자주 찾는 포털사이트와 달리 금융앱은 송금과 결제 외에는 방문할 이유가 많지 않다. 만보기 서비스를 제공하면, 이용자들이 보상을 받기 위해 수시로 앱을 확인하면서 다른 서비스도 이용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토스의 여인욱 매니저는 “사용자들에게 일상에서 쓸 수 있는 혜택을 제공하자는 고민에서 출발했다”면서 “고객의 리텐션을 높이는 효과도 있고, 토스의 다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는 차원에서 (걸음에 따른 보상을) 광고·마케팅 비용으로 집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향후 걷기앱에 쌓인 건강 데이터를 보험 등 금융상품 개발에 활용할 수도 있다. 업계에선 보험사가 함께 참여한 ‘삼성 금융 네트워크’의 모니모가 이런 방향으로 상품을 개발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리텐션 마케팅’에 유용

최근엔 가상자산 업계가 M2E 사업의 새로운 주류로 부상했다. 선두주자는 호주의 핀테크 기업 ‘Find satoshi lab’이 선보인 스테픈(STEPN)이다. 스테픈은 이용자가 가상자산 ‘솔라나’를 이용해 대체불가능토큰(NFT) 운동화를 구매 혹은 대여해야 참여할 수 있다. 그후 야외에서 걷거나 뛰면 GST라는 토큰을 받는데 이용자는 이 토큰을 소모해 운동화를 수리하거나 성능을 높일 수 있다. 운동화를 팔 수 있고, 거래소에서 GST를 솔라나 또는 (1달러로 고정된 가치를 유지하는) 스테이블 코인인 USDC로 교환해 현금화할 수도 있다.

스테픈은 지난 3월 29일 시장에 나온 이후 글로벌 다운로드 수 100만회 이상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국내에서도 네이버Z의 투자를 받은 스포츠테크 스타트업 ‘프로그라운드’가 비슷한 구조를 가진 ‘슈퍼워크’를 내놓을 채비를 하고 있다. 카카오 계열의 코인인 클레이튼 기반의 ‘더 스니커즈’도 출시를 앞두고 있다. 하지만 최근 루나·테라 사태로 가상자산 시장 전반이 침체하면서 업계에선 M2E 사업 자체가 거론되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상황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후발주자가 늘어나 기존 이용자가 갖고 있던 NFT운동화와 GST를 사줘야 가격이 오르는 구조라 루나·테라와 비슷한 ‘폰지사기’가 아니냐 하는 논란에 직면했다. 실제 지난 4월 말 8달러 가까이 치솟았던 GST 가격이 6월 2일 현재 0.86달러까지 폭락했다. 오재영 KB증권 애널리스트는 “시장 자체의 심리가 풀려야 하는데 지금은 루나 사태 여파로 모두 안 좋게 생각하니 거론하기 민감한 사업이 됐다”고 말했다.

1만보의 경제적 가치는?

가상자산 기반의 M2E 서비스가 투자 수단으로 각광받았다면, 걷기의 환경적 가치에 주목한 서비스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2020년 창업한 소셜테크 스타트업 글루리가 서비스하는 ‘포레스텝’을 들 수 있다. 포레스텝은 걷기 미션을 주고, 일정 목표에 도달하면 실제 식물 화분을 보상으로 준다. 완료 조건은 조금 까다롭다. 우선 하루 1만보 이상을 걸어야 나뭇잎 1개를 획득할 수 있다. 중간에 5000걸음을 넘을 때마다 물을 줘야 한다. 이렇게 14일 동안 나뭇잎 7개를 모으면 ‘꿈의 식물’을 화분에 담을 수 있다. 식물은 무작위로 정해지는데 화분에 담긴 식물을 터치하면 실제 식물을 받을 수 있는 쿠폰이 나온다. 꿈의 식물 10개를 모으면 실제 나무가 심어진다.

가상자산이나 식물 외에 걷기의 경제적 가치를 측정하는 또 하나의 기준으로 탄소배출권을 들 수 있다. 일례로 1만보(약 6.5㎞)를 이동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거리를 승용차(휘발유)를 타고 이동할 경우 약 1.3㎏(1㎞당 약 200g)의 온실가스를 배출하게 된다. 한국거래소(KRX)의 배출권 시장 정보플랫폼에 따르면 6월 2일 기준 국내 탄소배출권 가격(KAU22)은 1t당 2만1800원이다. 온실가스 1㎏을 배출할 수 있는 권리의 가격이 21.8원이라는 뜻이다. 1만보를 기준으로 하면, 28.34원(21.8원×1.3)이 된다. 1만보를 걷는다면 28.34원 가치의 탄소를 줄인다는 뜻이다. 매일 1만보씩 연중 걷는다면, 1만344원(28.34×365)이다.

탄소배출권의 가격은 지역마다 다르다. 세계 최대 거래시장인 유럽연합의 경우 t당 가격이 6월 2일 기준 86.42유로(약 11만5571원)에 달한다. 유럽연합에서라면 매일 1만보씩 한해 동안 걸으면 5만4804원(150.1원×365일)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탄소중립이 강조되고 배출권 수요가 늘어날 경우 국내에서도 가격이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걷기에 따른 개인의 탄소 배출 감축분을 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다면, ‘탄소기본소득’의 마중물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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