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곡동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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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주택의 모습, 골목길에 고스란히

서울지하철 5호선 화곡역에서 내리면 소위 역세권을 실감할 수 있다. 지하철역을 나선 이들은 역 앞 정류장에서 강서구 곳곳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기다린다. 화곡역은 인근 주민들만 애용하는 게 아니라 퇴근시간이면 인천과 부천 사람들도 이곳에서 차를 갈아탄다. 그야말로 역 하나에 얼마나 많은 유동인구가 집중되는지를 알 수 있다. 큰 길가로 병원과 의원들이 눈에 보이고, 극장과 유흥시설뿐 아니라 학원들도 자리를 잡고 있다. 유흥가는 이곳보다 목동과 신정역 주변에 더 발달해 있다. 화곡역 주변은 그야말로 주민들이 오가며 이용하기에 꼭 필요한 업종들이 밀집해 있다. 강서구 교통의 요지라 사람 사는 분주함과 활기가 보인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은 전국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은 전국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벼이삭 사라지고 사람들 뿌리내려

화곡동은 화곡본동과 1동부터 8동까지 모두 7개의 동으로 이뤄져 있다. 화곡5동과 화곡7동은 각각 우장산동과 화곡1동에 통합돼 존재하지 않는다. 화곡동 전체에 걸쳐 5호선 지하철 우장산역, 화곡역, 까치산역이 지나가고 있으니 그 범위가 상당히 넓은 편이다. 거주민 수가 20만명 이상이라 인구밀도가 전국에서 가장 높은 동네다. 취학기 아동수와 출산율도 수위를 다툰다. 그만큼 젊은이들이 많이 산다는 뜻이다. 화곡동의 인구밀도는 앞으로도 더 높아질 전망이다. 1970~1980년대 지어진 다가구주택들이 증개축하면 공간도 인구도 늘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규모가 이렇게 커졌지만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1970년대 이전까지 이 일대는 대부분 논이었다. 화곡이란 이름도 벼가 많은 볏골이라는 옛 지명에서 따왔다고 한다. 벼는 사라졌고 벼이삭만큼 사람이 많아졌다.

1970년대 개발 당시 화곡동에 처음 정착한 이들은 서울이란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온 이들이었다. 대부분 단독주택단지로 이뤄져 당시 대표적인 중산층과 서민들의 동네였지만 택지개발을 새로 한 덕에 골목은 반듯반듯 잘 정비돼 있어 지금도 어디를 향해 걸어도 길 잃을 걱정이 없다. 그런데도 비슷한 시기 개발된 강남 일대와 비교하면 여러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화곡동 골목은 70년대부터 현재까지 주택가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화곡동 골목은 70년대부터 현재까지 주택가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한두 군데를 제외하고 대규모 아파트단지도 없어 화곡동 골목길은 시민들의 주택이 꼴을 바꿔온 흐름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한 골목에 1970년대 지은 단독주택과 1980~1990년대에 지은 다가구주택, 그후 2000년대 전후로 경쟁하듯 지었던 다세대주택과 요즘 짓는 도시형 생활주택들이 담을 맞대고 뒤섞여 있다. 우리 시대 집들의 진화된 꼴이 그대로 남아 있어 서울의 주택가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보고 싶다면 화곡동 골목을 걸으면 된다.

우편함에서 고지서 뭉치를 한움큼 꺼내던 노인은 “한 50년 전에 서울에서 살아보겠다고 고향에서 논밭 팔아 올라왔는데 막막하더라. 어찌 용케 지금까지 버텼다. 이제는 돌아갈 곳도 없고 여기가 고향이다 싶다”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집을 헐어 다시 짓고 쪼개 팔고 이리저리 궁리 끝에 서울살이가 다 지났다고 했다. 화곡동에 집을 가진 나이 든 세대들은 대부분 그런 과정을 거쳤으리라. 지금의 모습을 50년 전 미리 알 수 있었다면 그때도 고향을 떠났을지 의문이지만, 내일 일을 모르니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는 화곡동에서만 살아서 그런지 이곳이 살기 좋다고 이야기했다. 아직도 물가가 저렴한 편이고, 찾아보면 집세 싼 주택도 있고, 차 없어도 교통 편한 곳이 화곡동이라고 했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불편함 없이 다 있단다.

비교적 골목상권이 활발히 유지되고 있다.

비교적 골목상권이 활발히 유지되고 있다.

중장년층 이상의 주민들은 화곡동에서 살아온 기간이 대부분 긴 편에 속한다. 골목 과일가게 주인은 “여기 오래 산 사람들은 대부분 큰 욕심 안 부리고 자기 가진 것 파먹고 산 이들이다. 투기고 뭐고 집값 따라 이사 다니면서 투기하고 그런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골목 안 상점들은 대체로 10~20년 이상 장사를 계속해온 오래된 가게들이 많다. 요즘 맥을 못 추는 골목상권이 화곡동에는 그런대로 버티고 있는 셈이다. 골목길을 따라 주민을 위한 가게들인 떡집이며 과일가게, 미용실, 간식가게 등이 줄을 이었다. 주민들은 멀리 시장을 찾지 않고 집 앞 가게를 이용하고 있었다. 주택가 중형 마트 앞에 채소가게도 보이고, 생선가게도 있었다. 승자독식으로 마트 하나가 들어오면 주변 가게들은 모조리 문을 닫아야 하는 현실이 이곳에서는 살짝 비껴간 모습이다. 한눈에도 참 오래됐겠다 싶은 가게들이 골목에 자주 보였다. 연륜이 엿보이는 옷 수선집은 주민들에게 양재와 재봉을 가르치는 수업을 함께 하고 있었다. 미용실은 가게 앞 빈터에 큰 유화 그림 한폭을 걸어두었다. 그런 모습에서 나름 개성을 드러내고 오래도록 버틴 힘이 어디 있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골목 안 다양한 가게들이 오래도록 문을 열고 있다.

골목 안 다양한 가게들이 오래도록 문을 열고 있다.

제자리 지키고 있는 골목상권

이곳에서는 골목길이 전체 경제의 모세혈관에 해당한다는 점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요즘 대부분의 골목상권은 힘을 못 내고 있지만 화곡동 가게들은 힘겹게나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골목 안 작은 식당 주인에게 요새 어떠냐고 묻자 “어딘들 재미 보는 데가 있겠나. 우리는 그래도 배달 쪽으로 빨리 돌려서 버틸 수 있었다. 정부도 그렇고 여러가지가 바뀌니까 뭔가 변화가 있을 거라는 기대는 있다”고 말했다. 정책을 입안하고 경제의 대책을 세우는 이들은 대기업과 수출 실적을 살피는 일만큼 골목 바닥의 현황도 더 깊이 들여다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골목에서 만나는 이들은 모두가 절박하고 오늘 하루 버티기를 힘겨워하고 있었다.

화곡역 등 화곡동 일대의 지하철역은 유동인구가 많아 활발한 역세권으로 주목받는다.

화곡역 등 화곡동 일대의 지하철역은 유동인구가 많아 활발한 역세권으로 주목받는다.

대로변은 그래도 역세권을 실감할 수 있는 분주함이 있고, 골목 안은 안정된 골목상권이 남아 있었다. 어느 목 좋은 부동산에는 엊그제 행사를 치른 듯 화환과 화분들이 요란히 놓여 있었고, 사업 안내를 알리는 현수막이 골목길 사방에 걸려 있었다. ‘역세권 재개발 사업.’ 뭔가 거창한 사업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인근 가게 주인에게 뭐하는 사업인지 묻자 빙긋이 웃기만 한다. “때가 되면 여기저기서 바람 불고 판 벌리는 게 일이다”는 야릇한 대답만을 들려준다. 부동산 업자는 연신 목청 높여 전화기 너머 누군가를 진지하게 설득하고 있었다.

화곡동은 인근 동네들과 달리 대규모 아파트단지도 별로 없고, 재개발도 민간개발보다 공공개발을 지향하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이제 대형 재개발 사업의 이점이 그다지 와닿지 않기 때문이리라. 대선이 끝나고 이런저런 기대심리에 술렁이는 일은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겠다 싶다. 인근에 마곡단지가 들어서면서 부동산 업자들은 어떻게든 화곡동에도 불씨를 살리려 하지만 사람들은 예전보다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역세권 재개발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역세권 재개발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골목길 어귀에 행정복지센터(주민센터)에서 걸어둔 고지문이 보인다. 주민들에게 유튜브 영상 제작 등 미디어 교육을 한다는 안내문이었다. 행정복지센터에서 화곡동에 ‘행복한 동네’라는 명칭을 붙인 것도 눈에 띈다. 집을 허물고 새로 짓는 일도 중요하지만, 시대에 맞는 도구를 주민들에게 넘겨주는 사업도 분명히 필요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화곡동은 꽤나 앞서가는 마을이다. 남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아니라 자기가 보는 대로 현실을 보여주고 말할 수 있을 때 민주주의는 더 성장하는 법이라 믿는다.

골목의 남쪽 끝 하늘에 거대한 비행기가 낮게 날아가고 있었다. 인근 김포공항으로 착륙하려고 비행기는 고도를 낮춰 천천히 날고 있다. 그 광경을 보고서야 이곳이 서울의 경계라는 점이 떠올랐다. 바로 옆이 경기도 부천이라 여러 면에서 화곡동과 생활권이 겹친다고 한다.

행정복지센터에서 미디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행정복지센터에서 미디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화곡동 골목길에는 예전 논만 있던 시절의 지명들이 남아 있다. 초록동, 곰달래길, 능꼴마을, 바탕골, 안골마을, 솔뫼, 새까지 마을, 더부리 마을, 그리고 원씨·김씨·박씨가 살던 원촌말·김촌말·박장말. 옛지명들은 어쩜 그리 아름답고 소박한지. 그 마을에서 살던 사람들과 기억은 사라지고 단지 초록마을길이라든가 솔뫼공원 등의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화곡1동 곰달래길 일대는 1970년대풍의 유흥과 색정을 파는 붉은 등의 가게들이 남아 있어 난봉꾼들의 발길을 이끈다.

골목길엔 종종 보습학원 등의 간판이 보인다. 아이들과 학생들이 많은 곳이란 명성에 걸맞게 곳곳에 학원이며 스터디 카페들이 있다. 버스정류장에도 남녀학생들이 깔깔거리는 모습을 쉬이 볼 수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어린이들은 할머니 손을 잡고 바쁘게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너무 일찍 할머니가 된 고운 모습의 중년층은 뛰어가려는 아이를 달래느라 혼이 빠진다. 북적북적한 골목의 모습은 연고 없는 행인의 마음도 들뜨게 했다. 아무래도 골목에 청년과 학생, 어린이들이 많아야 활기가 넘친다.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들

서울 사대문을 벗어나면 대부분의 동네와 골목길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화곡동도 1970년대 이후 개발이 이뤄졌으니 그 골목의 역사는 불과 50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여러 면에서 달라졌다. 골목 안엔 집의 모습 등 변화도 있지만 버티고 남아 있는 것들도 적지 않다. 어제 인사했던 과일가게 주인을 내일도 볼 수 있고, 수십년이 지나도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점포들이 있다는 건 마음에 안도감을 준다. 멀리 여행 갔다 돌아와도 알아봐주고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이웃으로 있는 한 그곳은 평안하다. 화곡동 골목에서 어려움을 이겨내고 버티고 있는 상권의 주인공들은 그래서 소중하다. 변해도 변하지 않은 걸 보고 싶다면 화곡동 골목길을 살펴보면 된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골목 내시경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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