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제동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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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열사의 숭고함이 깃든 골목

서울 사대문 안에는 100년 넘은 초등학교가 몇곳 있다. 그야말로 우리 교육사와 발자취를 같이한 곳들인데 그중 하나가 서울효제초등학교다. 서울효제초등학교는 1895년 11월 15일 관립 양사동소학교로 문을 열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아쉽게도 효제동이란 이름은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으로 지은 이름인데, 사람들의 반발을 피해 유교의 충절 이념인 부모에 대한 효와 형제간의 우애를 뜻하는 효제(孝弟)를 따왔다고 했다. 효제동과 맞닿은 동네가 충신동이니 효제충신(孝弟忠信)이란 옛 시대의 가치가 이름에 박혀 있다.

서울 종로구 효제동은 오래된 역사만큼 관록 있는 음식점과 점포들을 볼 수 있다.

서울 종로구 효제동은 오래된 역사만큼 관록 있는 음식점과 점포들을 볼 수 있다.

지금은 조용한 골목길 효제동 골목길은 서울효제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종로6가 일대 뒷길을 이리저리 얽고 있다. 동쪽으로는 동대문에 닿고 북쪽은 이화동과 대학로에 이르며 서쪽은 종로5가에 닿는 넓은 영역이다. 골목길은 시대의 변화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데, 100년도 훨씬 전에 초등학교가 들어설 정도로 활발한 주거지였다. 지금 그 흔적은 먼지 한톨도 남아 있지 않아 골목길엔 사람 사는 흔적이란 볼 수 없다. 단지 동대문과 맞닿은 특성상 원단 창고와 사무실이 가장 많이 눈에 띄고, 예전 대학천 도서 도매상들이 여럿 있던 흔적으로 아직 떼지 못한 서점 간판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종로6가 한의원과 한약상들이 골목 안에도 띄엄띄엄 있었으나 그것도 시절의 흐름상 철거 중이다. 골목을 걷다 보면 흔하게 ‘창고 임대, 원단 창고 환영’이라 붙인 안내문을 자주 보게 된다. 이마저 얼마나 그 쓰임이 오래갈까 모를 일이다.

효제동 골목의 막바지 부분엔 이 계절에 활황인 샛길 골목시장이 있다. 종로꽃시장. 본디 종로5가에서 6가 일대 인도에 흩어져 있던 것을 가로정비 차원에서 이곳으로 옮겨 꽃시장을 조성했다. 충신시장에서 종로6가까지 이어진 그렇게 길지 않은 시장이지만 야생화부터 유실수에 분재, 화분과 원예 관련 상품 일체가 이곳에 있다. 시내 한복판 꽃만 파는 시장이 있는 것도 유난한 일이고, 이곳의 꽃들은 나름 고르고 선별된 것이라 계절마다 유행하는 꽃 종목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종로통 상점 손님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주로 중장년층과 노년층이 이곳을 찾는다.

서울 효제초등학교 뒷길은 이곳에서 순국한 김상옥 열사를 기리기 위해 김상옥로로 명명됐다.

서울 효제초등학교 뒷길은 이곳에서 순국한 김상옥 열사를 기리기 위해 김상옥로로 명명됐다.

화분을 고르는 손님은 “자식이야 내 맘대로 못하지만 화초는 물 주면 꽃피고, 이리저리 옮기고 다듬어도 투정하지 않아 좋다”고 말했다. 아마 꽃시장을 찾는 이들 대부분이 갖는 속내의 한편일 수도 있겠다 싶다. “꽃 한포기에 1000원이면 살 수 있다. 만원 한장이면 몇달은 꽃잔치를 할 수 있으니 취미 중 경제적인 편에 속한다”는 상인의 이야기에 손님은 “화분에 영양제에, 어쩌다 귀한 꽃 보면 욕심이 나고 그렇다. 시장 한바퀴 돌아 원없이 사려면 돈 몇푼으로는 턱도 없다”고 대꾸한다. 어떤 부부는 화분 하나를 앞에 두고 싸우기에 바쁘다. 남편은 꽃이 어둡다 하고, 아내는 잔소리가 넘친다고 대꾸한다. 다시는 함께 안 온다는 게 아내의 결론이다. 꽃도 운명이 있어 어떤 건 내놓기 무섭게 팔려나가고 며칠이 지나도 찾는 이 없어 한쪽으로 밀려난 화분도 보인다. 꽃답던 시절을 덧없이 흘려버렸기 때문일까. 꽃을 향한 노인들의 애정은 깊다. 저마다 생긴 대로 아껴지거나 버려지는 건 사람과 꽃의 공통된 숙명 아닌가.

꽃시장은 충신동으로 이어지는 샛길에 활기를 준다. 휑하던 골목은 사람의 발길로 분주해지지만, 주민이 살지 않는 도심지 골목 대부분의 모습처럼 해 떨어진 후의 황량은 피하지 못한다. 꽃시장에서 골목을 잇댄 충신시장은 한때 효제동과 충신동 주민들이 장을 보던 터전이지만 이제는 이름만 남은 시장이 됐다. 시장엔 보통 장마당과는 다른 풍경이 보인다. 사람도, 장바닥에서 보통 볼 수 있는 물건들도 없다. 떡집 한곳과 이런저런 잡화상 한두곳, 설비공사를 하는 점포, 망각과 소외의 먼지가 골목을 온통 뒤덮고 있다. “사람이 살아야지 장을 봐먹지. 우리도 조금 걸어서 창신시장에 가거나 저 한길 끝에 있는 채소가게에서 물건을 산다”고 골목길 화분을 손보던 노인이 말했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영광은 끝장이다.

종로꽃시장은 꽃을 아끼는 이들의 명소다.

종로꽃시장은 꽃을 아끼는 이들의 명소다.

효제동 골목 한편에는 민요와 장구를 연주하는 주점도 있다.

효제동 골목 한편에는 민요와 장구를 연주하는 주점도 있다.

곳곳엔 이름난 식당도 노인의 말대로 꽃시장 입구 큰길가에는 채소와 과일을 파는 커다란 가게가 있고, 조금 떨어진 길가에도 비슷한 점포가 있다. 손님이 많은 모양으로 과일이며 채소는 종류가 다양하고, 가격도 적당하다. 고구마를 권하던 상인은 “주민이 없어 보여도 숨은 듯이 사람이 산다. 가내공장 하는 이들이 공장 겸 집 삼아 살고 있고, 가게 장사하는 이들도 그런 식으로 꽤 산다. 손님은 꽃시장 오는 이들과 동네 주민이 반반 정도 될 것 같다”고 한다. 구멍가게도 사라지고 골목시장도 변변찮으면 지워지는 게 시대의 양상이다.

오래된 골목이라 곳곳에 오래도록 장사하는 이름난 식당도 눈에 띈다. 테이블 대여섯개 되는 작은 가게에서 수십년간 가락국수와 메밀국수를 팔아온 식당. 종로5가 육회 전문식당들이 이름나기 전부터 육회와 갈비구이로 명성을 날렸던 정육식당 등이 효제동의 유명세를 높였다. 입맛 까칠한 단골 노인들 사이에서 명성을 잃지 않으려면 남다른 무엇이 숨어 있어야 한다.

효제동 골목 대부분은 원단창고들이 차지하고 있다.

효제동 골목 대부분은 원단창고들이 차지하고 있다.

뒷골목엔 요즘 보기 힘든 가게들이 눈에 띈다. 간판엔 ‘민요 장구 전문’을 큼지막하게 써두고 골목으로 향한 창엔 나이든 여인이 밖을 살핀다. 해가 지면 온갖 색깔의 전구가 깜박이고, 그 야릇한 외관만으로도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가 짐작할 수 있다. 손님이 아님을 알아챈 여인은 손님 많냐는 질문에 심드렁히 “요즘 사람들은 풍류를 몰라서 안 온다. 예전 손님들은 막 시조도 한가락 읊고 했는데, 이제 저승 가서나 그 이들을 만날까 싶다”고 답했다. 술 한상을 시키면 장구가락에 맞춰 민요도 부르고 한다는데 시대의 요청대로 노래방 기계까지 들여놓았는데도 이제 손님 보기가 하릴없이 귀하다는 설명이다. 그런데도 골목길엔 여기저기 비슷한 가게들이 문을 열고 있다. 여기뿐 아니라 길 건너 백년시장 옆은 골목 하나를 온통 이런 술집들이 점령하고 있다. 햇빛이 들지 않아도 음지식물은 제 살길을 찾아 번창한다. 풍류를 아는 가객으로 경기민요 한가락에 시조 한수 정도는 읊을 수 있는 이들은 가볼 만한 곳이겠으나 그저 멋없이 소란한 취객들은 환영치 않는다니 유념해야 할 바이다.

한때 효제동 건너 옛 기독교방송국 앞은 의정부에서 오던 시외버스의 종점이었다. 또 다른 길 건너편은 서울 동쪽, 지금의 하남시가 된 신장에서 오던 버스들이 섰다. 서울 북쪽과 동쪽 상인들은 이곳에서 내려 효제동에서 한약재나 책 등을 떼가고 종로6가 선진상가와 광장시장, 평화시장, 동대문시장 등지에서 장을 봤으니 골목이 붐비고 가게들이 흥청거리던 때가 분명 있었다. 지금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자면 아무도 기억 못 할 바이나, 그때 번영의 환상에 발이 묶인 이들도 있어 뒤만 돌아보고 떠나지 못하는 모습도 보이는 듯싶다.

충신시장은 이름만 남아 시장의 기능이 사라졌다.

충신시장은 이름만 남아 시장의 기능이 사라졌다.

김상옥 열사의 고향 효제초등학교 뒤편으로 난 길의 이름은 김상옥로이다. 일제 순사 400여명을 상대로 권총 두자루로 수시간 총격전을 벌였던 전설 속 의열단 김상옥 열사(1889~1923)를 기리기 위함이다. 효제동은 김상옥 열사의 고향이고 효제초등학교가 열사의 모교다. 김상옥 열사의 독립운동 활약상은 여러모로 영화 <암살>(2015)의 모티브가 됐다고 하는데, 수백명과 총격전을 벌이면서 10발의 총알을 맞고도 총을 쏘며 담을 뛰어넘던 마지막 전장이 효제동 일대다. 숙연한 일이다.

그의 동지였던 조소앙은 <김상옥 열사 투쟁사> 서문에서 “일개 군졸의 아들로 소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춥고 배고픔이 뼈에 사무치는데도 애국심을 길러 자기의 사랑하는 신혼 처와 부모 형제의 평화롭고 안전한 포근한 보금자리를 제 손으로 뒤집어엎고 화약의 열성을 지고 불구덩이로 침입하여 조국의 장엄한 존재를 위하여 민족의 탁월한 권위를 찾아오기에 바빠하는 김상옥 열사가 있었더라”고 썼다. 그 시절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의 절박한 처지를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열사는 3·1운동 이후 독립의 길을 무장투쟁에서 찾고 일제 사이토 총독을 처단하기 위해 길을 찾았다. 거사 실패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로 망명해 다시 총독 암살을 모색한다.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폭파하고 그림자조차 찾지 못하게 도망을 다녔다. 은신 중에 밀고로 발각됐음에도 종로경찰서 형사부장을 사살하고 빠져나간다. 1923년 1월 22일 열사는 효제동을 덮친 기마대와 무장 순사 400여명과 장엄히 맞섰다. 은신처를 덮친 경찰부장을 총살하고도 권총 2자루에 의지한 채 무려 3시간 반을 싸웠다고 한다.

가내공장과 상가 사람들이 주민 대부분이다.

가내공장과 상가 사람들이 주민 대부분이다.

열사가 임시정부를 떠나면서 남겼다는 유언은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한다면 내세에서 만납시다. 나는 자결해 뜻을 지킬지언정 포로가 되지 않겠소”였는데 결국 마지막 남은 총알 1발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자결했다. 그 마지막 전장은 허물어져 지금 효자동 골목길의 일부가 됐다. 그러니 그를 생각하면 효제동 골목길을 걷는 일이 장엄하지 않을 수 없다. 김상옥 열사의 동상은 인근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 서 있는데, 상하이에서 거사를 위해 찍은 마지막 사진의 모습과 같다. 조국을 빼앗길 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두 손이 부끄러워 보일 수 없다며 뒷짐을 지고 사진을 찍었다는, 깊은 뜻도 숙연하다.

어떤 길에나 미미함에서부터 위대함에 이르기까지 역사가 겹쳐 있다. 골목을 걷는 건 그 역사 위를 걷는 일이다. 위대함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삶의 미미한 것들도 골목길을 통해 깨어난다. 충신시장의 황량함에서 시절의 무상함을 볼 수 있고, 꽃시장 골목길에서 현실의 아름다움에 눈을 뜬다. 김상옥로에 서서 그가 다졌던 민족에 대한 믿음과 충성을 만날 수 있다면 더 좋은 일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육회 한 접시에 행복한 한 끼니를 즐길 수 있는 길이 효제동 골목이다. 이곳의 이름이 어떤 연유로 지어졌든 상관없이 효도하고 우애를 가지며 민족을 믿고 할 바를 다할 수 있다면 좋을 일이다. 효제동 골목에서 누군가 끝까지 장렬했던 사람을 기억한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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