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한 날들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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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어딘가에서 우호적인 주민들이 어느 날 지구에 들른다. 지구인의 본질과 덕목을 배우고 싶다며 단 한명만 모셔가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과학소설과 판타지의 대가 어슐러 르귄이 설정한 상황이다. 르귄이 뽑은 단 한명의 지구인은 건장하고 총명한 남성 청년도, 담대하고 지적인 여성 청년도 아니다. 할머니. 종족의 대표로 당신을 선발했다고 말하면 “나 같은 늙은 여자가 뭘 하겠어요?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라고 말할 게 뻔한, 평범한 할머니 중 한명을 보내자고 했다.

코로나19 감염 우려로 면회가 금지돼 할머니께 쓴 편지(왼쪽)는 드리지 못했고 결국 영정 앞에 놓았다. 장례식장 밖에 나가보니 꽃이 환하게 피어 있었다. / 최미랑 기자

코로나19 감염 우려로 면회가 금지돼 할머니께 쓴 편지(왼쪽)는 드리지 못했고 결국 영정 앞에 놓았다. 장례식장 밖에 나가보니 꽃이 환하게 피어 있었다. / 최미랑 기자

지난 4월 3일 오전까지 지구상엔 한분의 할머니가 나에게 남아 있었다. 엄마를 낳고 나를 있게 한 김분순 할머니. 1926년생. 출생지는 경북 청도. 장례를 치르며 회사에 낼 가족관계증명서를 떼어보고 알았다. 만주에서 어린 시절의 일부를 보냈고, 결혼을 기점으로 평생을 경북 영천에서 살았다. 전쟁이 나자 피란을 준비하다가 둘째를 낳고 주저앉는 바람에 되레 살아남았다고 한다. 일곱을 낳았고, 하나를 먼저 떠나보냈다.

세상의 일을 전한답시고 멀리로 멀리로 이야기를 들으러 다니는 게 나의 직업인데, 가까운 우주의 형성부터 소멸까지 아는 바가 이 정도였다. 이제 이 우주는 기억의 반복 재생 그리고 추측으로만 남게 됐다. 요양원에서 감염병을 치른 후 기력이 쇠해 병원을 전전하다 세상을 떠난, 숱하게 흔하고 기록도 되지 않는 죽음으로.

할머니가 떠나고 꼭 일주일 되던 날 내 결혼식이 있었다.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입으면서 나는 스무 살 무렵의 할머니가 어떤 기분으로 혼례에 나갔을지 궁금했다. 나와 할머니를 동일선상에 놓아본 일이 전에는 없었다. 밭일을 하다 아이를 낳고 돌아서면 임신을 하다시피 했던 할머니, 그리고 꿈과 야망을 운운하는 내 삶에서 교집합을 찾기 어려웠다.

그날 나는 2명의 할머니를 얻었다. 결혼을 앞두고 요양원을 방문했을 때, 남편이 될 사람은 플라스틱 패널 또는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손자와 곧 결혼할 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했다. 공교롭게 지금까지 언급한 세 할머니 모두 젊은 나이에 남편을 떠나보냈다. 이 하나씩의 우주가 무엇을 해냈는지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젊은이든 어린이든 결국은 이들에게서 비롯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이들은 어떻게 세월을 헤쳐온 것일까? 곧 사라질 것만 같은 그 조그만 몸으로….

꿈도 미래도 스스로 만든다는 허상을 주입받고 살아온 나로선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다만 이 짧은 만남 이후로, 나 자신이 바로 저들의 응축된 열망으로 이뤄졌다고 믿게 됐다. 말도 생각도 점점 아이 같은, 유리벽 너머에서 결혼식에 나도 데려가 달라고 조르던 할머니의 눈동자를 보며, 확고하게 믿게 됐다.

이 모든 우주에 우리가 얼마나 가혹했는지 냉정하게 되짚어볼 시간이 다가온다. 밖에선 마스크를 벗고, 이전의 일상이 차츰, 그러나 당연한 듯 돌아오고 있다. 젊어서 겪은 일로도 조금도 모자라지 않을 텐데 어느 세대의 고통 총량은 왜 무한대로 늘어났을까. 누가 더 힘든가 비교하며 싸우는 게 주가 된 공론장의 어느 자리에 이 이야기를 끼워넣을 수 있을지 생각한다. 제 몫의 고통부터 들이민다고 어느 우주를 원망하기 전에 들여다보려는 태도를 놓지 않기를 바라며….

<최미랑 뉴콘텐츠팀 기자 r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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