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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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월급이 들어오자마자 조카들에게 줄 어린이날 선물을 샀다. 요즘 장난감은 어른이 봐도 눈이 핑핑 돌아간다. 현란한 기술을 선보이는 게 많다. 이번에 산 건 무선 조종 공룡 로봇과 물에 넣으면 특정한 형태로 변하는 물감이다. 장난감이 작동하는 원리는 잘 모르지만 상관없다. 선물 얘기를 하면 조카들이 방긋방긋 웃는다. 사실상 주는 쪽이 더 행복해지는, 선물의 마법이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간간이 조카 선물을 챙기는 이유가 ‘조카 바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린이는 ‘조건 없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시험을 잘 봐서, 말을 잘 들어서, 심부름을 갔다 와서 받는 ‘조건부 급부’가 아니라 그냥 존재 자체로 선물을 받는 경험이 풍부할수록 더 단단한 주체로 자라리라 믿는다. 어른이 주는 용돈을 쥐어보고, 집안 형편이 어렵더라도 공연을 볼 기회를 얻고, 행사장에서 풍선이나 스티커를 받는 크고 작은 경험 말이다. 꼭 ‘잘해서’가 아니라 ‘그림을 그렸다’, ‘청소했다’처럼 하기만 해도 칭찬하는 것 또한 훌륭한 선물이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내가 속한 세대(1990년대생)까지만 해도 사회가 아동을 보는 시선이 지금보다 열악했다. 개별 가정의 상황과 무관하게 학교를 비롯한 교육기관과 양육문화 자체가 팍팍했다. 체벌도 만연했다. 집 밖으로 내쫓기, 폭언 따위는 아동학대 축에도 끼지 못했다. 미식을 경험하지 못한 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기대할 수 없듯이, 윗세대는 더 팍팍하게 자랐을 테니 당연한 결과였다. 청년들이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보며 양육자에게서 받지 못한 위로를 찾는 식으로 ‘셀프 치유’를 한다는 보도에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사회적 여건도 녹록지 않았다. 2010학년도엔 70만명 가까이가 수능에 응시했다. 그들이 전국의 400개 남짓한 대학에 배치됐다. 취업 전선에서 제 몫의 자리를 찾아보려고 아직도 분투하는 이들이 많다. 우리 세대는 치열하게 줄 서는 것으로도 모자라 의사, 교사, 소방관, 운동선수, 연구자 같은 수많은 직업군의 서열조차 매겨야 하는 구조적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조카들이 태어난 2014년과 2016년의 출생아 수는 40만명대로 떨어졌다. 이후 더 급감해 2021년은 약 26만5000명에 불과했다. 앞으론 20만명 남짓한 아이들을 사회 필수 인력은 물론이고 다양한 직업인으로 키워내야 한다는 뜻이다. 이민을 더 많이 받아들인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미래가 그렇다.

이런 사회에서 아동·청소년 줄 세우기가 과연 온당한지 의문이 든다. 과거의 시선으로 미래를 이끌어갈 이들을 재단하고 가두는 일이 합리적일 리 없다. ‘인구절벽’이란 말이 주는 위태로움을 반전시켜 보자면, 더 많은 어린이가 ‘적성과 흥미’에 따라 장래희망을 찾을 기회를 이제야 겨우 제대로 맞이한 걸지도 모른다. 과거엔 꿈만 같던 일이다. 치열하게 줄 서지 않아도 되고, 존재 그 자체만으로 칭찬받고 행복할 수 있는 사회.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야말로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은 올해 어린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김서영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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